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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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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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중 발음이 틀리거나 표준어 규정에 어긋나면 단어 한 개당 1위안씩 벌금. 앵커로 일했었던 한 중국인이 들려준 동북의 조그만 지방 방송국의 내부 규칙이다. 지금 중국의 위안화 가치로 따지면 뉴스 한 꼭지를 몽땅 사투리로 방송해도 그럭저럭 견딜 만하겠지만, 꽤 오래 전 경험담인 만큼 상당히 부담스런 액수였다고 한다. 방송에서 표준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지만, 중국에서 언어 통합은 항상 지난한 과제였다.
중국은 거대한 영토를 하나로 묶기 위한 언어 통합에 오래 전부터 분투해왔다. 멀리는 진시황 시기 '대전(大篆)'이라 불리던 한자 체계를 '소전(小篆)'으로 불리는 간략한 체계로 통일했다. 우리 역사에서 한자를 익힌 식자들이 중국인과 필담을 나누는 장면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을 만큼 글말의 통일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폭압적인 권력도 거대한 대륙의 입말을 통일하지는 못했다. 호환성이 높거나 정권이 지정한 통용 언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마저 왕조의 부침, 이민족의 침탈에 따른 외래어의 유입, 경제 중심지의 이동에 따라 동서남북을 번갈아 가며 수시로 변동되었다. 현대적인 통신 수단이 없었던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상황은 결코 개선될 수가 없었다. 중국 깊숙이 들어가 기독교를 전파하거나 무역을 하려던 서양인들은 베이징에서 임명한 다른 지역 출신 관료들이 지방의 사투리를 베이징의 황궁에서 쓰는 '관화(官話)'로 바꿔줄 통역사를 두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근대 국가가 수립되면서 표준어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1913년에 중화민국 정부가 독음통일회(讀音統一會)를 개최하여 한자의 발음을 통일하고 표준어를 제정하려고 했지만, 남방과 북방으로 나뉘어 서로 자신들의 언어를 표준어로 만들기 위해 다투면서 사실상 무산되고 말았다. 1918년 표준 발음인 국음(國音)이 제정되었지만, 베이징 발음을 위주로 한다는 원칙과 달리 중화민국 정부 실세들의 주요 출생지인 남쪽 저장성(浙江省) 발음이 주로 반영되었다는 강력한 반발이 다시 일었다. 1919년 5.4 운동 이후에는 복잡한 한자 대신에 차라리 알파벳 표기를 하자는 주장이 강력히 대두되었다. 이러한 논리로 발음이 복잡한 남쪽보다 비교적 간단한 북쪽의 베이징 발음에 대한 지지가 높아져 비로소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국음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동란의 역사 속에서 제대로 된 표준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야 탄생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도 어느 지방의 사투리를 표준어로 삼을 것이냐는 논쟁은 지속되었다. 1955년 표준어 제정을 논의하기 위한 '전국문자회의'에서 의견이 모아지지 않아 무려 15가지 주요 방언을 대상으로 투표를 진행한 결과 북경 관화가 52표로 51표를 얻은 서남 관화를 가까스로 따돌렸다고 한다. 이전의 남과 북의 대결 구도와 달리 마오쩌둥의 후난, 덩샤오핑의 쓰촨 등 영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서남 지역이 베이징과 거의 맞먹었다는 점에서 권력 구도가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무튼 같은 해에 베이징 발음을 표준음으로 한 '보통화(普通話)’가 제정되고, 뒤이어 한자를 간략한 간체자로 만드는 노력이 가속화되면서 드디어 중국어는 표준화되었다.
그러나 인민을 공산주의적 인간형으로 개조시킬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개인의 언어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는 없었다. 당장 마오부터 결코 자신의 후난 사투리를 바꾸지 않았다. 다음은 중국의 다큐멘터리에 방영된 내용이다. 마오쩌둥이 볼셰비키 혁명 40주년을 맞아 1957년 11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모스크바 대학 대강당에 마오쩌둥의 연설을 듣기 위해 중국 유학생들이 집결했다. 이역만리에서 고생하는 유학생들에게 마오는 "세계가 당신들의 것입니다(世界是你們的)"라며 치사를 아끼지 않았다. 학생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는데, 공산주의 체제에서 자신들의 소유가 무엇인지 고민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못 알아들은 거였다. 강력한 후난 사투리를 알아듣지 못한 학생들의 표정을 눈치 챈 마오는 손으로 공 모양을 만들고 영어로 'world'라고 외쳤다. 그제야 학생들이 알아듣고 환호했다. 마오쩌둥은 물론, 쓰촨 출신인 덩샤오핑의 사투리도 만만치 않아서 통역사들의 고통이 상당했다고 한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은 사투리가 아니라 한국어로 말을 했어도 문제가 없었겠지만, 왕조 시기 관화를 익혀야 했던 관리들처럼 공산당의 간부들은 의무적으로 보통화를 배우고 간체자를 써야 했다. 1982년부터는 전국적인 보통화 사용의 보급이 헌법에 명시되었으며, 2001년 「국가통용언어문자법」을 통해 국기기관의 공무, 언론, 출판 등에서 보통화와 간체자 사용이 법적 의무가 되었다.
하지만 언어는 놀랍도록 권력보다 힘이 세다. 여전히 농촌으로 가면, 중국인조차 농민들의 말을 반도 못 알아듣거나 때로는 보통화를 할 줄 아는 현지인이 말 그대로 통역을 해야 된다. 멀리 남쪽의 광둥 같은 곳뿐만 아니라 베이징 옆의 허베이조차 이런 지역이 있다. 또한 권력은 여전히 언어에 대한 선택권을 갖는다. 2009년 당시 국가주석인 후진타오가 유행하던 사투리인 '다핀(打拼)'을 쓴 적이 있다. '최선을 다하다'는 뜻이다. 시진핑도 2015년 2월 문화대혁명 시기 하방되어 토굴에서 생활했었던 샨시성의 량자허촌(梁家河村)을 방문했을 때, 부인 펑리위안을 소개하면서 현지 사투리를 사용했다. 아내라는 뜻의 '포이(婆姨)'였다. 아마 평범한 인민이었다면 벌금으로 1위안쯤 내야 됐을지도 모르지만, 언론들은 주석들의 사투리 사용을 공히 친서민 행보로 찬양했다. 이런 단어들은 지도자들이 사용한 공인화된 사투리로서 널리 활용되었다.
개혁·개방 이후 중국 고위 지도자들의 한 가지 특성은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세대보다 사투리를 덜 사용한다는 점이다. 보통화 교육을 받고 보통화로 송출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란 세대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들 세대가 고위직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보통화가 일종의 필수 교양이었다. 하지만 권력이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요인일 것이다. 촌스런 사투리를 쓰면서 권위를 유지할 만한 혁명가의 전설이나 위압적인 카리스마가 이들에게는 없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가끔씩은 억지로라도 사투리를 끼워 넣어 인민에게 다가가는 제스처를 취해야 한다.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의 정치권력이 다시 집중화되어 일인 독재로 나아갈 수도 있다는 예측들이 최근 쏟아지고 있다. 시진핑이 얼마나 사투리를 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진핑이 공식석상에서 사투리를 마음 놓고 쓰게 된다면 이런 예측이 맞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사투리를 쓰는 중국 지도자가 출현할지 지켜볼 일이다.
【신조어로 보는 중국문화 4】
조형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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