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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7월호
웨이하이 이미지와 영국의 식민지배 _ 손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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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도시는 어디든 그 도시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역사를 느낄 수 있어 좋다. 수도 베이징에 가면 천안문 광장과 천단(天壇)을 보면서 권력자의 권위와 위엄에 압도되고, 상하이에 가면 고층 빌딩 숲에서 최첨단 도시로서의 개방성과 자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다. 많은 중국 도시 중 최근에 부쩍 한국인들의 시야에 들어오는 한 도시가 있다. 바로 한중 FTA 지방경제협력 중국측 시범도시로 선정된 웨이하이이다. 


웨이하이는 산동성의 끝자락에 위치하여 인천에서 비행기로 1시간 남짓이면 당도하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중국이다. 웨이하이 사람들은 "한국에서 닭이 울면 웨이하이까지 들린다"는 다소 과장된 농담을 건네면서 한국과의 친밀도를 강조하곤 한다. 한국에서도 웨이하이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지만 웨이하이에 대한 정보는 한정되어 있다. 기껏해야 웨이하이 여행객들의 여행 후기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웨이하이에 대한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인 듯하다. 


웨이하이(威海)는 한나라 초기에는 석락촌(石落村) 혹은 낙감촌(落柑村), 원나라 때는 청천천(清泉夼)이라 불렸던 조용하고 작은 어촌이었다. 그러다 웨이하이가 역사의 무대에 그 이름을 올리기 시작했던 것은 명나라 때 왜구의 침략을 방어할 목적으로 웨이하이웨이(威海衛)를 설치하면서 부터였다. 즉 ‘동해에서 위세를 떨친다(威震东海)’는 말에서 웨이하이가 유래했다. 웨이(衛)라는 것은 위소(衛所)를 말하는데 명나라 때 군사지역에 설치했던 군사기구이다. 웨이하이웨이 설치를 계기로 웨이하이는 줄곧 군사적인 도시로 주목받았다. 특히 웨이하이의 류공다오(劉公島)는 양무운동시기에 건립된 청조 북양해군의 근거지로, 북양함대 사령부가 있던 곳이다. 청일전쟁 때 일본에 참패하여 무기력한 청조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곳이기도 하다. 그 뼈아픈 역사의 현장에는 갑오전쟁박물관이 건립되어 현재 중국 청소년들의 애국교육의 산실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 1  중국갑오전쟁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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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후 웨이하이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영국의 조계지가 되어 32년간 식민지배를 받았다. 러시아가 뤼순•다롄을 조차했으니 이를 방어하기 위해 웨이하이를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은 중국의 계속된 반환요구에도1) 꿈쩍 하지 않았고, 러일전쟁에서 패한 러시아가 뤼순•다롄에서 물러난 후에도 웨이하이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식민점령 자체가 가지고 있는 비이성적인 폭력성은 웨이하이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렇듯 웨이하이는 군사기지, 굴욕의 전장, 식민지배로 점철된 암울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다만 식민사는 식민지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으로 접근하는 경향이 있지만, 영국의 웨이하이 식민통치에는 이 양자 이외의 다른 내용들이 보이고 있어 흥미롭다.
 

류공다오의 웨이하이역사박물관을 둘러보다 보면 재미있는 동상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웨이하이시 관광포스터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기도 하는 ‘골프 치는 청나라 소년’의 청동상이다. 영국 식민시기에 남겨진 한 장의 사진을 동상으로 재현해놓은 것이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을 법한 이 동상은 변발을 하고 청나라 귀족의 복장을 한 어린 소년이 골프공을 앞에 두고 티샷을 하는 모습이다. 골프는 서구적 근대를 상징하고 청나라 복장은 전통을 상징한다면, 이 청동상은 그 자체로 전통과 서구적 근대가 일체화된 모습이다. 영국 관원 혹은 청나라 고관들이나 즐겼을 법한 골프, 일찍이 식민시기 영국인들은 웨이하이를 군사적인 목적이외에 골프와 휴양도시로도 주목했던 것이다. 사실, 웨이하이는 수심이 얕고 바람이 많아서 해군기지로서의 입지는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깨끗하고 쾌적한 기후와 자연환경은 영국인들이 웨이하이를 계속해서 식민지배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식민지배의 저변에는 그것이 영국 관리에게든 청 귀족에게든 계급 갈등이 존재했을 터이고, 이 동상이 근대의 외피를 입고 있는 식민의 기억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행위의 주체가 아동이라는 점에서 그런 심각함보다는 오히려 경쾌함마저 느껴진다. 웨이하이시가 이 조영물을 골프와 휴양지로서의 도시상징화 작업에 활용하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식민의 우울함을 승화시키고 이를 어김없이 관광산업과 결부시키고 있는 중국의 면모는 가히 대륙적인 호방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 2  골프치는 청나라 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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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하이는 도시 미관도 깨끗하고 잘 정돈되어 있으며 시민들의 의식이나 문화수준도 높은 ‘문명도시’임을 자랑한다. 한 도시의 발전과정에서 근대의 경험이 오늘날의 그 도시의 풍모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웨이하이가 다른 도시와 차별되는 독특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웨이하이는 지금의 세련된 도시 이미지와는 달리 전통사회는 상당히 보수적이고 종족의 영향력이 강한 사회였다. 웨이하이 전통사회는 마을의 원로인 촌동(村董)과 종족의 수장이 공동으로 통치하는 구조였다. 전통의 향촌사회에서 국가란 곧 지방관인 지현(知縣)이나 지사(知事)였고, 지방관이 지역민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지역엘리트인 신사(紳士)와 종족의 협조 없이는 어려웠다. 중앙의 관심에서부터 멀리 위치해있던 웨이하이에서 종족이 발달하고 신사의 협조를 통해 지역의 질서가 유지되었던 것은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었던 중국전통사회의 한 단면이었다. 1980년대 출판된 『위해시지(威海市志)』의 기록에 의하면 208개 촌장 중에 동성촌락이 34%가 되며 그 수가 70개가 넘는다고 한다.2) 동성 촌락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웨이하이 농촌에 종족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다는 방증이다.  
 

