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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2월호
숙명의 라이벌, 베이따(北大)와 칭화(淸華) _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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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타이완(臺灣)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작가인 리아오(李敖)는 칭화대학(淸華大學)을 찾아 당시 중국에서 유행하던 말로 강연을 시작했다. 


“따칭띠궈, 베이따황(大淸帝國, 北大荒).”1)


장내의 학생들은 폭소를 터뜨렸지만, 이 말이 꼬집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는 연사도, 청중도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중국사회에서 소위 실용적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이공계가 환영받는 반면, 인문학은 갈수록 위기에 몰리는 세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말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은 칭화가 중국 최고의 공대라면, 베이따는 중국의 인문학을 대표하는 대학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변화무쌍한 현실 속에서 근대 이후 최고의 인재를 배출해온 두 대학의 이러한 ‘분업’이 어떻게 발전해갈 것인지 하는 문제는 향후, 중국교육의 풍향계가 될 것이다. 


베이징(北京) 징산공원(景山公園) 동쪽에 가면 사탄(沙灘)이란 곳이 있다. 바로 이곳에 중국에선 처음으로 ‘대학’이란 간판을 내건 경사대학당(京師大學堂)이 문을 열었다. 1898년의 일이다.


경사대학당은 중화민국 원년인 1912년에 이름을 베이징대학(北京大學)으로 바꾸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로 그 베이징대학이다. 중국 최초의 국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베이징대학은 동시에 중국 최고의 교육행정기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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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홍로우


당시 중국에서는 가장 우수한 인재들의 집합소로 군림했던 베이징대학이지만 정작 세계사에 그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오사신문화운동을 전후한 1910년대 후반이었다. 1916년 새로 교장에 취임한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사상의 자유와 동서양 학문의 공존(思想自由, 兼容幷包)’이란 기치 아래, 대학행정에 대한 대대적인 혁신과 함께 수많은 대가들을 교수로 초빙했다. 오사신문화운동의 발원지라 할 수 있는 잡지 『신청년(新靑年)』의 창간인 천두슈(陳獨秀)를 문과대학장으로, 당대 최고의 사회주의 이론가 리다자오(李大釗)를 도서관장으로, 그리고 중국 경제학의 태두이자 인구학자로 유명한 마인추(馬寅初)를 교무부장으로 각각 모셔왔다. 그 유명한 후스(胡適)와 루쉰(魯迅)도 이즈음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요샛말로 하자면, 문과대 ‘드림팀’을 꾸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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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대학 시절 차이위안페이(좌)와 천두슈(우)               리다자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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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인추                             후스                                 루쉰


베이징대학의 엠블럼을 도안한 것도 루쉰이었다. 서로 등을 기대고 선 두 사람과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사람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루쉰의 엠블럼은 베이징대학의 학문적 전통이 인문정신에 근간하고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더(德, democracy) 선생’과 ‘사이(塞, science) 선생’을 통해 중국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선각자와 청년들이 모여든 베이징대학의 사탄홍루(沙灘紅樓)는 1919년 오사신문화운동의 진원지이자 요람이 되었고, 이들에게서 배운 베이징대학생들은 그 새로운 혁명의 핵심주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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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학 엠블럼


이 대학과 연을 맺은 인물 중에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가 또 있다. 바로 마오쩌둥(毛澤東)이다. 그는 1918년부터 베이징대학도서관의 사서로 근무하면서 중국의 새로운 운명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늘날 대학 정문〔西門〕에 내걸린 ‘北京大學’이란 현판을 마오쩌둥이 직접 쓴 것도 이러한 연과 무관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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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학 서문


지금의 베이징대학을 거닐다 보면, 어느 순간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인공호수 웨이밍호(未名湖)와 마주하게 된다. 중국 지성의 산실인 베이징대학에 있어서인지 아니면 ‘이름 없는 호수’라는 시정(詩情) 풍부한 명명 때문인지는 몰라도 웨이밍호는 한때 수난 받는 지성인의 고뇌를 상징하는 호수로 대표되기도 했다. 청말(淸末) 국학(國學)의 대가 왕궈웨이(王國維)와 문화대혁명시기 제자뻘 되는 젊은이들에게 굴욕적인 비난을 당한 작가 라오서(老舍)가 모두 이곳 웨이밍호에서 투신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탓이다. 물론, 왕궈웨이는 이허위안(頤和園)의 쿤밍호(昆明湖)에서, 라오서는 베이징사범대학 근처 타이핑호(太平湖)에서 각각 투신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세간의 이야기가 과연 단순한 오해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을까. 어쩌면 사람들은 청의 몰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보수 지식인과 베이징문화를 가장 생생하게 그려냈던 작가가 삶을 마감하고자 선택한 곳으로 자연스럽게 베이징대학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중국 지성사에서 베이징대학이 갖는 상징성이 이러한 낭만적인 역사를 그려낸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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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밍호와 보야탑(博雅塔)


