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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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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호
지명으로 본 장춘의 유래와 역사 _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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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청나라 시절에 강희제는 송화강 연안에 吉林烏拉城을 두었다. 만주어로 길림은 가장자리(沿)라는 뜻이며, 烏拉은 큰 강(大川)이라는 뜻이니, 길림오랍이란 바로 송화강 연안을 의미하는 지명이다. 장춘은 바로 길림성의 省都로서, 松花江의 지류인 伊通河, 飮馬河가 관통하고 있어 농사에 천혜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다. 따라서 장춘은 농업의 집산지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해 왔으며, 동북지역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고 하여 ‘동북지방의 지리적 중심’이라고도 불린다.


長春의 지명 유래와 관련하여 『滿洲地名考』와 『吉林通志』의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에는 예로부터 장춘화가 많이 피어 이것이 그대로 지명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장춘화는 월계화, 山刺花 등으로도 불리며, 영어로는 중국 장미(Chinese Rose)라고 표기된다. 이 꽃은 오월에 시작하여 오랜 기간 피기 때문에 장춘화(長春花)라 명명했다고 한다.


사진 1  장춘화(長春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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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으로 보자면 ‘봄이 길다’는 의미를 가진 도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춘은 북위 44도의 내륙에 위치하여 겨울에는 기온이 영하 20-30도까지 내려가 혹독하게 추운 지역에 속한다. 길고 지루한 겨울에 비해 봄은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따라서 장춘이라는 지명이 ‘봄이 길다’는 의미 보다는 봄을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장춘이라 하였거나, 봄과 같이 화사하고 행복한 나날들이 길었으면 하는 바램을 담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장춘은 기원전 2130년 숙신왕국의 두 번째 왕도로서, 당시 이곳은 喜都라 불렸다. 이 때 인구가 이미 천호에 달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하였다. 기원전 1800년경에 숙신왕은 국호를 德惠라 고치고 喜都를 合龍이라 개칭하였다. 이로부터 오늘날 장춘의 지명이 ‘茶啊冲’(차아충)이라는 숙신어로부터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차아충’이란 말은 고대 숙신인들이 하늘에 제사지낼 때 기복의 의미로 읍하던 축문으로서, 이후 한역으로 음이 전환되면서 장춘이 되었다는 설이다.


당나라 開元 시기에 장춘은 安北都護府에 속하여 書山府라 불렸다. 서기 846년 대조영이 이곳을 발해의 도읍지로 정하고, 기존 서산부의 명칭을 隆州府라 개칭하였다. 이후 발해가 敖東城으로 천도하였지만, 융주부는 여전히 발해의 경제 및 문화의 중심지로서, 인구가 50만 명에 달할 정도로 번영을 구가하였다.


서기 916년 거란이 흥기하고, 1115년 여진족의 金이 수립된 이후 이 지역에는 長春州가 설치되었다. 금나라에서는 서방으로부터 전래된 景敎(기독교)가 불교 및 도교와 더불어 3대 종교의 하나로 수많은 신도를 거느리고 있었다. 장춘주에는 수많은 교회가 세워져 동북 최대의 기독교 성지가 되었다. 1913년 출판된 『吉林地志』에 따르면 장춘의 지명은 청대 長春廳에서 기원하며, 장춘청은 요, 금 시기의 장춘주에서 비롯된 명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요나라와 금나라 시절에는 장춘이 역사상 가장 번영을 누린 시기이기도 하다.


1271년 몽골이 금나라를 치고 국호를 원이라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 역시 몽골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몽골이 불교를 전파하면서 이 지역에서는 불교가 크게 흥성하였다. 1644년 청이 입관할 때 지금의 장춘 지역에는 몽고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1644년 청의 順治帝가 북경에 입성한 이후 만주족은 산해관 이남으로 이주하여 동북은 거주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 되었다. 1677년 강희제는 중국 동북지역에 柳條邊墻을 쌓기 시작하였다. 유조변장이란 흙담을 쌓고 버들가지를 꽃아 울타리를 만들어 청조의 발상지라는 구실로 성역화함으로써 타민족의 이주를 엄격히 금지한 것이다. 청조는 이 지역을 ‘용이 태어난 지역’(興龍之地)이라 하여 신성시하였다. 용은 중국 황제의 상징이므로 황제가 탄생한 성지라는 의미이다.


