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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7월호
산파개혁을 통해본 중국혁명, 그리고 국가와 향촌권력 3 _ 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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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향인민병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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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처음 필자가 촌민들의 출산관행과 그 역사적 기원들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했을 때, 촌락의 출산관행은 하나의 전환점을 겪고 있었다. 중국 정부는 2000년을 기점으로 한국의 읍단위에 해당하는 향(鄕)이나 진(鎭)의 위생원(衛生院)에서 일률적으로 임산부 관리부터 출산까지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향/진의 병원에서는 최소 2년간의 전문교육을 마친 산부인과 의사들이 출산을 전담하게 되었다. 필자가 방문한 산서와 하북성의 향진 단위의 병원들은 나름대로 현대적인 초음파 검사와 마취제를 이용해 별 고통 없이 산모들의 출산을 돕고 있었다. 촌민들도 산모와 아이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명분에 대부분 동의했다. 더욱이 산아제한 정책의 영향으로 임신의 기회가 줄어듦에 따라 그 소중한 기회를 잘 관리하려는 젊은 임산부들은 출산에 관련한 많은 결정들을 부모들의 동의 없이 스스로 내리고 있었다. 굳이 정부의 시책이 아니더라도 그들은 자연스럽게 촌의 산파나 초보적인 훈련만을 받은 촌락의 의사들보다 더 전문적인 향진이나 현의 병원을 찾아갔다. 어떤 의미에서 2000년을 계기로 출산은 전문 의료인이 담당하는 의료의 영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전에는 출산은 생존과 함께 어떤 의미에서 다분히 정치적인 영역이었다. 2000년까지 마을의 출산을 담당했던 촌락단위의 의사나 산파들은 전문적인 의료교육보다는 바로 앞서 살펴본 두개의 원칙들, 즉 생존과 혁명이라는 담론에 떠밀려 ‘의료인’이 된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하면, 필자가 인터뷰한 하북성의 A, B 그리고 산서의 C촌의 산파인력들은 보통 두개의 전혀 상이한 배경을 통해 촌락의 의료인이 되었고, 그들이 ‘의료인’이 된 계기의 중심에는 195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중국의 중공업 집중과 농촌 집산화라는 중국공산당의 정책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즉, 1950년대 초반까지 여성해방이라는 명분하에 집중적으로 산파개혁에 예산을 배정해주던 공산당 지도부는 1952년부터 시작된 중공업 집중육성 정책에 따라 다른 부분에 대한 지원을 줄여버렸다. 나아가 농촌 마을에 대해서는 집산화를 통해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스스로 생활수준을 높일 것을 강요하였다. 실제 산서성과 하북성의 경우를 보면 전체 예산에서 의료부분이 줄어드는 가운데 산파교육을 위한 예산은 1952년 이후 거의 사라져 버렸다. 

 

그림 2  전직 촌 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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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중단된 국가차원의 지원에 지방의 간부들과 촌민들은 두개의 상이한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첫 번째로 지방의 간부들은 산파들의 영웅적인 희생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정부의 예산 지원 없이도 여성해방을 위한다는 일념 하에 스스로 약초를 캐내거나 우물을 파서 산모들을 돌보는 산파들의 ‘미담’을 전파했고 영웅칭호를 남발했다. 대부분 촌민들은 이러한 영웅담에 냉소적으로 반응을 보였지만, 어린 여학생들은 정부의 선전을 믿으며 그들의 삶을 헌신하기로 마음먹기도 했다. 산서 C촌의 여학생은 일요일마다 향의 의사를 따라다니며 산파술을 익혀 나름대로 여성해방의 혁명을 수행해나갔고, 필자와 인터뷰할 때 자신이 얼마나 순진했었는지 수줍게 이야기해주었다. 그녀의 열성에 C촌의 주민들은 그녀를 정식으로 현의 의료학교에 보내기로 했고, 2년간의 교육을 촌의 비용으로 감당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시 C촌의 돌아와 1990년대까지 마을의 담당 의료인으로 봉사하였다. 이러한 사례는 하북의 A촌에서도 발견된다. 다만 A촌의 경우 마을의 여학생들이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계급혁명을 한답시고, 문화대혁명기에 촌의 지도자들과 어른들을 공격하는 바람에 그 이후에는 촌을 떠나게 되었다.

