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1. 희대의 베스트셀러
장(張)씨는 이(李)씨, 왕(王)씨, 류(劉)씨와 함께 중국 4대 성 중 하나다. ‘장생(張生)’은 장씨 성의 서생(書生)이라는 뜻이니, 지금까지 중국에서 ‘장생’이라 불린 이들은 한둘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장생’이라고 하면 수많은 장생 중에서도 『서상기』의 남자 주인공 장군서(張群瑞)를 떠올리는 중국인들이 많다. 『서상기』가 중국에서 얼마나 잘 알려진 작품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서상기』는 중국 원대(元代)에 창작된 희곡으로 중국 문학사상 중요한 고전 명저로 꼽힌다. 이 작품은 아름답고 화려한 표현이 풍부해 일찌감치 작품성을 인정받았을 뿐 아니라 명청대(明淸代)를 통틀어 독자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었다. 『서상기』 독서 열풍을 가리키는 ‘서상열(西廂熱)’이라는 말이 따로 있을 정도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현존하는 명청대 『서상기』 판본은 120여 종인데, 이는 중국 고전 희곡 중 가장 많은 숫자다. 지금도 책이 인기가 있으면 판형을 달리한 버전을 새롭게 간행하기도 하는데, 명청대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기 때문에 잘 팔리는 책은 여러 출판사에서 서로 다른 판으로 찍어 냈다. 이렇게 해서 서로 다른 120여 버전의 『서상기』가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림 1. 장생의 거문고 연주를 듣는 앵앵
(독일 쾰른 동아시아미술관 소장 민제급각(閔齊伋刻) 『회진도(會眞圖)』 제8절 「청금(聽琴)」 삽화)
2. 세상의 모든 사랑이 이루어지길
『서상기』는 재상 집안의 외동딸 앵앵(鶯鶯)과 서생 장군서 간의 사랑 이야기로, ‘서상(西廂)’, 즉 서쪽 곁채를 배경으로 한다. 보구사(普救寺)라는 절의 서쪽에 곁채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 두 사람의 밀회가 이뤄졌기 때문에 작품의 제목이 ‘서상기’가 된 것이다. 보구사는 당(唐) 무측천(武則天) 때에 창건된 절로 중국 산서성(山西省) 영제시(永济市)에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부모는 자식이 자신들보다 나은 형편이거나 적어도 비슷한 형편의 사람과 결혼하기를 바란다. 재상 집안의 딸과 일개 서생이 쉽게 부모의 허락을 받아 결혼할 리는 만무하다. 결국 몰래 사랑을 키우던 앵앵과 장군서는 앵앵의 모친의 반대에 부딪혀 생이별하게 되는데, 이야기의 결말은 판본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장군서가 과거에 급제해 앵앵과 혼인을 맺는다는 내용이다.
어찌 보면 뻔해 보이는 이야기지만 이 이야기가 처음 나왔을 때는 부모가 정해 준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미혼의 남자와 여자가 부모 몰래 잠자리를 하고 결혼까지 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전통적 혼인관념과 현실적인 장애를 뛰어넘어 자유연애를 옹호하는 이야기의 주제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에도 대중들의 지지를 받을 만하다. 특히 ‘원컨대 천하의 연인들이 모두 결혼해 부부가 되기를!(願普天下有情人都成了眷屬!)’이라는 극중 대사는 자유연애를 옹호하는 작품의 메시지를 전하며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서상기』에 대중들이 지지하는 주제가 담기게 된 것은 그것의 창작 과정에 대중들이 참여한 것과 관련이 깊다. 『서상기』의 작자는 원대 왕실보(王實甫)로 알려져 있지만, 『서상기』는 한 작가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라 당대(唐代) 소설 『앵앵전(鶯鶯傳)』의 주요 줄거리를 바탕으로 원대와 명대를 살았던 수많은 독서 대중 및 공연 예술 관람자들의 공동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왕실보가 『서상기』를 완성하기까지는 금대(金代)의 동해원(董解元)을 비롯해 『앵앵전』의 내용에 조금씩 변화를 주었던 수많은 거리의 공연가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 반응했던 공연 관람객들의 집단 창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집단 창작의 결과 원작 『앵앵전』에서 앵앵과 장군서의 이별로 끝이 났던 결말은 『서상기』에 이르러 해피엔딩으로 바뀌었다. 