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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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끝날 무렵인 1953년 늦은 봄. 송가량(가명)씨는 청진시 송평구역 강덕리 화교농민 송세상(가명)씨와 그의 아내 왕안미(가명)씨의 4남으로 태어났다. 부친 송세상(1901년생, 산동성 일조현(日照縣)출신)은 1930년대 중반 산동에서 배편으로 진남포까지 넘어온 후, 각지를 이동하면서 품팔이를 하다 청진시 강덕리에서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북한에서는 1946년 봄 토지개혁이 실시되었다. 이 정책은 1947년 봄부터 1948년 봄까지 화교농민에게도 적용되었다. 송세상씨도 강덕리에서 농지를 분여 받아 자기 땅에서 야채농사를 시작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2년 4월부터 북한화교의 집단귀국이 시작됐다.
그러나 북한 동북지역에 위치한 강덕리의 화교는 휴전까지 농사일을 하면서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전쟁이 끝나자 북한에서는 1955년부터 화교농민도 본격적으로 북한의 협동조합에 참가하게 되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북한정부는 농촌지역 화교농민의 농지를 도시주변의 땅으로 교환하는 방침을 세웠다. 이에 따라 송세상씨 일가 역시 1956년쯤 화교농민이 집중된 청진 포항동으로 이주한 것이다.
1960년 4월 송가량씨는 청진화교학교(청진중국인중학교)소학부에 입학했다. 이 시기 북한화교학교에서는 중국어를 위주로 한 교육이 지속되고 있었다. 4살 때 모친을 잃은 송가량씨는 일가의 생활이 넉넉지 않아, 중국어, 산수, 조선어 등 여러 수업의 내용을 공책 1권에 합쳐 사용했다. 필기도구란 남들이 쓰다 남은 몽땅 연필 밖에 없었다.
다만 당시 북한정부는 화교학생에게 일당 700g의 식량을 특별배급했기 때문에 학교에 다니는 것은 집의 경제적 부담을 더는 측면도 있었다. 이 때 북한에서는 화교에 대한 북한국적 취득 열풍이 불었고, 뒤이어 화교학교에서 조선어교육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불안감을 느낀 화교의 집단귀국이 시작됐다. 송가량씨의 맏형 송가민(가명)씨도 이 시기에 귀국했다.
송가량씨가 소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학교의 교육방침이 바뀌면서 중국어와 식물 이외 수업은 모두 조선어로 진행되었다. 당시 송가량씨가 소속된 반의 학생수는 37명이었다. 1966년 중학부 진학시험에는 절반 이상인 20명이 불합격되는 일이 벌어졌다. 학교 측이 학생의 진학에 불리하도록 조치했기 때문이다.
1966년 북중관계가 소원해지자, 북한에서는 화교에 대한 인식이 악화되어 중국 국적을 회복하는 동시에 귀국신청을 요구하는 화교가 급증했다. 화교학교에서는 ‘모주석어록’ 학습반이 조직되었다. 중학교 1학년이 된 송가량씨도 학습반에 참가했다. 반원들은 청진시가 관할하는 ‘중국인민지원군묘’를 찾아, 모주석어록을 읽기도 했다. 화교학생의 운동이 점차 격화되고, 조선인 교원과의 대립이 날로 심해지자, 북한정부는 화교학생에 대한 특별식량배급을 조선인 부양가족과 같은 300g으로 재조정했다. 학교 내 분위기는 날로 험악해지고, 뒤이어 학교는 임시 휴교를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학교가 폐교되자 송가량씨는 부친이 일하던 협동농장에서 농사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농장에서는 15살의 소년을 받아주지 않아, 결국은 나이를 17살로 2살이나 올려서야 일을 할 수 있었다. 처음 송씨를 본 작업반장은 그가 농사일을 하기에는 너무나 애처로운 몸이어서 옥수수 밭에서 참새를 몰아내는 일을 하도록 지시했다. 송가량씨의 사회 첫 노동이 이렇게 시작됐다.
농사일을 시작한지 2년이 지난 1969년, 청진화교학교가 수업을 재개했다. 송가량씨는 곧바로 학교로 돌아갔다. 그러나 집안형편은 매우 좋지 않았다. 부친은 68세의 고령이었고, 맏형이 귀국한 뒤 둘째형이 병사했으며, 셋째형마저 사고로 다리를 절뚝거리게 되었다. 집에는 옥수수 빵도 양이 부족했다. 부친은 자식들에게 줄 음식을 남기기 위해 일부러 식탁에서 먼저 일어나기도 했다. 친구들은 학교를 졸업하면 농장이 아닌 공장에 갈 수 있다는 기대에 학습 열의가 충만해 있었지만, 송가량은 학교에 복학한지 2달 만에 다시 농장으로 돌아갔다.