오늘날 웨이밍호는 ‘지식의 샘물’이란 또 다른 별칭을 얻었다. 이 호수 주변을 산책하노라면, 호반에 길게 드리워진 버드나무를 그늘 삼아 사색과 독서를 즐기거나 노트북과 태블릿 PC에 꿈을 채워가는 미래의 학자, 기업가, 정치가를 만날 수 있다. 그뿐이랴! 밤이 되면 젊은 청춘들의 끊임없는 밀어의 속삭임이 연신 귀를 간질인다. 냉정과 열정이 교차하는 곳, 그곳이 바로 웨이밍호이다. 


바로 이들의 냉정과 열정 속에서 베이징대학은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베이징대학 동문(東門)을 나서면 ‘중국의 실리콘밸리’라 불리는 중관촌(中關村)이 이어진다. 


동문 맞은편의 고층빌딩은 중국 IT기업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팡정그룹(方正集團) 사옥이다. 1986년 베이징대학 교수 출신인 왕쉬안(王選)이 베이징대학의 투자를 받아 설립한 회사이다 보니 베이따팡정(北大方正)으로 불리기도 한다. 산학연 협력의 독특한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디지털시스템에 한자를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 한자조판시스템을 개발해 중국내 컴퓨터 보급의 길을 열어준 이 회사는 지금까지도 디지털출판업계 1위 자리를 당당히 지키고 있다.  


2013년 천커신(陳可辛) 감독의 영화 「아메리칸드림 인 차이나(中国合伙人)」는 개혁개방 시기,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려던 세 젊은이가 좌절을 겪고 난 후, 유학원 사업을 통해 성공을 거두는 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경영하는 ‘뉴드림어학원’은 단순한 허구가 아니라 실제모델이 존재한다. 중관촌에 자리 잡은 ‘신동팡교육그룹(新東方敎育集團)’이 그것이다. 베이징대학 서양어과를 졸업하고 모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위민홍(兪敏洪)이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유학이 좌절된 후, 역시 베이징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쉬샤오핑(徐小平), 대학 동창인 왕창(王强)과 함께 설립해 성장시킨 중국 최대 유학원이다. 미국 비자를 받으려는 학생들을 위한 영어교습으로 시작해 이제는 다양한 기초교육과 온라인교육, 출판, 문화 사업을 아우르는 교육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더 큰 세계와 더욱 다양한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발판이 되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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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과대 학과들이 모여 있던 캠퍼스


인문학적 사고를 현실과 접목하려는 베이징대학의 노력은 학교 안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 베이징대학은 일찍부터 기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학제개편을 통해 광화관리학원(光華管理學院), 정부관리학원(政府管理學院) 등을 설립하고, 학술이론을 현실에 적용하려는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 전 지구화 시대 세계질서 속에서의 중국의 경제 발전, 거버넌스 시스템 구축, 대외협력과 평화 등 당면한 문제를 직시하고 헤쳐가기 위한 연구와 도전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인문학적 강점을 학교 전체의 문화와 학풍으로 정착시키고, 그 토대 위에서 중국의 현실을 이해하고 이끌어갈 수 있는 인재를 육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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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학 캠퍼스. 오른쪽으로 도서관 지붕이 보인다.

 

베이징대학이 중국 인문과 사상의 심장이라면, 그 옆에 또 하나의 심장이 뛰고 있다. 베이징대학 동문을 나와 남쪽에 자리 잡은 중관촌을 등지고 북쪽으로 올라가다보면 독특한 모양의 문이 보인다. 바로 칭화대학 서문(西門)이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중국 최고의 명문대학 두 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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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대학 서문



칭화대학은 시진핑(習近平), 후진타오(胡錦濤), 주룽지(朱镕基) 등 전·현직 중국최고지도자들을 배출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대학 출신들이 중국의 정부요직을 두루 차지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혁명세대 정치지도자들이 은퇴하면서 중국은 본격적인 ‘테크노크라트’ 시대가 열렸다. 개혁개방의 설계자 덩샤오핑(鄧小平)이 ‘과학기술이 첫째가는 생산력이다(科學技術是第一生産力)’라고 했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공학을 전공한 정치가들이 대거 중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은 상하이교통대학(上海交通大學)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했고, 그 뒤를 이은 후진타오와 시진핑 모두 칭화대학 공대 출신이다. 중국의 테크노크라트 시대는 곧 가장 뛰어난 공학도를 배출해온 칭화대학의 시대였다. ‘기술인재의 요람’은 어느새 ‘고위관료의 요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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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학당