근대시기 동남 연해지역이 근대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지역이라면 웨이하이는 오랫동안 해군기지로 주목받았던 것 외에는 별다른 근대적 경험을 향유하지 못했던 편벽지였다. 게다가 바다를 터전으로 생활하다 보니 늘 폭풍, 안개, 암초 등과 같은 해양성 재해가 끊이지 않았던 곳이었다. 그래서 용왕, 마조(媽祖), 낭낭(娘娘) 등 해상 보호신앙이 발달되어 있었다. 또 웨이하이에는 신선할미가 살았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진시황이 두 번이나 불로초를 구하러 왔다가 태양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비로운 얘기들은 모두 천혜의 자연이 주는 청정함과 어우러져 미지의 세계와 같은 웨이하이의 또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진 3  웨이하이 해변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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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시기 웨이하이 향촌사람들의 교육정도는 높지 않았지만 문화적으로 산동은 유교의 발원지이기 때문에 공맹(孔孟)의 도를 잇는다는 자부심 또한 남달랐던 지역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순박하고 선량하며 보수적인 기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웨이하이를 1898년부터 통치하기 시작한 영국 식민당국은 현실적으로 영국식 제도나 행정체계를 웨이하이에 이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더욱이 파견된 영국 관원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영국 식민당국은 힘은 적게 들이고 최대한의 효율성을 끌어내는 것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중국사회 자체가 가지고 있는 자원을 활용하는 방법이 유효했다. 따라서 영국 식민당국의 기본정책은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고 중국인의 습속에 따른다’는 것이었다. 즉 전통조직을 이용하고 신사와 종족의 수장들에게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도록 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촌동제는 유지되었고 웨이하이의 지방 엘리트들은 향촌에서 운신할 수 있는 자율성의 폭이 커졌다. 자치를 통해 이들은 지역의 공공사업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영국 식민시기 동안 안정적인 질서는 유지되었고 영국 식민당국에 대한 저항감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영국은 최소한의 공력으로 웨이하이 엘리트들의 협조를 통해 촌민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시켰던 것이다. 영국이 웨이하이를 지배했던 32년 동안 중국 본토는 혁명과 전쟁 등 수많은 정치 군사적 파동으로 얼룩졌지만 웨이하이 농촌은 별로 영향을 받지 않았고 특별히 달라진 것도 없었다. 이러한 전통은 1930년 웨이하이가 남경국민정부에 귀속된 이후에도 기본적으로 유지되었다. 

 

이렇듯, 오랫동안 평온하고 청정의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던 웨이하이는 영국 식민정부에 의해 해군기지와 골프 휴양지로 개발되었다. 푸른 초원과 끝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해안선을 배경으로 웨이하이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 이미지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웨이하이는 더 이상 골프, 휴양지라는 이미지만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한중 FTA 지방경제협력 시범도시 선정을 계기로 한국과의 교류를 통해 한 걸음 더 크게 도약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웨이하이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가고 있는 중이다. 웨이하이의 성공적인 도약이 기대되는 이유이다.

 

【중국도시이야기 1】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 류공다오는 1940년까지 42년간 지배받았다. 중국의 웨이하이 조계지 반환교섭에 대해서는 [] Clarence B. Davis, 王瑞君 옮김, 英國人在威海衛: 帝國非理性之例硏究, 山東大學學報2005-4 참조.

2) 叢曉丹, 英租時期威海衛鄕村治理硏究, 南昌大學碩士論文, 2013, p.19.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필자가 촬영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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