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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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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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이 되면서, 당시까지 지배적이었던 역사인식에 균열이 발생하고, 기성 역사학에 대한 도전이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해방된 국민국가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유럽사적 체계 혹은 제국주의적 역사해석의 체계로부터 분리시켜 나가면서 시작되었는데, 그것은 ‘역사’라는 학문을 구성하고 체계화했던, 그래서 도전 없이 보편적 역사로 분식되었던 지배적 주류역사학의 위기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주류역사학의 위기가 어떤 의미에서는 인문학적 성찰과 관련 없이 진행되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우선은 신생독립국가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체계화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므로 제국주의적 학문체계를 그대로 자신들의 국민국가 역사로 수입해서 활용하거나, 민족적 전승 등을 충분한 학술적 검토 없이 교과서에 도입하여 절대화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이러한 민족사의 재구성 과정에서 우선 중요한 것은 치욕의 극복이었고 집권세력의 정통성 확보였다. 그래서 그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 역사를 식민화시켰고, 해방된 신생국들은 사실상 제국주의적 인문학으로 탈식민지화를 말하는 모순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실 속에서 역사학은, 그러한 식민지성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을 진전시킬 수 없었고, 절대화된 지식을 생산하는 ‘환상의 권력’이라는 지위에 만족하게 되었다. 그래서 특정 역사적 관점이 가진 맥락에 대한 성찰적 검증은 진행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신생국가 건설, 독립의 유지, 주체성의 체계화 등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가는 과정에서 역사학은 ‘복제된 제국주의의 핵심적 가치’를 내면화시키는 지식체계를 재생산해 내게 되었던 것이고, 결국 인문학적 성찰이 결여된 역사학은 정치 도구화의 길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역사가 과도하게 정치화되면서 역사학은 사회통합에 기여하기보다는 강한 자들-주류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활용되는 경우가 대세가 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인류의 보편적 가치보다는 특정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당파적 역사이해가 역사기억과 역사학의 실질적 내용이 되었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현상이라기보다는 이미 이전의 역사학과 역사기억의 전통을 주어를 바꾸는 방식으로 다시 체계화한 것이었다. 말하자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자리바꾸기식 역사해석이 역사기억을 지배하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인문학적 성찰을 통한 주체의 재구성은 역사학의 논의에서 사실상 자유로워지게 되었다.
다른 인문학도 마찬가지였으나 역사학은 특별히 사실에 관한 학문이라는 가상의 이미지 덕에 ‘객관적’이라는 명목으로 불확실한 사실을 확실한 진실로 분식하기 쉬웠다. 역사학자들은, 모든 사료를 다 볼 수는 없으므로 자신이 선택한 사료를 통해서 역사적 현실을 재구성하는데, 그 과정에서 자신의 당파성 혹은 아주 개인적 가치관이 개입하는 문제를 은폐하기 쉽고, 그것을 ‘객관’이라는 ‘신화’로 치장하기가 매우 쉬웠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역사학에서 “정확성은 의무이지 미덕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사료의 선택적 적용으로 구성된 가설적 체계를 학문권위라는 이름으로 절대화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분쟁은 그런 점에서 성찰 없는 역사학 혹은 역사기억이 도달할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해자들과 피해자로 구성된 이러한 논쟁체계는 상호토론을 통해 더 낳은 보편적 가치를 발견하고 그래서 공존과 화해의 세계로 동아시아를 재구성하기 보다는 대결과 갈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런 점에서 독일의 뮌헨 근처 다하우(Dachau)라는 도시에 만들어진 집단수용소 추모관(Dachau Concentration Camp Memorial)은 흥미로운 하나의 예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 집단수용소의 경우, 어쨌든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였던 폴란드인들이 가해자의 측면을 배제하고 피해자로서의 측면을 감성적으로 재구성하여 나치즘의 폭력성과 잔인성으로 폭로하는데 집중하고 있었다. 그래서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하는 측면이 있었다. 그에 비해 다하우 집단수용소 추모관은 가해자였던 독일인들이 자신의 잘못을 어떻게 성찰하는지 그리고 그 결과를 어떤 역사기억으로 유지하고자 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다른 성격의 장소라고 말할 수 있다.
다하우 집단수용소 추모관에서 토론하는 교사와 학생들, 관람객들 중에는 청소년들이 많았다.
우선 다하우의 경우, 과거의 국가사회주의의 폭력성을 그대로 간직한 집단 수용소를 추모관으로 재구성하여 치욕의 역사기억을 꼼꼼하게 점검한 뒤 사회교육 및 연구기구로 활용하는 방식이었는데, 이는 필자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물론 다하우 집단수용소를 국가사회주의 폭력에 대한 역사적 성찰의 결과물로 재탄생시키기까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 우익의 논리에 따르면 그것은 일종의 ‘자학사관’의 결과물로 해석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오늘 날도 이러한 수용소 추모관을 비판하는 독일 내부의 논리도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특히 다하우의 경우 그 도시가 위치한 바이에른 주의 보수적 정치성향에도 불구하고 자기 성찰적 추모관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은 역사학 혹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이 추모관은 1955년 이 수용소에서 고통을 받았던 사람들의 적극적 참여로 구성된 Comite International de Dachau의 추모시설 요구에서 시작되었고, Bayern주의 재정지원으로 1965년에 개장했다)
다하우 수용소의 전시방식에서 흥미로운 점은 국가폭력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파괴하는지를 구체적 자료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공산당원, 사회주의자, 범죄자, ‘반사회적’ 인사, 집시, 성적 소수자, 반체제 성직자, 반전운동가 그리고 유태인 등 수용소에 잡혀 온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의 사진/편지/신분증명서 등이 시기별로 정리되어 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이러한 전시방식은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름의 나치즘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생생하게 드러냄으로써 다시는 이러한 잘못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다하우 집단수용소 추모관의 존재의의는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다하우 수용소가 추모관으로 재구성되어 일반에게 공개되고, 그 수용소의 범죄성이 낱낱이 분석되는 이러한 역사인식은 독일 사회에 내재된 폭력성에 대한 심각한 성찰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독일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전기간 중 최초로 세워진 그래서 이후 집단수용소의 모델이 된, 다하우 집단수용소 입구에 씌여진 “Arbeit Macht Frei” 즉 일하면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 말은 이 수용소가 사실상 사회적 약자나 소수파, 반대파들의 노동력 수탈을 목적으로 세워졌음을 의미하는데, 이런 의미의 수용소가 독재국가들에서 광범위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구소련, 중국이나 북한 심지어 군부독재체제 하에서의 한국에서 만들어진 수많은 불법적 수용소들은 대부분 “노동교화”라는 목적을 밖으로 내어 걸었는데 이는 나치즘과 비교될 수 있지 않을까. 다하우 수용소의 역사기억을 정리하는 방식은, 국가폭력이 어떻게 초법적 권력을 행사하고 그를 통해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등을 포함하는 인권 등 보편적 인류가치를 억압해 왔는지를 자기성찰을 통해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동아시아 역사 연구가 이런 점에 대한 기본적 지향을 근본으로 하지 못한다면 역사분쟁을 넘어서서 미래의 희망을 찾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역사기억은 과거를 미화하는 쪽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과거를 성찰적으로 바라본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화되고 도구화된 역사가 특정 집단의 자의적 이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역사가 기본적으로 기반해야 할 인류적 가치를 발굴해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이 공유되고 논의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성찰적 역사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나치즘의 범죄를 통해 “범죄를 구성하는 역사적 맥락의 이해”에 도달하려는 다하우 집단수용소의 설명방식이 문득 우리의 역사교육 수준을 반추하게 했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4】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