청대 가경제(嘉慶帝 1760-1820) 시기에 20여년에 걸쳐 백련교의 난과 묘족의 난이 발생하여, 재정은 고갈되고 세금은 날로 무거워졌다. 전국에 걸쳐 기근과 유랑민이 발생하였으며, 이들은 자유와 토지를 찾아 산해관 밖으로 몰려들었다. 동북지역에는 몽골인이 거주하던 蒙地가 널리 분포되어 있었다. 한족의 주요한 유입 경로 중 하나가 바로 고르고스 前旗에 속한 장춘 지역이었다. 장춘은 몽골족의 公王 자싸커(札薩克)의 영지에 속하였으며, 그는 한족 소작인으로 하여금 농지를 개간하도록 하였다. 동북으로의 한족 유입이 18세기 이후 두드러지면서 청조는 봉금정책을 실시하였다. 청조는 몽골인의 생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嘉慶, 道光 연간(1756-1850) 여러 차례 몽지로의 한족 유입을 금지하는 금령을 내렸다.


그러나 청조의 봉금령에도 불구하고 산동과 화북지역 등 관내로부터 기아에 시달리던 유민들이 대거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였다. 동북지역의 인구가 급증한 배경에는 러시아와의 국경문제도 자리하고 있었다. 청조가 관내로 천도하고 중원의 통치에 몰두하는 사이에 러시아가 광활한 시베리아를 개척하면서 동진정책을 개시하였다. 17세기 중엽 흑룡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네르친스크, 알바진 등에 축성하였으며, 곡물과 광물을 찾아 송화강 유역까지 내려왔다. 1685년 흑룡강 부근에서 양국 군대가 교전을 벌이다 마침내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하여 국경을 획정하였다. 1858년 천진조약으로 영구항의 개항이 결정되고, 1858년 러시아와 체결한 愛琿條約, 1860년의 북경조약으로 러시아와의 북쪽 및 동쪽 국경이 흑룡강과 우수리강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여전히 노골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봉금정책은 이미 이완되어 실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청조는 토지를 민간에 불하하여 이민을 유치함으로써 러시아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청조는 한족을 이주시켜 러시아 국경 방어의 인적자원으로 활용하고, 동시에 토지 개간을 통해 세수를 늘려 재정난을 타개하고자 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 마침내 청조는 1885년 봉금령을 철폐하였다.


봉금령이 철폐되자 가뭄과 흉년에 시달리던 사람들이 발해만을 건너 대거 동북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당시 ‘촹관동(闖關東)’이라 불렀다. 闖은 글자의 형태로 보자면 문으로 말이 뛰어 들어가는 형상이다. 중국 고대에 진시황은 군사적 목적에서 네 필의 말이 끄는 수레가 신속하게 달릴 수 있는 馳道를 건설한 바 있다. 그런데 당시 수레를 끄는 말의 꼬리를 땋는 습속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 이유는 말이 달리는 속도가 매우 빨라 자칫 말 꼬리털에 나무 가지 등이 걸릴 경우 말이 놀라 수레가 뒤집힐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해 꼬리털을 땋았다고 한다. 이렇게 속도가 빠른 말이 문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모습이 마치 이주민들이 동북지역으로 몰려드는 것과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춘의 伊通河 주변으로 인구가 몰려들자, 청조는 연안에 長春堡를 건설하였다. 더욱이 1800년 7월 8일 청조는 장춘보 동쪽에 위치한 新立屯(오늘날 장춘시 南關區 新立城鎭)에 이들 이민자들을 관리하기 위한 기구를 설치하여 長春廳이라 하였다. 장춘청은 몽지에 설립된 최초의 행정기구였다. 장춘은 이 지역에 속한 자연촌락인 長春堡에서 유래된 명칭이라 할 수 있다. 장춘청은 동서로 230리, 남북으로는 180리에 달하였으며 4개의 鄕과 43개의 甲이 여기에 속하였다. 이후 1825년 伊通河의 수재를 피하기 위해 장춘청의 관아가 북쪽에 위치한 寬城子(오늘날 장춘시 南關區 西四道區 일대)로 이전하였다.


1865년 상인들이 도적의 약탈을 막기 위해, 스스로 자금을 출연하여 오래된 성벽을 개축하였다. 폭 3미터, 높이 3미터에 달하는 성벽을 쌓고, 여기에 崇德, 全安, 聚寶, 永興, 永安, 乾佑의 여섯 문을 내었다. 성 내에는 남북으로 대로가 형성되었으며, 雙橋西街 등 전문적으로 상거래를 하는 장소와 농산물시장, 축산물시장 등도 속속 들어섰다. 19세기 이후 장춘은 동북지역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상업의 중계지역으로서, 내몽골과의 교역의 거점으로 발전하였다.


