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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1월호
광동 주강 델타의 사전(沙田)과 그 관행들 _ 유장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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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19세기 전반기에 광동지방에서 활동했던 천지회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개념어는 물론 천지회라는 민간결사였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낳은 사회구조에 더 관심이 많았다. 예를 들면 토지소유관계, 혈연관계, 사회관계, 종교, 갈등의 상존과 그것의 해결 방식, 공권력의 존재 양태, 종족의 구조와 같은 인간 집단의 사회적 존재와 그 성격이 궁금하였던 탓이다. 사람이 사는 어느 곳이든 이러한 양상들이 존재한다고 생각되지만, 나의 관심은 말하자면 변방의 특성이나 혹은 사회적 관행이라는 것이 중국에서도 광동이라는 변방에서 좀 더 특이한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이는 내가 살고 있던 마산과 같은 남부 지방의 특징과 어떠한 공통점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도 연결되었다. 다시 말해 내 삶의 근거가 되는 지역의 사회적 구조를 이해하는 한 방식으로 중국의 광동을 연구한 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진 1  주강 하구의 완성된 사전


토지는 사람의 삶에서 필수 불가결한 존재이다. 그 유형은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광동의 광주 부근에서는 이른바 사전(沙田)이라는 특이한 형태의 토지가 존재하였다. 사전이란 말 그대로 모래톱을 이용하여 조성한 논이나 밭이다. 광주의 하구에는 광동의 동, 서, 북 세 곳에서 흘러든 강이 모여 주강을 구성하는데, 사전은 바로 이 주강 하구에 끊임없이 생성되어 왔다.


사전의 형성은 강을 따라 흘러온 모래가 계속 쌓이게 되면, 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논밭으로 만들기에 좋을 정도의 토지가 된다. 낙동강 삼각주에 만들어지는 모래톱과 그걸 논밭으로 조성하는 상황을 떠올려도 괜찮을 것이다. 문제는 이 사전을 만드는 절차나 권리가 법에 명시된 것과는 달리, 대부분 이곳에 뿌리를 둔 여러 종족집단이 소유한 무력이나 국가권력에의 접근도 따위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사실에 있다. 속된 말로 힘센 놈이 장땡이었던 사회적 관행이 국가의 법제도보다 우선하는 곳이었다.



사진 2  사전을 조성하는 모습


이러다 보니, 종족이나 마을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집단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었다. 이러한 형태의 갈등 중에서 실제 전투형식으로 나아간 것을 계투(械鬪)라고 불렀다. ‘계’란 무기를 의미하므로, 계투는 말 그대로 무기를 들고 집단끼리 싸우는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무기가 농기구나 칼, 창으로 그치지 않고 총포도 포함되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또한 싸움 규모 역시 작은 것은 수십 명에 상당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은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를 정도로 커서 관군이 개입해도 진압하기 어려웠다. 어느 한쪽에서 조금이라도 열세에 몰리겠다 싶으면 싸움에 능한 인력을 고용하여 계투의 최전선에 내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세기 중엽에 청조를 뒤흔들었던 태평천국의 발발 요인도 토착인인 본지(本地)와 이주민인 객가(客家) 사이에서 벌어진 계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광동의 중심부에서 벌어진 계투 관행을 해결하기 위해 청조 정부는 해당 지역의 신사층을 동원하여 화해토록 조정하든가 아니면 군대를 동원하기도 했다. 하지만, 객가인들을 위해 행정구역을 새로 신설하여 양측 사이의 갈등을 마무리한 적도 있었다. 오늘날 대산시(臺山市)에 통합된 적계청(赤溪廳)이 그 산물이다. 그만큼 뿌리 깊고 해결하기 어려운 지역의 두통거리였다. 대략 지금부터 20여 년 전에도 호남성에 있는 공동체 사이에서 이권을 둘러싸고 계투가 벌어졌는데, 총검류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는 기관총에 수류탄까지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계투의 관행이 지역으로나 시기상 넓고 길게 이어져 왔던 것이다.


광동지역에서도 계투가 치열하였던 사전 지역은 광동 기행 당시 꼭 가보고 싶던 곳이었다. 여행 일정에는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직접 걸어가면서 탐방할 수는 없었지만, 광주시 일대를 헤매다 보면 우연히 마주치게 될 가능성도 있을 터였다.


마침, 광주부에서 양계초의 고향인 신회현(新會縣)으로 가는 버스 속에서 그것을 보게 되었다. 신회는 광주 시내에서 서남부쪽으로 두어 시간을 달려 내려가면 만나게 되는 곳으로, 사실은 주강 하구의 연안을 따라 달리는 셈이었다. 어찌 보면 신회현 자체가 사전 덕분에 조성된 행정구역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곳에 펼쳐진 사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고 길었다. 또 모래톱이 드러난 강바닥 부근에서는 초보적인 형태로 사전을 만들고 있는 곳도 보였다. 청대의 각종 사료에 보이는 것처럼, 모래톱에 둑을 쌓고 물을 빼내는 현장을 보았던 것이다.


이곳에 심은 작물 중에서 제일 많이 눈에 띄는 것은 바나나였다. 그렇게나 넓은 바나나밭이 있다는 사실은 정말 경이로웠다. 또 파인애플밭도 눈에 띄었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작물들도 드넓은 논밭을 메우고 있었다. 주강 일대의 상품작물이 청대에 이미 성행하였으니, 우리가 보는 작물들도 품종만 바뀌었을 뿐 경작방식은 예전과 거의 대차가 없었을 것이다.


사진 3  사전지대에서 재배되는 바나나



사진 4  가까이에서 본 바나나꽃



주강 연안에서 유행한 농업관행 중의 하나는 상기어당(桑基漁塘)이다. 물이 많은  이곳의 특성을 활용한 농법으로, 적당한 넓이와 깊이로 연못을 파서 고기를 키우고, 연못 주위의 고랑이나 논밭에는 뽕나무를 심는 것이다. 또한 물고기가 배설한 똥을 뽕나무에 주기 때문에 물고기와 뽕나무에게 서로 이득이 되는 농법인 셈이다. 우리가 갔을 때에도 이러한 상기어당식 농법이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다.


사진 5  주강 하구의 경작방식인 상기어당



몇 시간 동안 넓은 사전과 그곳에서 재배되는 작물들을 보면서 사전이라는 개념을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사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각종 문제가 무엇인지, 또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정책과 방법들을 활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관찰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계투라는 형식의 갈등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인지를 가늠하기도 쉽지 않았다. 다만, 저렇게 넓은 사전이 있고 수많은 상업작물이 재배된다면 그만큼이나 많은 인력과 자본이 동원되어야 할 것이며, 생산 못지않게 국가의 정책이나 유통구조 등도 같이 얽혀 있어서 답사나 기행 형식으로는 전모를 파악하기가 불가능했다.   


좌우간, 저렇게 넓고 좋은 양질의 땅이라면 나도 욕심을 내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의 시장이나 백화점에 갔을 때, 광동 특산인 여지(荔枝)나 용안(龍眼) 뿐만 아니라 파인애플, 바나나 등 아열대 과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 대부분 이러한 환경에서 생산되는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땅이 넓고 자연이나 기후, 인문환경이 다른 만큼이나 그와 관련된 각종 생산관행이나 사회관행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장에서 마주친 관행 8】


유장근 _ 경남대학교 역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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