‘중국의 MIT’로 불릴 만큼 공대가 유명한 칭화대학이지만 본래는 문사철(文史哲)로 대표되는 중국국학의 요람이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것은 칭화대학의 탄생과 깊은 관련이 있다. 1900년 제국주의 연합군〔이른바, 8국 연합군〕과의 싸움에서 패한 청나라는 이듬해 체결된 신축조약(辛丑條約)에 따라 이들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그런데 미국은 1909년 베이징 칭화위안(淸華園)에 미국유학사무소라 할 수 있는 이예관(肄業館)을 설치하면서, 자신들이 받아야 할 배상금의 일부를 이곳의 기금으로 내놓았다. 중국청년들의 미국유학을 지원하는 이예관이 1911년 칭화학당(淸華學堂)이란 이름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칭화대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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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대학 엠블럼


이렇게 보면, 칭화대학의 설립은 베이징대학의 그것과는 결을 달리한다고 볼 수 있다. 엠블럼에서도 알 수 있듯, 칭화대학을 상징하는 색은 보라색인데, 중국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서구의 해양문화를 대표하는 파란색의 조화를 추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젊은이들을 해외로 보내 선진문물을 배우고 이를 통해 중국의 발전을 꾀하고자 했던 절박한 시대적 열망을 보라색에 담은 것이었다. 칭화대학의 교화(校花) 역시 보라색이 선명한 자형화(紫荊花)이다. 1912년 열 세 살 나이로 1912년 칭화대학 미국유학예비반에 입학한 시인 원이둬(聞一多)가 친구들과 함께 「자형의 혼(紫荊魂)」이라는 연극을 공연해 1등상을 받은 일이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보라색은 칭화대학 곳곳에 스며있는 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2013년 박근혜씨가 칭화대학을 방문했을 때도 보라색 상의를 입고 연설을 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제국주의 자본으로 세워진 대학이라는 혐의를 불식시키려는 노력이었던지, 칭화대학은 중국문명의 정수를 알리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1925년 만들어진 칭화대학 국학연구원(國學硏究院)이 그 대표적인 산실이었다. 초기 국학연구원은 량치차오(梁啓超), 왕궈웨이, 천인커(陳寅恪) 등 당대 중국 최고의 국학자들로 교수진을 구성했다. 특히, 량치차오가 1914년 ‘군자(君子)’를 주제로 한 강연에서 주역(周易)에 나오는 ‘君子以自强不息 君子以厚德载物’〔두터운 심덕을 가진 자만이 동량이 될 수 있고, 자강하는 자만이 영웅이 될 수 있다.〕라는 문구를 인용한 바 있는데, 이는 훗날 칭화대학의 교훈(校訓)이 되었다. ‘自强不息, 厚德载物’ 여덟 자는 지금도 엠블럼의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다.


칭화국학연구원은 설립 시기는 베이징대학보다 늦었지만, 그 명성과 영향력은 다른 대학에 비해 훨씬 깊었다. 왕궈웨이 같은 훌륭한 국학자의 명성에 힘입은 것도 있었지만, 학풍 자체가 중서문화의 융합에 기초해 중국문화를 치밀하게 고증하고, 중국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해 중국문화 연구에 있어 세계적인 시야를 갖는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칭화대학의 위상을 생각하면 조금은 낯선 역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칭화대학의 발전은 사실 스스로 선택한 길은 아니었다. 1949년 신중국이 건립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칭화대학은 ‘구조조정’을 겪어야 했다. 신속한 공업화를 이루고자 했던 신생국가는 구소련의 집중교육 모델을 받아들였다. 1952년, 문과대학과 법학대학, 이과대학이 다른 학교로 옮겨가고, 칭화대학은 공과대학으로서 새로운 사명을 부여받았다. 공업화를 위한 ‘붉은 기술인재’를 육성하는 일이었다. 이런 역사로 인해, 개혁개방이 시작된 1978년 이후 개별 학과가 산발적으로 설립되다가 1993년 인문사회과학대학이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신설’이라기보다는 ‘계승’, ‘회복’이라는 표현을 쓰며 이를 반겼다. 2009년 칭화대학 국학연구원이 다시 설립되었을 때, 저명한 역사학자 위잉스(余英時)는 “재난의 잿더미에서 고통을 딛고 새롭게 태어났다(從劫灰中浴火重生)”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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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대학 동문에서 바라본 본관


이제 칭화대학은 최고의 기술 위에 역사의 숨결과 인간의 온기를 더하려 하고 있다. 빠르게 발전해온 중국은 개혁개방 30년 만에 G2의 위치에 올라섰지만, 뒤돌아볼 새도 없이 앞으로 내달리는 동안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빈부격차, 지역불균형, 테러, 환경, 고령화 ……. 국가발전을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이다. 되돌아보면 칭화대학은 언제나 현실 속에 있었다. 베이징대학이 중국 사상과 지성의 도도한 흐름을 지켜왔다면, 칭화대학은 현실의 요구에 부응하며 국가발전의 최전선에 서있었던 것이다. 유학을 통해 선진문물을 들여오려 했던 노력, 공업인재 육성을 위한 학제통폐합, 그리고 오늘날 공학과 인문학의 융합에 이르기까지.