『서상기』는 이처럼 다양한 관중들의 요구를 반영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서상기』는 『앵앵전』에서부터 시작하여 같은 이야기가 장르와 매체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특히 근대에는 이른바 ‘서상고사(西廂故事)’를 새로운 장르와 매체를 통해 전달하려는 시도가 이전 어느 시기보다도 과감하고 다양했다. 당시 큰 인기를 얻은 유혈륜(喩血輪)의 소설 『서상기연의(西廂記演義)』(1918), 서양 오페라 양식으로 각색한 곽말약(郭沫若)의 『서상기』(1929), 중국 만화의 기원인 연환화(連環畫)로 그려져 큰 인기를 얻은 후카오(胡考)의 『서상기』(1935), 허우야오(侯曜)의 흑백 무성영화 『서상기』(1927), 장스추안(張石川)의 흑백 유성영화 『서상기』(1940)는 근대 문물이 물밀듯이 유입되던 시기 창작자들이 새로운 대중의 요구에 부합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버전의 『서상기』를 만들어내고자 시도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도는 현재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서상고사를 소재로 한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 홍콩 쇼브라더스가 제작을 맡고 인기 배우 리칭(李菁)이 앵앵의 시종 홍낭을 연기한 <서상기>(1965), 유명 배우 샤오펑(邵峰)이 장군서를 연기한 <서상기>(1994), 대만의 유명 배우 수요우펑(苏有朋)이 장군서를 연기한 <홍낭(紅娘)>(1998) 등을 주요 영화로 꼽을 수 있고, 드라마로는 <서상전기(西廂傳奇)>(2001), 홍콩 TVB 방송의 <서상기연(西厢奇缘)>(2005), <신서상기(新西廂記)>(2013) 등이 방영되었다. 특히 <서상기연>과 <신서상기>는 새로운 인물을 등장시키고 주변 인물의 서사를 확장하는 한편 원작의 줄거리를 크게 바꾸는 등 시청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줄거리를 어떻게 바꾸었든 간에 서상고사를 소재로 한 영화와 드라마는 순수한 사랑을 옹호하는 원작의 주제를 부각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사진 2. 드라마 <신서상기(新西廂記)>(2013)
3. 조선 문단을 뒤흔들다
『서상기』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에서도 많은 독자를 거느렸다. 조선 후기 『서상기』는 『삼국지』나 『수호전』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고, 『서유기』나 『금병매』보다 더 많이 전사(轉寫: 손으로 베껴 쓰는 것)되고 더 많이 번역되었다. 『서상기』를 정확하게 독해하기 위한 『서상기』 어휘 사전이 여러 종 나왔고, 『서상기』 주석서, 『서상기』 평점본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사진 3. 『서상기』 한글 번역본
사진 4. 서상기 어휘사전 「서상기어록해(西廂記語錄解)」
조선에서의 『서상기』의 인기는 작품 자체보다도 청대(淸代)의 문인 김성탄(金聖歎)에게 빚진 면이 크다. 그가 『서상기』에 평점을 덧붙여 ‘뛰어난 재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여섯 번째 책’이라는 뜻에서 『제육재자서서상기(第六才子書西廂記)』라는 제목으로 새로운 버전의 『서상기』를 출간했고, 이 책에 실린 김성탄의 문장에 박지원(朴趾源) 등 많은 조선의 문인들이 경도된 것이다. 이들은 김성탄의 문장에서 영감을 얻어 새로운 문체를 시험했다. 한 한문학자는 조선 후기의 문단을 김성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고 했는데, 이러한 평가는 다소 과장된 면이 있지만 조선 후기 문단에 김성탄이 큰 영향을 끼친 것만은 사실이다. 특히, 패관소설체를 엄금하고 순정한 고문(古文)으로 돌아가자는 정조(正祖)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의 중심에 『서상기』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에서 『서상기』와, 여기에 평어를 쓴 김성탄이 조선후기 문단뿐 아니라 정치․사회에 끼친 영향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문체반정의 최초 희생자이자 최대 피해자이기도 했던 이옥(李鈺)은 『서상기』를 애독하고 모방작인 『동상기(東廂記)』(1791년 추정)를 지은 인물이다.