송씨의 농사일은 새벽 3시부터 시작됐다. 그는 새벽마다 우선 농작물 재배에 필요한 인분을 운반했고, 아침 식사가 끝나면 3마리의 황소를 끌고 청암 산골로 들어가 풀을 먹였다. 협동농장 농장원의 수입은 노동 공수(工數)에 따라 금액이 계산되었다. 담당 노동공수평가위원이 매일 빠짐없이 기록했는데 급여는 가을철 결산 총회에서 현금으로 지급되었다.
결산총회 날은 모두가 명절 기분에 휩싸였고, 농장에서는 회식이 있었다. 그때 한 북한 농장원이 분조(分組)에서 연령이 제일 어린 송가량씨에게 돼지국밥을 한술 더 많이 담아준 것을 송씨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청장년 1명의 평균 연간 노동공수는 350공수 정도였는데 송가량씨는 700공수를 넘은 해도 있을 만큼 매우 성실히 일했던 것이다. 다만, 연간 결산에서 지급되는 수입액은 절반 이상이 의무적으로 저축되었다.
송가량의 분조에는 17명의 분조원이 있었는데, 화교가 반수를 차지했다. 농사일을 성실히 하는 송가량에 대한 농장원의 평가는 아주 좋았다. 그리고 1974년 겨울 송씨는 같은 분조의 화교 조선하(가명)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북한에서는 기혼 여성은 부양가족으로 생활이 보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씨도 결혼 후 가정주부로서 가사 일을 하는 동시에 돼지 2마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1970년 전후 북중관계가 개선되자 젊은 화교는 각종 기술전문학교에 우선적으로 다니게 되었다. 일을 열심히 했던 송씨는 자신의 뜻과 농장의 추천으로 1975년 말부터 청진 농업기능공학교에서 1년간 트랙터 운전기술을 배웠다. 그는 1976년 9월 기능공학교에서 모택동 사망 소식을 전해 듣고 청진화교학교에서 진행된 모택동 추도회에 참가했다. 졸업 후 송씨는 농장으로 돌아가 5년간 트랙터 운전수를 했다.
1979년 중국에서는 개혁개방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대해 북한에서는 중국이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고, 북한사람들이 화교들을 멀리하는 경향이 발생했다. 동 시기 중국정부는 해외 화교들의 귀국을 환영하는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많은 북한화교들이 귀국의 길을 선택했다. 그런데 귀국한 화교들의 중국 국내 배치는 그들이 북한에서 종사했던 직업을 참고로 했다. 즉, 북한에서 농사일을 했던 귀국 화교는 중국 농촌에서 농사일을, 공장에서 일을 했던 화교는 중국의 도시에서 공장 노동을 하도록 했던 것이다.
도시부 공장 취직을 원하는 화교농민들은 여러 방법으로 북한에서 공장 취업을 모색했다. 1980년 송가량 일가에 둘째아들이 태어났다. 이 때문에 송씨 일가는 귀국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중국에 돌아갔을 때의 배치문제와 아들, 딸에게 힘든 농사일을 시키지 않기 위하여, 같은 해 청암관계관리소에 취직했다. 즉, 농민에서 노동자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북한정부의 결정으로 청암관계관리소가 다른 회사와 합병되어, 직장이 집에서 무척 멀어졌다. 그 후 송씨는 자동차 면허증을 취득하여 1984년에 청진원림(原林)사업소로 직장을 옮겼다.
한편 중국에서 시장경제가 확립되면서, 1985년부터 신의주화교들이 북중간의 민간무역에 참가하였고, 청진화교들도 1980년대 말 친척방문이나 조국 관광의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 상품을 북한에 가져와 판매했다. 송가량씨가 처음으로 중국관광단에 참가한 것은 1991년 봄의 일이었다. 당시 그는 상품구매자금으로 현금 300달러와 해산물 등을 준비하였고, 중국에서 일용품, 의복 등을 수입했다. 이 후 송가량씨 일가는 점차적으로 북중 민간무역을 전문으로 하게 되었다.
1994년 김일성 사망이후 북한의 배급제도는 마비상태에 빠졌다. 송가량씨는 회사에서 받는 식량표가 실제 배급소에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을 이유로 사직서를 냈다. 그 후 송씨는 화교연합회에서 10년간 일했다. 현재 그는 귀국하여 연변에서 제2의 삶을 보내고 있다.
사진 1 평양화교연합회 사무실 사진(2016년 1월)
출처: 중국외교부 홈페이지(http://www.mfa.gov.cn/web/)
사진 2 청진시화교연합회 간부와 중국주조선대사관 대사
유홍재(劉洪才)씨와 기념사진(2011년 1월)
출처: 중국외교부 홈페이지(http://www.mfa.gov.cn/web/)
【북한화교와 한반도 15】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