현재 칭화대학은 인문학과 사회과학에 많은 투자를 하며 외부와 활발한 교류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적인 학자들을 초빙해 강의와 연구를 지원하고 학생들이 인문학적 기초 위에서 이른바 융·복합적 사고를 배양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다. 이러한 인재들만이 인간을 위한 기술, 따뜻한 기술을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학문적 전통은 이미 칭화대학 곳곳에 스며있다.


칭화대학 캠퍼스는 베이징대학의 옌위안(燕園)과는 또 다른 정취가 깃들어있다.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2010년 3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학캠퍼스를 선정한 바 있는데, 아시아대학으로는 유일하게 칭화대학의 캠퍼스가 꼽혔을 정도로 매우 아름답다. 청대 황실의 원림에서 시작해 오늘날에 이르는 칭화대학 캠퍼스는 근현대 중국 건축의 역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칭화대학 학생들은 중국 황실의 건축물이 있는 곳을 후이취(灰區), 차가운 콘크리트로 지은 현대식 교사(校舍)가 즐비한 캠퍼스 동쪽을 ‘바이취(白區)’라 부른다. 그리고 따뜻한 느낌의 붉은 벽돌로 지어진 근대 건축물이 모여 있는 서쪽을 ‘홍취(紅區)’라 부른다. 공대로 유명하다보니 딱딱할 것만 같은 칭화대학이 그 이미지와 달리 미술과 건축 분야에서도 최고 수준을 자랑하고 있는 것도 이러한 환경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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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개교 100주년을 맞은 칭화대학 대강당


칭화의 옛 선배들이 한데 모여 고담준론을 펼치던 칭화학당과 웅장한 대강당은 찾는 이들의 발걸음을 멈춰 세운다. 대강당 내부에는 ‘인문일신(人文日新)’이 적힌 편액이 걸려 칭화의 인문전통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칭화를 상징하는 보라색 커튼이 드리워진 도서관 구관은 중국 현대극의 선구자 차오위(曺禺)가 ‘중국의 햄릿’이라고 불리는 대표작 『뇌우(雷雨)』를 완성한 곳이기도 하다. 작품을 완성한 1933년 당시 칭화대학에 재학 중이던 차오위는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며 창작에 몰두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당시 도서관 관리인이 서고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게 허락해준 덕분에 수많은 책을 탐독하며 작품을 구상할 수 있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차오위가 앉았던 이 도서관 열람실의 고풍스런 장탁자와 딱딱한 나무의자에서는 오늘도 수많은 칭화대학 학생들이 미래를 꿈꾸고 있다. 칭화의 전통이란 바로 이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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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화대학 도서관 구관과 열람실


흥미롭게도 각 나라마다 대학라이벌이 존재한다. 한국의 연세대와 고려대, 미국의 하버드대와 예일대, 영국의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 그리고 일본의 와세다대와 게이오대가 그렇다. 이들은 상호간의 학문적 차별성과 학풍의 차이를 두고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한다. 이들의 노력이 쌓이면서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지식이 두터워지고 이를 활용할 수 있는 싱크탱크가 만들어진다. 중국의 베이따와 칭화 역시 상호간의 경쟁과 협업 속에서 수도 베이징을, 아니 중국 전체를 미래로 이끌고 있다 하면 지나친 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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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베이징대학 개교100주년을 맞아 칭화대학에서 기증한 기념수.
두 대학의 변함없는 우정을 새겼다.



【중국도시이야기 12】

 

김남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 


1) 따칭띠궈는 청 제국, 베이따황은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의 지명이다. 베이따황은 지금은 개간사업을 통해 주요 곡물생산지가 되었지만, 과거 오랜 기간 황무지로 방치되었던 곳이다. 칭화대학을 가리키는 ()’과 베이징대학의 약칭인 베이따(北大)’가 들어간 단어를 이용, 최근 사회진출이 활발한 칭화대학을 제국, 상대적으로 약세를 보이는 베이징대학을 황무지에 빗대 풍자한 것이다.


참고문헌

張春樹, 「國史,國學與國家―淺釋民初淸華國學硏究院四位史家之思想與史學」, 『淸華大學學報』 2009年第2期(第24卷)
朱洪斌, 「淸華國學硏究院的存廢之爭及其現代啓示」, 『天津社會科學』 2014年第4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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