『서상기』는 조선에서 한문 희곡이 창작되는 데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의 한문 희곡은 『동상기(東廂記)』, 『백상루기(百祥樓記)』, 『북상기(北廂記)』 등 세 작품뿐인데, 이들 작품은 모두 『서상기』의 영향을 받아 창작된 것이다. 또, 『광한루기(廣寒樓記)』, 『한당유사(漢唐遺事)』, 『절화기담(折花奇談)』 등 평점본(評點本) 소설(작품 곳곳에 짤막한 비평을 첨가한 소설)에서도 『서상기』의 영향이 탐지된다.
이후 20세기 초부터 1940년대까지 『서상기』는 국내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회자되었다. 박은식(朴殷植, 1859~1923)이 번역소설 『서사건국지(瑞士建國誌)』(1907)의 서문에서 “중국으로부터 온 소설(自支那而來者)”의 예를 들면서 『서상기』를 가장 먼저 언급한 점, 우당(于堂) 서재덕(徐載德)이 <동아일보> 1920년 4월 26일 지면에 ‘동아일보창간(東亞日報創刊)을 축(祝)함’이라는 글을 실으면서 곳곳에 『서상기』의 구절을 활용한 점, 양주동(1903~1977)이 1927년 <동아일보>에 ‘중국소설(中國小說)의 기교(技巧)’를 연재하면서 『서상기』를 분석하고, 여기에 수록된 김성탄의 문장 기교를 소개했으며, 1939년 잡지 『문장(文章)』에 『서상기』에 수록된 「불역쾌재(不亦快哉)」를 소개하고, 1974년 『수필문학』에 특집으로 ‘김성탄 명문선(金聖嘆 名文選)’이라는 제목 하에 김성탄의 「서상기서(西廂記序)」, 「불역쾌재」를 번역한 것, 1949년 국어 학자 하정(荷汀) 이강로(李江魯, 1918~2012)가 한글 번안 작품『현역서상기(現譯西廂記)』를 창작했다는 점 등이 근거가 될 수 있다.
사진 5. 이강로의 『현역서상기(現譯西廂記)』
이밖에 1906년 박문사(博文社)에서 간행한 『주해(선한쌍문)서상기(註解(鮮漢雙文)西廂記)』가 조선에서 간행된 최초의 연활자본 국문소설이라고 여겨지는 『옥중화(獄中花)』(1912년)보다 6년이 앞섰다는 점, 회동서관(匯東書館)에서 출간한 『서상기』 한글 번역본인 『서상기전(西廂記全)』이 1930년 제4판을 출간한 점 등도 20세기 초엽 국내에서 『서상기』가 누렸던 인기를 방증한다.
이처럼 조선 문단을 뒤흔들었던 『서상기』지만, 지금은 『서상기』를 아는 한국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급격한 현대화를 거치면서 전통 문화와 단절된 것이 하나의 원인일 것이다. 그 옛날 『서상기』를 읽으며 전율을 느꼈을 선조들의 감성을 믿고 번역본을 일독하는 건 어떨까?
【 누워서 읽는 중국 고전 3】
윤지양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徐小蛮․王福康, 『中國古代揷圖史』, 上海古籍出版社, 2008, 176쪽.
사진 2. https://bkimg.cdn.bcebos.com/pic/810a19d8bc3eb135c5a137a8a51ea8d3fd1f44bb?x-b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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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건국대 도서관 소장본
사진 4. 서울대 도서관 소장본
사진 5. 미국 워싱턴주립대 도서관 소장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