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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1월호
한중수교 25주년, 한·북·중 네트워크는 살아날 수 있을까? _ 김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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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4일은 한중수교 25주년이다. 양적으로 볼 때 한중교류는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왔다. 그러나 오랜 ‘교제’에도 불구하고 상호불신이 커진 것도 사실이다. 굳이 ‘사드’를 탓할 것도 없다. 지난 4반세기 동안 경제적 이익에만 치중한 반면 사회적 협력 체제 구성에는 소홀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원인은 한중 양자관계보다 한·북·중 삼국관계에 있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부터 최근 북한의 ICBM 개발에 이르기까지, 한중관계에서 북한은 변수이기보다 상수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한중수교가 촉진된 계기도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이 주도한 한국·북한 밀월 관계에서 파생된 한·북·중 네트워크 때문이었다. 


1978년 중국 개혁개방 이후 1987년 러시아의 정치경제 자유화 선언 등이 이어졌고, 뒤이어 북한도 체제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도 급격히 민주화되어 노동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다. 문제는 한국의 ‘자본’ 측이었다. 특히 대기업들은 국내 임금상승에 따른 손실을 공산권 진출을 통해 보상받으려 했고, 이에 노태우 정권은 1987년 헝가리를 시작으로, 폴란드, 중국, 러시아 등 공산권 국가들과의 경제협력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노태우 정권과 대기업이 가장 눈독을 들였던 ‘황금 시장’은 북한이었다. 북한은 우리에게 언어 장벽이 없고 운송비도 적었으며 노동력도 저렴한 시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태우 정권은 대기업을 위한 ‘특별 서비스’를 따로 준비했다. 바로 한북 무역의 무관세화, 즉 북한산 물품을 국산으로 인정한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100원에 구입한 해산물, 농작물, 축산물을 한국에 들여와 1000원에 팔면 각종 비용을 제해도 최소 5∼7배 남길 수 있었다. 현대, 삼성, 럭키금성(LG), 대우 등 대기업들은 노태우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북한 진출 기회를 얻었다. 문제는 38선을 직접 오갈 수 없었기에 반드시 ‘중공’을 경유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노태우 정권은 1988년 7월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 공식 명칭을 중공에서 ‘중국’으로 변경하여 한중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고, 한북관계 또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 수 있었다. 


초기에는 현대가 북한 사업을 주도했지만, 고 정주영 회장의 대북사업 관련 언론 공개 수준이 위험 수위에 이르자 주도권은 대우 그룹에 쥐어졌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대우 그룹의 한북 무역은 거의 비공개되었다. 따라서 그 기록은 당시 실무자 인터뷰를 통해서만 찾아볼 수 있다. 당시 ㈜대우 부장이었던 K는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북한을 오가며 대북 사업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인물이다. 한국을 떠나기 전 안기부에서 교육을 받으며 “다녀와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시면 안 된다”는 경고를 들었던 시대였다. K는 입북을 위해 먼저 홍콩에 갔는데, 당시 홍콩에는 ㈜대우가 북한 무역을 위해 위장 설립한 제3국 법인이 있었다. 그 후 홍콩 법인이 베이징에 설립한 지사의 도움을 받기 위해 중국으로 갔으며, 베이징 공항에서 북한 대사관 사람을 만나 한국 여권을 맡기고 이름 한 글자가 변경된 북한 여권을 발급받았다. 이처럼 K는 ‘북한 사람 신분’으로 조선민항기에 올라 평양과 베이징을 오갔기에 그의 북한 무역은 공식 기록에 남지 않았다. 초기에 대우는 북한에 공산품들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자연 생산물을 받아 한국에 유통시켰다. 1990년대에 황금알을 낳는 한북 물물교환이 개시된 것이다. 이후 ㈜대우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북한에 장기 파견하여 공장을 지었다고도 한다. 
 

한북 밀월 관계가 중단된 것은 1990년대 말부터 심화된 북핵 문제 때문이었다. 1991년 경제인들의 북한 입국이 금지되었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한북 무역은 일정 기간 동안 더 지속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외상으로 상당액의 물건을 줬기 때문에 당연히 대가를 받아야만”했기 때문이다. 다만, 무역 공간은 평양에서 중국 베이징으로 이전되었다. K도 1991년 중국 베이징으로 발령받아 한북 무역을 계속 이끌었다. 이처럼 한국 대기업은 한북 교류를 목적으로 중국에 법인을 설립했지만 북핵으로 인한 교류 중단 이후 자연스럽게 중국 진출로 전환되었고, 이런 조건에서 1992년 한중수교도 촉진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제의 목적이 상호 이해와 협력 보다 ‘경제적 이익’에 있었기 때문에 한중간의 교제 기간이 길어질수록 불신의 벽만 더 높이 쌓였다.

 

현재 문재인 정부는 북한과의 새로운 교류를 위한 물꼬 트기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그 목적이 사회적 협력에 있을지 과거처럼 경제적 이익 추구에 있을지 아직은 모호하다. 그러나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이 실현될 경우, ‘자본’의 국내 손실을 국외에서라도 보상받을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하는데, 이 과정에서 북한은 ‘또 다시’ 가장 위협적인 국가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장으로 재부상할 수도 있다. 이전 정권 초기에 제시된 ‘통일 대박’ 역시 자본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최근 수많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전년도 중국 경제 성장률은 3.9%로 17년래 최고치에 달했다고 한다. 즉 언론들은 북한 ICBM 위협을 제기하면서도, 동시에 북한의 경제 발전 프레임을 만들고 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북한은 이미 일종의 ‘개혁개방’ 초입 단계에 들어섰다고 평가할 수 있고, 이에 한국 대기업들은 이미 북한 ‘재진출’을 위한 충분한 준비를 마쳤을 수도 있다.   
 

어쨌든 현재 한·북·중 네트워크 재생을 위한 기회의 장이 열리고 있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한미일 동맹을 공고화하면서도, 1950년 이후 끊어졌던 ‘대륙으로의 육로’를 잇기 위한 노력도 경주해야만 한다. 한중수교 이전에도 중국의 지원 속에 한북 교류를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한중수교 25주년의 가치를 한·북·중 네트워크 자산으로 접근해볼 수 있지 않을까. 우선 지난 25년의 한중 교제를 기반으로 삼아 북한을 그 교제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이익을 쫓기보다 한·북·중 네트워크를 만들고 ‘우리’라는 정체성을 구성하기 위한 사회적 협력을 강화한다면, 한반도 및 동북아 평화 실현도 그리 멀지 않을 것 같다.


김판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아주경제'와 인천대 중국학술원이 공동 기획한  『아주차이나』 [仁차이나 프리즘] 8월 3일에 게재된 것을 수정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news.china.com/news100/11038989/20170823/31165547_all.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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