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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2월호
우리에게 경계란 없다: 대만 여성 왕샹찬의 생애를 통해 본 반산(半山) _ 문경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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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대만의 문화연구에서는 뉴트로(newtro) 열풍을 타고 과거 대만의 대중문화에 대해 회고하는 자리가 종종 생긴다. 특히 대만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뉴웨이브 감독들 중 에드워드 양(楊德昌), 차이밍량(蔡明亮), 우리에게도 비정성시로 익숙한 허우샤오시엔(侯孝賢) 등을 소환한다. 그 중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영화들은 한국 내에서도 <비정성시>, <희몽인생>, <호남호녀> 등 대만 근현대사 3부작으로도 유명하며 대만 근현대사를 읽는 키워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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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영화 '쓰리타임즈'의 한 장면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2005년작 <쓰리타임즈(最好的時光)>는 대만근현대사를 세 시기로 구분한다. 이 영화의 중문 제목에서도 유추할 수 있듯 가장 중요했던 세 시기로 1911년 신해혁명의 대만, 1966년의 대만, 2005년의 대만을 두 남녀의 이야기로 엮어낸다. 그 중 1911년 타이베이 다다오청(大稻)을 배경으로 한 자유몽(自由夢)은 실존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바로 일생에 네 나라의 적()을 두었다고 알려진 왕샹찬(王香禪, 1886~?)이 그 주인공이다.


왕샹찬은 타이베이의 멍지아(艋舺)에서 1886년 태어났다. 당시 대만 섬은 청나라의 푸젠성에서 새로 대만성으로 승격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시기 대만에는 민며느리(童養媳)제도가 성행했기 때문에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는 어린 딸을 양녀 겸 며느리로 일찍 시집을 보냈다. 왕샹찬도 그 운명에서 벗어나지 않은 듯 보였다. 어릴 때 용산사 근처 기루의 양녀로 팔려간 그는 예단(藝旦) 교육을 받았다. 이후 그는 유명한 경극배우로 여러 지식인들을 만나며 한문(漢文)을 익히게 된다. 그리고 1909~1911년까지 <대만일일신보(台灣日日新報)>에 처첩제를 반대하는 글과 시를 연재할 만큼 글솜씨도 뛰어났다.   

 

1912년 왕샹찬은 이후 만주국의 관료가 되는 시에지에스(謝介石)와 결혼하며 중국 대륙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중국 대륙에는 청나라가 사라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진 시기였다. 왕샹찬은 청나라 사람이었다 다시 일본제국의 대만성 출신 신분으로 중화민국에 거주하게 된 것이었다. 이 시기 상하이에 머물던 시에지에스와 왕샹찬은 대만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지식인들, 중화민국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북경어를 익히게 된다. 그 지식인 중 한 명이 바로 허우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장천이 연기한 리엔헝(連橫)이다.


시에지에스, 리엔헝, 왕샹찬 등 당시 적지 않은 대만의 정치 문화계 인사들이 새로운 중화민국에 희망을 걸고 중국대륙을 찾았다. 대만에서 가까운 샤먼(廈門) 뿐 아니라 상하이(上海), 난징(南京), 베이징(北京) 등이 이들의 임시거주지가 되었다. 그런데 북경어를 잘 하지 못했던 이 사람들에게 중국 본토의 기억은 상당히 낯선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낯섬을 견디며 계속 중국 대륙에 남기도 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중국 본토에 적응하지 못하고 대만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돌아온 대만에서는 이 사람들을 대만 사람이지만 당산(唐山, 중국)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여 '반당산의 본성인'을 줄여 반산(半山仔)이라 불렀다.


왕샹찬은 이후 시에지에스를 따라 지린성으로 이주했다. 당시 지린성에는 일본군이 진출해 있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주국이 세워졌다. 왕샹찬의 글 내용은 점점 지린성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시에지에스는 일본어를 잘 하며, 중국에 오래 살았고 실정을 잘 안다는 이유로 만주국의 외교부장관이 되었다. 또한 만주국에 가면 고등교육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는 이유로 약 천여명의 대만 사람들이 만주국으로 몰려들었다. 왕샹찬은 이런 대만 사람들의 만주국 정착을 돕는 일을 하였다. 이 대만 사람들 중에는 대만에서 같은 성씨라는 이유로 결혼을 반대해 건너온 종리허(鍾理和)와 종타이메이(鍾台妹) 부부1)도 있었다.


이들의 만주국에서의 삶은 어땠을까? 최근 대만에서는 시에지에스 등 만주국의 대만사람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지만 왕샹찬의 삶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시에지에스의 후손 등을 통해 "할머니는 불교를 숭상하였고 채식을 하였으며 대만사람들의 만주국 정착을 도왔다"라는 것만 알려질 뿐 그의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제국의 항복 이후 많은 대만 사람들이 대만으로 향했지만, 왕샹찬은 국민당에 의해 일본의 앞잡이로 붙잡혀 대만으로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국공내전도 중국 대륙의 감옥에서 맞이해야 했으며, 1970년대쯤 베이징에서 사망했다고만 전해지고 있다. 청나라의 대만성에서 태어나 일본제국의 대만을 거쳐 중화민국의 국적자였다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후 중화인민공화국 사람으로 바뀐 그의 삶은 가히 근대의 산물이라고 할 만하다. 


왕샹찬은 돌아오지 못했지만 돌아온 반산들 중 일부는 중국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대만에 들어온 국민당 정부에 기용되었다. 국민당 정부는 이들을 대만과 중국 대륙을 모두 잘 이해하는 유능한 사람들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반산들이 이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한 일은 결코 용서받지 못할 일들이었다. 많은 대만의 엘리트들을 국민당 통치에 반대하는 인사들로 밀고했던 것이다. 이 이유로 일부 대만사람들은 반산과 그 가족들을 '기회주의자'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반산에 대한 일부 밝혀진 역사에 불과하다. 반산에는 중국대륙에서 장사를 했던 사람들, 만주국으로 이주했던 사람들, 사상적 이념을 따라 중국대륙으로 떠난 사람들 등으로 그 스펙트럼이 매우 다양하다. 또한 종리허 가족처럼 무사히 돌아온 사람들도 있고, 왕샹찬처럼 그 행적이 묘연해진 사람들도 있다. 이 글에서는 왕샹찬의 생애를 통해 단편적으로 소개했지만 향후 반산, 만주국의 대만사람들, 일본통치시기 대만의 신여성들 등에 대한 연구는 우리가 계속 주목해야 할 '대만'의 또다른 이야기이다.


아시아의 보물섬, 대만 7


문경연 _ 가톨릭대 사회학과 강사




(1) 종리허가 쓴 소설 원향인(, 1959)은 당시 이 부부의 중국에 대한 감상을 담고 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영화에서 직접 캡쳐한 사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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