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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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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호
‘문명결혼’과 ‘집단결혼’ _ 손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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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결혼집단결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얘기일 수밖에 없다. 모두 청말, 민국시기 일부 지역에서 유행했던 결혼의례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결혼에도 문명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반대인 야만결혼도 가능한 것인가. 그에 비하면 집단결혼은 보다 쉽게 합동결혼식을 연상시킨다. 그럼 도대체 이 양자가 어떤 관계란 말인가.

 

중국에서 민간의 혼인이 국가의 통제 시스템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것은 청말, 민국시기였다. 청말 서구의 근대법이 도입되면서 전통법을 개혁하고 민간의 관습을 수렴하고자 했던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서구의 근대 사상인 개인의 자유와 평등 이념은 혼인 결정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전통시기 혼인은 부모의 명(), 중매인의 말에 의해 성립된다는 말이 있었다. 이는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주혼인은 혼인 당사자의 부모가 되었고, 만일 혼인으로 분쟁이 발생하면 혼인 당사자가 아니라 주혼인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혼인 양가를 오가며 혼인과 관련된 모든 절차와 과정을 상의했던 중매인의 역할과 영향도 지대했다.

 

전통시기 혼인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결혼 당사자 집안의 가장의 서명이 들어간 혼서(婚書: 혼인계약서)가 필요했다. 혼서를 갖추지 않는다면 최소한 빙례(聘禮)를 행해야 했다. 빙례는 신랑집에서 신붓집으로 보내는 일종의 예물(금전)이다. 민간에서는 혼서보다는 빙례를 더 선호했기 때문에 빙례의 규모는 사회경제의 발달과 함께 날이 갈수록 커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송대에 이미 나타났고, 상품경제가 발달한 명청대 빙례의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빈한한 가정의 남성은 빙례를 구하지 못해 혼인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 혼인의 반대급부로 등장한 것이 바로 문명결혼이다. ‘문명결혼을 주장했던 사람들은 부모나 중매인에 의해 결정되고 빙례가 오가는 전통혼인 방식을 야만결혼으로 간주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반면, 정혼에서부터 혼인까지 어떤 금전도 요구하지 않는, 혼인 당사자의 자유의지에 의한 혼인을 문명결혼으로 규정했다.1)

 

문명결혼은 사실상 신식결혼 즉, 서구식 혼례를 의미했다. ‘문명결혼은 이미 청말 광서, 선통시기에 서양의 문물이 가장 먼저 당도했던 조계지나 동남 연해 항구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발견된 문명결혼에 대한 가장 빠른 기록은 1859년 전후로 알려져 있다.2)문명결혼은 예배당에서 서양인 목사의 주관으로 서구 혼례의 순서에 따라 진행되었다. 따라서 초기 문명결혼의 당사자들은 기독교를 믿는 중국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문명결혼에서 종교적인 색채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또 반드시 흰 드레스나 양복을 입었던 것은 아니었고 중국 전통복장이나 일상복 차림으로 행해지기도 했다. 다만 초기 문명결혼당사자들이 대개 신식학당 출신이거나 해외에서 유학을 한 경험이 있는 남녀 학생, 지식인들이 다수 포함되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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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전통복 차림으로 문명결혼을 하는 그림(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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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1913婦女時報에 실린 '문명결혼' 사진 

 

이러한 신식결혼을 문명결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분명했다. 전통혼인은 혼인의 불평등성이 심각하며, 혼인에서 돈이 오가는 방식은 매매혼이나 다름없고 혼인 당사자에게 혼인 결정권이 없었기 때문이다.3) 문명결혼은 결혼 당사자의 의사를 존중하는 결혼을 의미했다. 따라서 문명결혼은 서구사상이 민중에게 광범위하게 퍼진 오사운동시기를 지나면서 대도시를 중심으로 내지로까지 확산되었다. 당시 국민당 최고 권력자였던 장개석도 이 대열에 합류했다. 1927년 상해에서 거행된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식은 화려했고, 전세계인의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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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장개석과 송미령의 결혼식 장면(1927)


이러한 문명결혼1930년대에 오면서 자연스럽게 집단결혼과 결합된다. ‘문명결혼은 결혼의 형식을 바꾸어 놓긴 했지만 혼인비용을 줄이는 데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집단결혼은 남경국민정부에 의해 제창되었다. 남경국민정부는 전통혼인의 빙례가 민간의 허례허식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고 근검절약의 혼인을 적극 권장했다. 그 방법으로 채택된 것이 바로 집단결혼이었다. 그 형식은 문명결혼과 같이 서구식 혼례를 행하는 것이었다. 다만 한 쌍이 아니라 여러 쌍의 합동결혼식을 의미했다. ‘집단결혼문명결혼의 한 형태로서 제창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사상과 본질은 서로 달랐다. ‘문명결혼은 앞서 언급한대로 자유결혼, 매매결혼 반대 등 서구사상의 영향을 받은 결과였다. 반면 ‘집단결혼문명결혼과 그 형식은 같지만 정치적 목적에서 추진된 신생활운동의 일환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신생활운동은 장개석에 의해 1934년부터 추진된 국민 생활 개선운동이었다. 즉 신생활운동은 장개석과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 CC계 등 그 측근들에 의해 전개된 정치운동이었다. 이것은 공산당에 반대하고, 예의염치(禮義廉恥) 등 전통 유교 이념의 부활을 기치로 국민들의 실천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생활혁명, 사회개량운동으로 시작되었지만 차츰 문화운동, 정신혁명으로 확대되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할 수 있는 국민을 배양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 본질은 전통 유교사상의 회복이었고, 국민들을 군사화시키고 획일화시키는 것이었다. ‘집단혼인도 혼인을 통제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

