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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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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호
조선과 청조 간 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청조와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에 미친 영향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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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조선화교 형성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양국 간의 협정은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었다. 이 장정이 체결된 것은 1882104일 톈진(天津)에서였다. 이 장정은 중국인이 조선의 개항장에서 거주하면서 상업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양국 간 해로를 통한 무역을 본격적으로 이뤄지게 했다. 그런데 이 장정이 불령인도차이나의 베트남을 둘러싼 청조와 프랑스 간의 통상조약 체결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사실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사본 -1896년의 리홍장 위키피디어.jpg

사진 1. 조선과 불령인도차이나 간의 통상조약 체결을 주도한 리홍장(1896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조선과 청조 간에 협정된 데 비해, 1880년대 베트남을 둘러싼 조약이 베트남이 아니라 프랑스와 청조 간에 체결된 데는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식민지화가 배경에 있었다. 프랑스는 1867년에 남부에 코친차이나 식민지를 건설하고, 1883년에는 베트남 보호국화를 강행했다. 청조는 이러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및 베트남에 대한 식민지화 조치에 대항하여 양국 간에 전쟁이 발발했다. 양국 간의 전쟁에서 해군력이 우위에 있던 프랑스가 해전에선 승리를 거두지만 육지에선 패배를 당하면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양국 간 휴전을 위해 18856월 청조 전권대신 리홍장(李鴻章)과 프랑스 전권대신 줄러 빠터노터(Jules Patenôtre) 간에 톈진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청조가 베트남에 대한 프랑스의 보호권을 승인한 점에서 청조 측이 베트남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국의 지위를 포기한 것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베트남화교의 보호 및 지위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조약 교섭 과정에서 논란이 된 것은 청조의 베트남에 대한 속방(屬邦)’ 유지 문제였다.

 

이 조약 제2조에 위망체면(威望體面)’을 손상해서는 안 된다는 문구가 있었다. 이 문구는 청조가 강력히 요구하여 관철시킨 것으로, 양국 간 교류에선 서로 위망과 체면을 세워줘야 하고 그 반대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제5조에는 청조가 베트남 북부의 각대성진(各大城鎭, 대도시)’에 영사를 파견하여 주재시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청조는 이 두 조항에 근거하여 그 후의 추가 협상과정에서 청조의 베트남에 대한 전통적인 종주권을 유지하려 시도했다.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협상 과정에도 참가했던 톈진해관도(天津海關道)인 주복(周馥)1886123일 벌어진 협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베트남은 원래 중국의 속방이며, 프랑스가 (베트남을) 보호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華人이 베트남에 가는 것과 프랑스에 가는 것은 다르다. 화인 자신의 소송은 중국 측이 처리하도록 해야 한다.……新約(톈진조약을 말함) 내의 위망체면은 이러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 화교의 소송은 청조가 파견한 영사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는 영사재판권을 주장한 것인데, 이것은 톈진조약 제2조의 위망체면에 의거한 것이었다그해 225일 개최된 협상에서 프랑스 측의 대표인 조르쥬 꼬고르단(Georges Cogordan)조선에 거주하는 화민은 중국 관리의 관할로 귀속하는가라고 질문하자, 리홍장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물론 중국 관리의 관할에 귀속된다. 베트남과 조선은 모두 중국의 속방이며, 똑같이 처리해야 한다. 베트남에서 화인 간의 소송 및 화인과 베트남인 간의 소송은 모두 중국 영사가 재판을 행하고, 화인과 프랑스인 간의 소송은 피고 측 나라의 관리가 재판을 하고, 원고측 나라의 관리가 청신(廳訊, 입회)’하도록 해야 한다.……베트남의 화인 재판은 조선에서 하는 방법을 원용해야 한다.”

 

리홍장의 대답은 바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제2조에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이 장정 제2조는 중국 상민이 조선 해안에 있어 만일 제소할 일이 있으면 그것은 반드시 중국 상무위원(영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나 이외 '재산범죄등 건'에 대하여 만일 조선 인민이 원고가 되고 중국인민이 피고가 될 때에는 반드시 중국 상무위원으로 하여금 체포, 판단하여 주고 만일 중국인민이 원고가 되고 조선인민이 피고가 될 때에는 반드시 조선관원으로 하여금 피고의 범죄 사실을 가져다가 중국상무위원과 회합하고 안률(按律)하여 심판한다.”는 것이었다.

 

리홍장이 북양대신으로서 이 장정 체결을 주도한 인물이기에 영사재판권에 대한 사정을 가장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리홍장은 비록 청조가 베트남에서 보호권을 프랑스에 승인은 했지만, 영사재판권을 통해 프랑스에는 대등, ‘속방인 베트남보다는 상위에 자리매김하려는 틀을 만들어 내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꼬고르단은 리홍장의 답변에 대해 현재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하에 있어 조선과 다르다. 중국의 주베트남영사에게 최혜국대우를 부여하지만, 그 이상의 규정은 설정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청조 측의 영사재판권 요구에 대해 프랑스 측은 끝까지 수용하지 않았다. 결국, 이 문제는 1886426일 체결된 월남변계통상장정(越南邊界通商章程)’의 제16조에, “베트남에 거주하는 중국 상민의 살인사건, 과세, 소송 등의 모든 안건은 모두 프랑스의 최혜국국민과 동등의 대우를 부여한다. ‘변계통상처소(邊界通商處所)’에서 화인과 프랑스인·베트남인 간의 소송은 중국과 프랑스 관원에 의한 회심으로 한다.”로 결착됐다. , 청조 측이 강력히 요구했던 영사재판권은 인정되지 않았지만, 국경 통상지에서 화인과 프랑스인·베트남인 간의 소송은 양국 관리에 의한 혼합재판(회심)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난 것이다.


사본 -1885년 하노이의 화상 위키.jpg

    사진 2. 하노이의 화상(1885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중국인의 조선 이주와 화교의 무역·상업 활동에 유리한 조건을 부여, 먼저 진출한 일본인 상인 세력을 캐치·업 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청조가 조선의 사례를 원용하여 화교에게 유리한 영사재판권을 획득하려 했지만, 프랑스의 반대로 결국 좌절됐다. 그뿐 아니라 18876월 양국의 교환 공문에서, 청조는 베트남 북부의 각대성진’(대도시)에 청조 영사의 설치를 당면 실시하지 않는다고 약속함으로써, 하노이와 하이퐁에 청조의 영사관이 설치되지 못했다. 하이퐁과 하노이에 중국의 영사관이 실제로 설치되는 것은 1930년대 중반이 되어서였다. 물론 이 기간 베트남 화교는 자국의 영사로부터 직접적인 보호를 받지 못했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0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부교수

 

                                          

 

* 참고문헌


이정희·송승석,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 학고방, 2014, 389-394.

靑山治世, 中國在ベトナム領事設置をめぐる對佛交涉-淸朝による領事裁判要求屬邦,

亞細亞大學國際關係紀要23(1/2), 2014, 77-120.

箱田惠子, 外交官誕生, 名古屋大學出版會, 2012.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s://namu.wiki/w/%EC%9D%B4%ED%99%8D%EC%9E%A5 

사진 2. https://en.wikipedia.org/wiki/Hoa_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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