1861년 청조가 중영천진조약을 체결한 이후 營口를 개방하자 이때부터 장춘에서 생산된 대두와 토산품이 遼河를 거쳐 영구로 가서 판매되었다. 이후 장춘은 대두의 집산지로서 매우 중요한 시장이 되었다. 장춘은 몽골인과 한족의 잡거가 허가된 최초의 도시였으며, 이 지역은 교역을 위해 모여든 몽골인과 한족으로 항상 북적였다고 한다. 1889년 장춘청은 長春府로 승격되었는데, 크기가 동서로 240리, 남북으로 160리에 달하였으며 6개의 鎭과 14개의 鄕으로 이루어졌다. 성향의 인구는 105,959戶에 달하였으며, 이 가운데 부성 내에 거주하던 호가 8,088호에 달하였다.


동북지방의 근대는 철도의 부설 및 교통혁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철도의 부설과 더불어 이주민의 증가, 민간에의 토지 불하, 농업 생산량과 수출량의 증가라는 사회경제적 변혁이 출현하였다. 철도라는 대량 수송 수단이 등장함으로써 물자와 사람의 이동이 가속화되고, 시장도 철도망을 따라 기능하기 시작하자 예전부터 내려오던 정기시는 쇠퇴해 갔다. 반면 철도망을 따라 새로운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철도를 중심으로 도심이 형성되었다. 철도는 관내로부터 한족 이주민의 유입을 가속화시켜, 1900년 이후 동북지역의 인구가 급증하였다. 1898년 5백만 명이었던 것이 1915년 2천만 명으로 증가했고, 1930년에는 3천만 명에 이르렀다. 동북의 지역성은 희미해지고 한족의 거주지가 동북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장춘의 근대화 역시 동북지역의 여타 도시와 마찬가지로 철도의 부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1898년 러시아는 중러밀약을 통해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으며, 같은 해 청조와 ‘여대(여순, 대련) 조차조약’을 체결하여 요동반도에 대한 지배권과 동청철도 지선의 부설권을 획득하였다. 


1899년 러시아는 장춘 구도시 북쪽 약 10킬로미터 지점에 기차역을 건설하였다. 동청철도는 長春府城 寬城子의 서남과 서북을 관통하였기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동청철도 장춘역을 관성자역이라 불렀다. 그리고 철도역을 중심으로 5평방킬로미터 이내를 장춘의 동청철도 부속지로 설정하였다. 여기에는 병영과 노무원 주택, 병원 등 수많은 편의시설이 건설되었고, 러시아 군대와 경찰이 주둔하였으며, 세금의 징수, 사법권, 영사재판권 등을 통해 사실상 러시아의 식민지와 다름이 없었다.


러일전쟁 이전에 장춘은 동청철도의 중간역이었으나, 1905년 러일전쟁과 그 결과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으로 동북지역이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권으로 과분되었다. 장춘은 동청철로 남선의 남단 기점역과 만철 최북단의 종점역이 교차함으로써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이 되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동청철도와 경쟁하기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남만주철도를 부설하였다. 1907년 말 남만주철도 장춘역이 건설되고, 남만주철도의 부속지가 형성되면서 9,000여 畝에 달하는 상업지역을 설치하여 대외 개방하였다. 이와 같이 러시아와 일본의 경쟁 속에서 장춘의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더욱이 1909년에 청조는 세 차례에 걸쳐 일본 남만주철도주식회사로부터 차관 215만 엔을 도입하여 장춘에 길장철도를 부설하였다. 기차역은 남만주철도 장춘역의 동쪽에 위치하여 이를 동역이라고 불렀다. 동역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가지가 형성되면서, 장춘은 보다 근대적인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다.


철도의 부설은 장춘의 도시 건설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장춘을 경계로 동청철도 남단이 일본이 지배하는 남만주철도의 부속지가 되면서, 장춘은 조선인이 봉천을 거쳐 다시 하얼빈으로 가거나, 길림(길장철도), 돈화(길돈철도) 등지로 가는 길목이었다. 따라서 장춘은 1945년 해방 당시 심양 다음으로 조선인 인구가 많았던 지역이기도 하다.


1913년 장춘부는 장춘현으로 개명되었으며 동서로 280리, 남북으로 250리에 달하였다. 1914년에는 6개의 진과 14개의 향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모두 5개의 구역으로 구성되었다. 1920년 장춘현에는 장춘시정공소가 설립되어 도시의 건설을 준비하였다. 1929년 9월 장춘시정공소와 장춘개두국이 합병되어 장춘시정주비처가 되었다. 여기에는 총 10구, 3개진, 86개 향, 1665개의 자연촌이 있었으며, 시구의 인구가 16만 5천명에 달하였다. 1930년 전 현의 인구는 47만 9천명에 달하였다.