 

따라서 집단결혼은 정부의 적극적인 선전으로 시작되었다. ‘집단결혼193543일 상해에서 처음 시행되었다.4)집단결혼을 희망하는 사람들은 20원(元)의 결혼비용을 내고 상해시 사회국에서 신청할 수 있었다. 전통혼인에서는 빙례만으로도 수백 원을 지출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저렴한 가격이었다. 예식은 시장이나 사회국장이 증혼인이 되어 혼인을 증명했으며, 한 번에 50쌍 내외의 부부가 탄생했다. 예식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신랑신부를 호명하면 한 쌍씩 무대에 오르고 가장 먼저 손문의 사진과 중화민국 국기, 국민당 당기에 세 번 국궁(鞠躬: 허리를 굽혀 절하는 것)을 한다는 것이다. 전통 혼례에서 가장이나 주혼인에게 하는 절 대신 국가와 국민당에게 예를 갖추는 것이었다. 이는 가장 감사해야 할 존재가 국가와 당이며, 혼인 당사자는 가족집단에서 탈피해서 국민의 일원으로서 국가와 당에 충성을 다짐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정부 주도의 이러한 형식은 다른 도시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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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상해시 제11차 집단결혼’ 장면(1937) 

무대 정면에는 손문의 사진이 있고 왼쪽에는 국민당 당기오른쪽에는 중화민국 국기(청천백일기)가 걸려있다.

 

이러한 집단결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당시의 많은 신문 잡지의 지면을 장식했던 집단결혼에 대한 뜨거웠던 찬반 논쟁은 이를 대변해준다. ‘집단결혼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이것이 신생활운동의 절약정신에 부합하고 당시의 혼인법 정신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했다.5) 상해시 사회국, 상해시 정부 혹은 각종 단체, 언론 등이 적극적으로 신생활운동의 집단결혼을 홍보했다. ‘집단결혼을 반대하는 입장에서는 신생활운동의 정치적인 목적을 간파하고 집단결혼은 정부가 혼인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더 나아가 정부가 혼인세를 걷기 위한 꼼수라고 혹평했다.6) 남경국민정부는 1930년부터 혼인을 할 때는 성() 정부에서 제작한 혼서를 구매하고 여기에 인화세표를 붙이게 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혼인세로 인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단결혼은 상해에 이어 북경, 천진, 항주, 남경, 한구(漢口), 무석(無錫), 가정(嘉定) 등 다른 도시로 확대되었고, 전국적으로 시행되기에 이르렀다.7) 1942집단결혼을 규정한 <집단결혼판법(集團結婚辦法)>이 공포됨으로써 집단결혼이 국가적 차원에서 전국적으로 추진되었다. 당시는 중일전쟁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집단결혼이 행해졌고, 전쟁 종식 이후에는 더 많은 지역에서 시행되어 새로운 풍속의 유행을 견인했다.

 

다만 정부가 주도하는 집단결혼은 지역별로 신청에 의해서 이루어졌고 1년에 몇 회, 한 회에 몇십 쌍 내외에 불과했기 때문에, 모든 혼인을 다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 비중은 전통혼인에 비해서는 턱없이 작았다. 그러나 집단결혼은 결혼의 간소화, 검약화 등이 실천되면서 비용면에서 상당히 경제적이었다. 때문에 이후 집단결혼은 정부와 관계없이 각 회사, 단체, 동향회 등에서 자체적으로 실시되기도 했다. ‘집단결혼은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근대성, 경제성, 합리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치적인 것과는 별개로 집단결혼이 각 단체에 의해 추진되면서 해당 단체의 결속을 다지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양상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8)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문명결혼이나 집단결혼이나 중국인의 사회 관습의 변화를 주도했던 혼인의 새로운 풍속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혼인 당사자의 자유의지를 상징했던 문명결혼이 유교적 전통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집단결혼과 동일시되어버린 것도 아이러니한데, 정치적 구호였던 집단결혼이 단체와 조직의 결속을 다지는 기회로 작용했다는 것도 아니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역사의 진행에는 뜻하지 않은 결과가 있고, 반전의 역사가 숨겨져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중국문화오디세이 13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1伍成, 「新生活運動中之婚姻問題」, 「家庭週刊」乙種75(1934), pp.14-15.

2) 左玉河, 「由文明結婚到集團婚禮」薛君度劉志琴主編, 「近代中國社會生活與觀念變遷」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01, p.198.

3) 香如文明結婚演說脚本繁華雜誌 5(1915), pp.18-19.

4) 상해의 집단결혼은 1935년 4월 처음 거행된 후매년 4번씩(1월 1국경일손문 탄신일공자 탄신일) 1937년 4월까지 총 13회가 진행되었다.

5) 鄭家祚集團結婚在婚姻法上之意義社會半月刊 1-8(1934), p.39.

6) 黃鐘集團結婚生生 3-7(1935), p.2.

7) 何學尼新生活集團結婚制應推行全國社會半月刊 1-8(1934), p.25.

8) 집단결혼은 현재 집체혼례(集體婚禮)’라는 용어로 행해지고 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新世界畵册 3(1911)

사진 2. 婦女時報』 10기(1913)

사진 3. 中華照相館良友 21기(1927)

사진 4. 健康家庭』 1기(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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