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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1월호
연구성과 소개 _ 손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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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승희, 「청‧민국시기 산서지역의 分家와 상속현실-分書를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 140집( 2017.9), 453-493쪽.
 

본고는 청‧민국시기 산서지역 분서(分書)의 내용 분석을 통해 민간에서 실제로 이루어졌던 분가와 상속 현실을 파악하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분가의 원칙인 형제균분이 어떻게 운영되고 적용되었는지, 민법 제정 후 분서의 내용에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형제균분의 관습은 당대(唐代)에 처음 법제화된 이후 각 왕조의 법률로 명문화 되었다. 이 원칙은 더 이상 민간의 관습이 아니라 오랜 민간의 관행을 흡수한 국가의 법률이었다. 각 가정에서는 이러한 원칙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위한 최소한의 조치가 마련되었는데 바로 품탑과 제비뽑기 그리고 친족 등의 동의였다. 따라서 형제균분은 기본적으로 준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각종 변용된 실례들이 존재했다. 이것이 농촌사회에서는 각 가정의 특수성을 반영한 것이라면, 상인 가정에서는 좀 더 불가피한 면이 존재했는데, 진상 가정에서는 상호(商號)를 분할하지 않고 한 사람에게 몰아주는 경향이 있었다. 이는 상인가정의 가산이 토지 이외에 상업 자본이었기 때문에 가산분할로 인한 자본의 분산을 막고 자본 축적에 유리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다만 이런 경우에도 표면적으로는 형제균분의 원칙이 준수되었으며, 형제균분 후에 한 사람에게 계승되는 과정에서 다른 형제들이 자신의 몫을 보태주거나 양여해주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렇듯 상호의 안정적 경영과 자본 축적을 위해 최대한 상호의 분할은 보류되지만, 형제 가정과의 화목을 위해 상호를 분할하여 분쟁의 여지를 차단하기도 했다. 


분서는 각 가정의 사정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해당 분가에서 특히 중요한 내용이 있다면 그 부분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즉 분서는 재산분할이라는 원래의 목적 이외에 토지매매, 재산 증명, 불균등 분할의 합리화 등 다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분서는 각 가정의 재산권을 증명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서가 합법성과 공정성을 확립하는 것은 필수였고, 분서의 역할은 재산분할로 인해 이후 분쟁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형제균분의 원칙에 변화가 발생하기 시작했던 것은 근대 민법의 제정과 시행 이후였다. 민법에서는 남녀평등에 의해 친녀의 상속이 인정되었고, 종조계승과 재산계승이 분리되어 사자(嗣子)의 재산계승이 더 이상 인정되지 않았다. 민법의 시행이 분서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검토한 결과, 그 내용이나 형식면에서 청대의 것이나 민국시기 후반의 것이나 명확한 차이를 발견할 수 없었다. 민법 시행 후 분가의 전통은 더 이상 국가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민간의 관습에 따라 지속되었던 것이다. 
 

형제균분의 분가 관습은 수천 년 동안 이어져왔고, 이는 근대에 와서도 그 본질이나 형태에 큰 변화 없이 민간에 남아 이들의 정신세계와 실제생활을 지배해왔다. 딸에 의해 소송이 제기될 경우에는 딸에 대한 균분이 인정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민간에서는 전통적인 방식대로 분가를 이어갔다. 민법 시행 이후 미세한 변화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분서에 자발적으로 명기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양상이 민국시기 뿐 아니라 당대(當代) 중국의 농촌 분가에서 여전히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휘주지역의 특징으로 알려져 왔던 형제균분, 혼수방식의 딸에 대한 재산분할, 상호를 분할하지 않는 상인 가정의 분가습관 등이 산서지역에서도 보편적으로 행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만 호절(戶絶)가정의 딸의 재산 승수 혹은 이성(異姓) 사자(嗣子)계승 등에서 지역적인 특징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향후의 과제로 남겨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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