만주사변 바로 다음날인 1931년 9월 19일 장춘은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9월 23일 길림성주석 張作相은 일본에 투항하여 길림성정부를 조직하고, 1932년 1월 장춘시정주비처를 철폐하고 장춘시정부를 설립하였다. 3월 8일 만주국이 수립되어 연호를 大同, 국기를 오색기로 정하였으며, 溥儀가 만주국의 원수로 취임하였다. 수도를 장춘에 두어 新京이라 개칭하고, 장춘시정부는 新京市政公署로 개칭되었다. 1934년 3월 1일 만주국은 만주제국으로 개칭되고, 부의가 황제에 등극하면서 연호를 康德이라 하였다. 신경시는 신경특별시로 개칭되었으며, 신경시정공서는 신경특별시정공서가 되었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마지막 황제’ 부의는 만주국 황제로서 지금은 僞滿皇宫博物院이 된 만주제국의 황궁에 거주하였다. 중국에서는 전통적으로 모든 관청이 통치자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자금성과 북경의 도시설계를 보더라도 모든 관청은 황제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다. 즉 황제가 모든 정무의 중심에서 관할하는 형태로 도시가 형성되는 것이다. 하지만 만주국의 관청가는 부의가 살던 황궁에서 수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반면 현재 중국공산당 길림성위원회로 사용되고 있는 관동군사령부는 마치 오사카성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웅장한 자태를 자랑하며, 관청가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다시 말해 황궁은 실상 껍데기에 불과했던 반면, 관동군사령부는 규모나 위치에서 황궁을 압도했던 것이다. 이는 당시 만주국의 실권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사진 2  만주제국의 황궁(현 僞滿皇宫博物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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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관동군사령부(현 중국공산단길림성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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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이 막 수립되었을 당시 장춘(신경)의 인구는 총 126,309명이었으며, 1943년 만주국 전성기의 인구는 약 754,210명에 달하였다. 1945년 만주국 말기의 인구는 716,815명에 달하였으며, 이 가운데 일본인이 약 14만 명에 달하였다. 만주국의 전성기에는 장춘에 대량의 군인이 주둔하였으며, 외국 교민과 유동인구를 더할 경우 장춘의 인구는 총 120만 명에 달하였다. 당시 東京의 인구수를 넘어 아시아 제일의 대도시가 된 것이다. 더욱이 장춘은 五族協和 등 다양한 민족이 잡거하여 ‘동방의 스위스’라 불리기도 하였다. 일본은 장춘을 생산도시가 아니라 순수 소비형의 정치중심 도시와 중국 침략의 대본영으로 구상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투항 이후 장춘은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일본의 투항과 함께 만주국이 무너지고, 1945년 12월 20일 중국국민당 중앙정부가 길림성 소속의 장춘시정부를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에 앞서 1945년 8월에 중국공산당은 이미 장춘시에 ‘장춘시위원회’를 설립하였으며, 11월에는 장춘시특별정부를 수립하였다.


1946년에 국민당군이 도시를 점령하였으나 중국 공산당군의 저항에 밀려 도시 외곽의 농촌은 장악하지 못했다. 중국공산당은 농촌의 역량을 동원하여 장춘시를 포위 공격한 끝에 이 지역을 수중에 넣을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장춘시에서는 굶주림으로 10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이 시절의 장춘을 사람들은 ‘困長春’(장춘의 곤궁한 시기)이라 부른다. 모택동은 다른 지역에 대한 일종의 본보기로 長春에 대한 전면적 포위에 나서, 150일간 물과 식량을 철저히 차단하였다. 히로시마 원자폭탄으로 약 20만의 사망자가 발생했는데, 長春 포위작전으로 사망한 숫자도 이와 비슷했다. 다만 한 번에 죽었는지 아니면 천천히 죽어갔는지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장춘의 식량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인육이 거래될 정도였으며, 가격은 1킬로그램 당 1.2달러 정도였다고 한다.


1949년 3월 10일 특별이라는 글자를 취소하고 장춘시로 개칭하여 동북행정위원회의 직할로 귀속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54년에 장춘을 길림성의 성도로 지정하고, 1955년 9월 27일 길림성인민정부는 장춘시를 성도로 승격하였다. 1989년 2월 중국정부는 장춘시를 국가계획단열시로 비준하였다. 1993년 말 국무원 결정에 따라 계획단열시를 정지하고 1994년 부성급도시로 규정하였다.


【중국도시이야기 5】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bit.ly/2lRzARr

http://bit.ly/2ludjbv

http://bit.ly/2lPcvk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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