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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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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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hee Yi and Seungsuk Song, ‘The Economic Activities of the Ethnic Chinese in Incheon in the mid-1930s: Findings from the DCAI Archives’, "Translocal Chinese: East Asian Perspectives(海外華人硏究)"10-2, 2016
이 논문은 2015년 출판된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를 중심으로』의 서론과 제4장을 영어로 번역하여 대만의 화교 전문 학술지인 (BRILL 출판)에 기고한 것이다.
이 논문은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DCAI) 가운데 근대시기의 문헌 및 사진의 소개와 이 자료를 활용하여 1930년대 중반 인천화교의 경제활동을 분석한 것이다. 이 논문의 전반부는 인천화교협회소장자료 가운데 근대시기에 해당되는 자료와 사진의 목록을 실었으며, 이들 자료가 조선화교 연구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특히 1935년 인천화상상회화교상황보고 자료가 1930년대 중반의 인천 화상의 경제 분석에 매우 귀중한 사료라는 것을 분석했다.
이 논문의 후반부는 1930년대 중반 인천화교의 경제를 화상의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분석했다. 인천 화상(華商)의 경제는 1920년대 전성기를 맞은 이후, 1930년대 들어 1931년 7월 발생한 제2차 배화사건과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불경기와 중국산 수입품에 대한 고관세 부과 및 일본산 대체품으로 인한 수입 감소로 인해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국면에 있었다. 여기에다 조선총독부가 1934년 9월부터 실시한 중국인 입국 제한 조치와 화교의 국내 이동을 제약하는 조치 등으로 인천화교 인구가 거의 증가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인천화교 사회단체의 활동은 이전에 비해 많이 위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 화상은 여전히 포목상, 해산물 수출무역, 잡화 수입상 부문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또한 인천 화상은 조선은행, 조선식산은행, 야스다은행, 주하치은행, 조선상업은행의 인천지점과 금융거래를 했으며, 신용이 좋았기 때문에 자유롭게 대출을 받았다. 인천에는 중국 전통의 금융기관인 전장이 존재했다. 1928년 말에는 총 8개소의 전장이 있었고 이들 전장의 본점은 상하이, 다롄, 옌타이에 있었다. 전장의 주요한 업무는 환전과 중국으로의 송금이었다. 1930년대 중반 인천의 전장은 이전 8개소에서 3개소로 감소했다. 상하이 본점의 전장은 사라졌으며 옌타이 본점 2개소, 다롄 본점 1개소였다. 전장이 인천에 존재했다는 것은 이번에 처음으로 밝혀졌다.
인천 화상의 1935년 부동산 소유 실태를 보면 총 1만6,295.5평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전체의 6할은 현재의 인천차이나타운의 부동산이었다. 이들 부동산의 시가는 84만5,400원이며 인천차이나타운 부동산의 시가는 52만9,400원이었다. 부동산 현황을 각 방(幇)별로 살펴보면 산동성 중심의 北幇이 54%, 절강성과 강소성 중심의 南幇이 25%, 광동성 출신의 廣幇이 21%를 차지했다. 남방과 광방이 전체 인천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3.5%와 1.2%에 불과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부동산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이것은 남방의 王成鴻, 광방의 同順泰가 많은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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