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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월호
시장의 시대, 마오 기억하기 _ 안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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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간 열한 번의 연재를 통해 지난 20세기에 평범한 중국 농촌촌락의 삶의 방식과 구성원들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해왔는가를 추적해보았다. 특히 데릴사위, 출산, 농민공이라는 소재를 통해 며느리, 아내, 딸로서 여성의 역할과 지위가 변해온 양상을 일견 거창한 분석틀인 생존, 혁명, 그리고 마켓이라는 구도로 살펴보았다. 마지막 연재가 될 이번 호에서는 시장의 힘이 그 어느 때 보다 강하게 중국 농촌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금, 중국의 나이든 세대가 어떻게 현재의 변화를 경험하고 과거의 혁명을 기억하며, 또 중국정부가 그러한 기억에 대응해 나가는지 살펴보면서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2005년부터 중국농촌을 현지 조사하면서 필자는 중국혁명 시기를 직접 겪었던 농민 장노년층이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얼마나 다양하게 소비하고 있는지 눈여겨보게 되었다. 즉 사진 1, 2, 3에서 볼 수 있듯이 마오쩌둥은 바로 토지개혁과 평등을 가지고 온 공산 혁명의 지도자가 아니라 재물신, 신선, 선녀, 관운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안녕과 번영의 상징으로 그들의 마음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매월 음력 1일과 15일마다 재신(財神)과 함께 마오쩌둥의 상에 과일과 술을 바치며 행운과 건강을 기원하는 이도 있었다.


사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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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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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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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러한 마오쩌둥의 이미지는 구체적인 인터뷰에서는 더욱 다양한 변주를 이루며 나타났다. 즉 많은 이들이 집단 농장시절과 문화대혁명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기억하면서도 마오쩌둥만큼은 긍정적으로 보는 가운데, 아예 마오쩌둥 집권 시기를 이상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분명 그 시기 배고팠고 일상에서의 자유도 그리 많지 않았다고 진술하면서도, 마오쩌둥 시기에 그들이 얼마나 열정적이었으며 아이들이 효심 깊었고 간부들도 청렴했는지 즐겁게 회상하였다.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며 그 시기를 그리워하고 마오쩌둥 시기의 재림을 기원하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 문화대혁명시기의 광기 가운데 균형을 잡아주었던 인물로 평가되는 저우언라이는 농민들의 관심에서는 아예 사라지거나 아니면 어정쩡한 기회주의자라며 적극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에게 마오쩌둥 시기는 배고팠지만 모든 것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던 시대였고 마오쩌둥은 그 모든 올바른 질서의 중심에 있었다.


마오쩌둥이 대약진 시기의 기근과 문화대혁명기의 혼란에 얼마나 큰 책임이 있는지를 배운 필자에게 그들의 이러한 모순된 기억은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이러한 기억이 어쩌면 현재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반영일지도 모른다고 느낀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물론 사진 4가 보여주는 것처럼 집집마다 1년 치 이상의 먹을 양식을 저장하고 있고, 정치 집회나 집단노동에서도 자유로워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불안이었다. 표면적으로는 부패한 간부와 중국의 정치 지도부에 대한 비판에서 이웃마을 누구누구의 성적 문란함까지 들먹이며 어떻게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한탄했지만, 그 불안감의 중심에는 가부장적 가정의 해체에 따른 노후에 대한 불확실성과 외로움이 깔려 있었다.


사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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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기 여성의 지위 변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필자 역시, Judith Stacey 가 그의 고전적인 연구인 Patriarchy and Socialist Revolution in China에서 지적하듯이 농민들이 중국혁명을 지지한 것은 공산당이 평등사회 구현을 약속해서가 아니라, 청말 민국시기 혼란기에 흔들리던 가부장제의 회복을 약속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즉 인구증가로 인한 토지 부족과 정치적 혼란으로 결혼도 아이를 키우는 것도 힘들어진 중국의 농민들에게 공산당의 토지개혁은, 그들이 다시 결혼해 가정을 일구고 부모를 봉양하고 아이를 낳아 키울 수 있는 물적 기반의 제공이었다. 한편, 2000년대 농촌에서 마오쩌둥의 이미지가 누리는 인기는 소위 개혁개방시기 시장의 힘에 의해 결국 이 가부장제도가 진정한 붕괴를 맞이하면서, 농민들이 그 가부장제의 잔영에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오버랩하며 매달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흔히 가부장제를 유교의 산물로 부정적으로 이해하기 쉽지만, 지난 2000년 이상 중국사회를 유지시켜 준 것은 농경사회에 질서를 부여한 가부장제였다. 즉 가부장제의 핵심 원칙은 젊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농사를 지어 가족을 부양하고, 그 농토에서 나오는 소출로 아들을 결혼시켜 며느리와 함께 새로운 세대를 생산하며, 나이가 들어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면 농토를 상속받은 아들의 가족으로부터 부양을 받는 데 있었다. 중국의 여인들이 아들을 낳기 위해 자신의 딸을 죽이기도 했던 것(female infanticide)은 바로 이러한 사이클을 지속하는 데에 그들의 여생이 달려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조가 바뀌고 공산주의 사회가 와도 중국이 농경사회로 남아있는 한 지속될 그런 사이클이었다.