 

그림 3  전직 촌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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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보다 보편적인 촌민들의 반응은 그냥 혁명기 이전처럼 ‘똑똑하고(脑子好), 수완이 좋고 (能干), 대범 (胆子大)’ 한 여성에게 출산을 맡기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례는 하북의 B촌과 산서의 C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었다. 즉 촌의 지도자들은 정부의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도 아이들은 계속 태어났고, 이를 출산 경험이 있으면서 마을 여자들 사이에 존경받는 부녀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촌의 남성 지도자들은 그녀들에게 농한기에 현의 병원에 가서 기초교육을 받도록 해주고 무엇보다도 촌의 공동기금으로 자전거를 한대씩 사 주었다. 이러한 지원은 지난 혁명기에 산파개혁에 부여한 정부의 적극적인 홍보와 정치적 선전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었다. 흥미롭게도 마을 부녀사이에서 존경받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정부에 의해 공인된 ‘혁명영웅’으로 떠받들어지는 이 산파들은 부락에서 곧 정치적으로도부상하게 되었다. 실제 하북성 B촌의 경우, 이러한 배경 하에 산파가 된 마을 부녀가 촌의 부녀회장이 되었고, 2000년대에 이르러 촌의 촌장으로 선출되었다. 촌민들은 그녀가 원래부터 똑똑했고 촌민들의 애들을 다 받아주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도자로 부상하였다고 진술했다. 나아가 B촌의 다른 산파는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에 감동받은 촌민들의 추천에 따라 모택동 사망 때 촌민을 대표해서 현의 추모대회에 모택동의 사진을 운반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즉, 촌민의 눈에 모택동이 그렇게도 강조하던 ‘인민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 (爲人民服務)’를 실제로 수행한 사람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저녁이나 새벽이나 애가 태어나면 자전거를 타고 달려와 돌봐주던 그 마을의 산파였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30년이 지난 이야기를 너무나 자랑스럽게 필자에게 해주었고, 그 이야기를 들어준 필자에게 꼭 점심을 먹고 가야 한다고 강권하였다. 심지어는 자신의 딸을 불러 요리를 시키며 전에 쓰던 의료기구를 들고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까지 하였다.

 

아이러니하게도 필자가 2000년대 초반 이와 같이 출산의 ‘정치적인’ 맥락을 풍성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들이 그 ‘혁명영웅’으로서의 영광을 더 많이 교육받고 더 전문적인 시설에서 일하는 젊은 의사들에게 빼앗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대로 출산은 이제 촌단위에서는 거의 행해지지 않는다. 이제는 촌민들은 그들의 아이를 받아준 마을의 특정 아주머니에 대해 마음의 부담도 고마움도 느끼지 않으며, 혁명의 아우라도 그들을 휘감지 않는다. 가끔씩 혈압을 재거나 링거를 맞으러 오는 사람은 있지만 단순히 향/진까지 나갈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찾을 뿐이다. 시장경제와 전문성의 힘 앞에 그 영광을 잃어버린 부락의 ‘의료인’은 외국에서 찾아온 연구자에게 그래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자신들의 지난 과거를 이야기해 주었던 것이다.

 

동시에, 마을 산파들의 몰락은 출산을 둘러싼 부락 내 여성들 간, 그리고 그들과 국가와의 권력관계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했다. 젊은 산모들은 이제 촌락 밖의 국가에 의해 관리되는 향진 위생원에 의탁했다. 이는 시부모나 부락 내 나이든 여성들의 젊은 산모들에 대한 권력의 쇠락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전에는 부락 내 혁명정신에 공감하는 젊은 여학생이나 존경받는 여성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던 촌락 내의 출산 관행을 국가가 직접 통제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반세기 중국 농촌 출산관행의 변화는 중국 국가가 어떻게 점진적으로 촌락 내 젊은 산모들에게 직접 접근하는지, 그 과정에서 나이든 시어머니나 기존 세대를 국가의 목표를 위해 어떻게 동원 혹은 배제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곧 혁명기 이후 젊은 며느리/산모들이 출산의 과정에서 나이든 세대의 간섭과 통제를 점차 벗어나는, 촌락과 가정 내 세대 간의 관계 변화를 보여주는 극명한 지표이기도 하다.

 

【華北 농촌 관행 조사 6】

 

안병일 _ Saginaw Valley State University

 

                                       


참고문헌
Ahn, Buyngil. “Modernization, Revolution, and Midwifery Reforms in Twentieth-century China.” PhD diss., University of California, Los Angeles, 2011.

 

 

* 이 글에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촬영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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