그러나 지난 2000년간의 상식은 바로 1980년대 와서 중국의 공업화와 산아제한 정책에 의해 그 근간부터 흔들리게 되었고, 그렇게 아이를 하나만 낳은 세대가 노년기에 접어든 2000년대 후반부터 그 불안감은 중국 농촌을 감싸고 있었다. 겨우 하나나 둘밖에 없는 아이들이 자라 대학을 가거나 농민공이 되어 도시로 떠나면, 산서/하북 지역의 경우 대략 10(2000) 땅을 농사지으며 홀로 남겨졌다. 그리고 나이가 들어 농사가 힘에 부치면서 수수농사에서 힘이 적게 드는 옥수수 농사로 바꾸어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병치레라도 하게 되면 수익이 안 나는 옥수수 농사로는 도저히 병원비도 댈 수 없기에 그들의 불안감은 해를 넘어갈 때마다 가중되고 있었다.


비근한 예로 산서 A촌의 경우 촌의 경우 필자가 처음 방문한 2009년의 경우 60호 남짓한 가구 중 30대 이하 젊은 사람이 있는 경우는 한두 가구에 불과했다. 산지마을이라 기온이 평지보다 낮아 옥수수 농사밖에 지을 수 없기 때문에 마을의 젊은이들은 모두 농민공이 되어 도시로 가거나 데릴사위로 나가고, 딸들도 도시나 인근 읍내로 시집가 노인들만 덩그러니 마을에 남은 것이었다. 가구당 농지가 15무가 넘었지만, 그 땅을 모두 60대에서 70대가 넘은 농촌 노인들이 일구고 있었다. 물론 최근에 들어 휴대폰 덕에 자녀들의 소식은 빈번이 듣고 있었고 또 도시로 나가 성공한 자녀들을 자랑스러워 했지만, 더 이상 그들로부터 봉양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두렵게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난 2000년간 지속되고 공산혁명에도 공고했던 가부장제의 사이클이 시장의 힘에 의해 그 근저에서부터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 정부는 최근에 와서 이러한 농촌 노령인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필자가 2013년 다시 A촌을 방문했을 때 가시적인 변화를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은 매년 60세 이상 농촌 노령인구에게 주어지는 600위안의 보조금을 받고 행복해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 해 산서성 정부는 모든 농촌 가정마다 1톤의 석탄을 보조하였다. 그래서 60가구가 거주하는 농촌마을에 20톤 트럭 3대가 직접 마을 입구까지 와서 부려놓아, 사진 5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1톤씩의 석탄을 가져다 집집마다 저장해 놓았다.(1톤의 석탄은 한국의 연탄으로 환산할 경우 280장 정도가 된다고 한다. 중국 연탄은 한국 것 보다 작다). 통상 노부부가 사는 가정은 1년에 난방과 취사로 1.5톤의 석탄을 소비하지만 아껴 쓸 경우 1톤의 석탄으로 한 해를 날수 있다며 든든해 했다.


사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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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중국 정부는 대약진과 집산화시기 개간을 통해 밭으로 전환된 산지를 다시 산림지로 되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녹화사업이라는 그 원래의 목적 외에 노령인구를 지원하는 간접 효과도 있었다. 구체적으로, 농사를 포기하고 나무를 심을 경우 매년 1무 즉 200평당에 300위안의 현금을 지원해주는데, 노령화로 농사가 어려워진 농촌가계가 주로 혜택을 받고 있었다. 300위안은 현지 농민들이 옥수수 농사를 지을 경우 종자대, 비료, 수확 때 필요한 인건비를 제외한 순수익과 거의 맞먹는 금액이라 힘에 부쳐 옥수수 농사를 하는 노인들에게 적합한 금액이었다. 만약 노인 부부가 자신들만을 위한 식량을 생산한다면 1무로도 충분해서(1무에 450kg 정도 옥수수를 생산하고, 노인 한 사람이 보통 하루에 500gm 조금 못 미치게 소비한다) 나머지 10여무를 녹화사업에 지원할 경우 3000위안 정도의 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실제 사진 6에서 보듯이 필자가 여행하는 동안 기차길옆 많은 농지가 산림으로 다시 전환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사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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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중국 정부가 현재에도 산적한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고 대응하도록 기대하고 강요하는 것은 바로 마오쩌둥과 혁명에 대한 기억인 듯 하다. 가부장제의 물적 토대인 농업이 시장의 힘에 의해 위협받고 있는 현재, 늙은 농민들이 걸어 놓은 마오쩌둥의 사진은 중국 국가가 다시 그들의 생존을 책임지도록 묵묵히, 그러나 결코 무시할 수 없게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華北 농촌 관행 조사 12】

 

안병일 _ Saginaw Valley State University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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