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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3월호
뉴스 기사 속 짜장면과 우동 _ 주희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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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화교사회에는 오래 동안 이어온 농구대회가 있다. 언제부터 시작된 대회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1973년의 자료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44년 이상 이어온 대회이다. 이 대회는 명동 ‘漢城華僑小學(한성화교소학)’에서 주로 하는데 가끔 연남동 ‘漢城華僑中學(한성화교중학)’에서도 한다. 2016년 대회는 우천관계로 서울 모 대학교 실내에서 개최되었다. 늘 그렇듯 여러 기관장들이 다소 지루한 축사나 인사말을 하는데 이날은 특히 서울 모 대학교 부총장의 축사도 같이 들을 수가 있었다. “한·중 우호관계를 강조”하는 부총장과 “대만에서는 한국화교와 같은 인재를 필요로”한다는 대만 대사, 그리고 “한국에서 중화민국의 민족정신 계승을 강조”하는 화교협회회장의 연설이 있었다. ‘3인3색’이라고나 할까? 서로가 서로 간에 가지고 있는 각자의 시각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이 엇박자의 연설들에 관심을 갖는 이는 없겠지만 ‘민족정신(Volksgeist)’이라는 말이 순간 귀에 거슬렸다. 21세기인 2016년에 아직도 1970년도에나 있을 법한 연설을 하는 것이 바로 한국화교의 현실이다.  


사진 1  1973년 농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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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2016년 농구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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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국의 화교들은 이 ‘민족정신’을 가끔 엉뚱한 곳에서 발휘할 때가 있는데 그 중하나가 바로 한국의 중국요리에서이다. “짜장면 맛이 너무 좋아 인천 차이나타운을 떠날 수 없어요!”라는 인터뷰가 나올 정도로 요즘 중국요리 덕에 한국의 차이나타운이 다시 한 세기 이전과 같이 호황을 맞고 있다. 그 중심엔 누가 뭐라 해도 ‘짜장면(炸醬麪)’ 이 세 글자가 있다. 대중이 아닌 소수의 사람들이 먹는 음식이 과연 문화적 가치가 있는가? 특히 민주공화국에서 그 소수의 사람들이 먹던 음식이 전통이나 그 맥을 잇는다고 할 수 있을까? 이러한 차원에서 짜장면이야말로 한국 화교사(華僑史)의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적, 문화적 아이콘이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이 아이콘을 클릭하면 한국의 화교사가 보여야하는데 민족정신에 가로막혀 왜곡된 화교사가 펼쳐지니 우려스럽다. 게다가 개개인의 기억만으로 씌어져 있는 한국의 화교사에서 ‘옛날’이라는 단어의 모호한 개념이 이를 더 부추긴다. 그렇다면 ‘옛날’의 중국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정확히 말해서 소수가 아닌 대중들이 즐겨먹던 그런 중국요리는 무엇일까?
 

유럽에서 부르주아지(bourgeoisie)가 형성되고 혁명 이후에 레스토랑이 만들어지고 하는 그런 역사가 우리한테도 있었다고 한다면 1910년 이후가 아닐까 싶다. 그 무렵 한국의 화교사회에는 공화춘(共和春), 중화루(中華樓), 송죽루(松竹樓), 동흥루(東興樓)등이 있었다.


사진 3  공화춘(共和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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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중화루(中華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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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동흥루(東興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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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죽루는 비록 사진으로는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당시 서울까지 이름을 날리던 상당한 규모의 청요리집이였다고 한다.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신 화교사회에서 내로라하는 요리점은 모두 호텔식으로 규모가 상당하다. 그런데 이런 고급 식당에서 자본주의 논리에 위배되는 당시 부두 노동자(쿨리, Coulis, 苦力)를 대상으로 싸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개발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니 받아드리기가 쉽지 않다. 다시 말해 이들 고급요리점에서 프롤레타리아트(Proletariat)을 위해한 메뉴는 없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다.


사진 6  짜장면 박물관-짜장면을 먹는 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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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대중들이 즐겨 찾는 중국요리는 무엇일까? 뉴스 데이터베이스 서비스로 현재 화교사회 원로들의 기억보다 이전의 기록을 찾아보았다. 화교원로들의 기억을 넓게 잡아 1930년대로 본다면 비슷하게 짜장면에 대한 기록은 1931년, 1936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사진 7  스크랩-1931년 8월 21일 동아일보 6면 생활 문화 소설 진재전후(震災前後)

사진7 스크랩-1931년 8월 21일 동아일보 6면 생활 문화 소설 진재전후(震災前後).jpg


사진 8  스크랩-1936년 2월 16일 동아일보 3면 사회 대회여록(大會餘錄)

사진8 스크랩-1936년 2월 16일 동아일보 3면 사회 대회여록(大會餘錄).jpg


이 두 기사에서는 한 가지 특징을 찾을 수가 있는데 1931기사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는 대개 ‘규메시’나우동같은 아랫층으로 뱅뱅 도는 것이 보통이엇다. …강은 삼사년동안이나 중국으로 돌아다니면서‘짜장멘’ 그릇이나 먹어 보든 사람이 엇다…” 그리고 1936년 기사에서는 “…우둥먹구 짜장면 먹구 식은 변또먹어기며 그대들을 가르첫느니라…”와 같이  짜장면이 언급되기 전에 ‘우동’이 먼저 언급된다. 이 우동은 무엇일까? 아시다시피 우동(うどん, 饂飩)은 일본의 대표적인 면 요리이다. 1925년 9월 25일 기사 “…(맥분),木炭薪(목탄신),白唐木(백당목), 눈唐木(당목),綿絲(면사), 打綿(타면)의十四種低落(십사종저락)은小豆(소두), 粟(속), 砂糖(사탕),茶(다),鷄卵(계란),牛肉(우육), ‘우동’, 白木綿(백목면)…”와 1930년 12월 18일 기사 “…(육십전) 一(일), 飮食店(음식점)국밥一器(일기)三十錢(삼십전)을二十五錢(이십오전), 二十錢(이십전)을十五錢一(십오전일), 中國料理(중국요리)우동一器(일기)二十錢(이십전)을十五錢(십오전) 一(일), 理髮…”으로 보아서는 우동은 당시 물가의 지표가 될 정도로 매우 대중적인 음식으로 보인다.


사진 9  스크랩-1925년 9월 25일 동아일보 6면 경제-8월중경성(八月中京城)물가보세(物價保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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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0  스크랩- 1930년 12월 18일 동아일보 6면 사화-대천물가감하(大川物價減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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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의 1927년 3월 17일 기사 “…무,배추등 푸성귀농사를비릇하야 호떡과우동은원래부터단골이다…”와 1929년 11월 22일 기사 “…이란호떡가가에더리고가서 우동을시켜다먹고…”와 같이 우동은 당시 호떡과 같이 팔렸던 것으로도 보인다. 게다가 1929년 1월 8일 “…뎐화로써청국우동을 시켜다먹고 각각자긔방으로갈리엇다…”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화주문으로 배달까지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진 11  스크랩- 1927년 3월 17일 동아일보 2면 사화-황금(黃金)의 유혹(誘惑)

삼성금광탐방기(三成金鑛探訪記) 6회

사진11 스크랩- 1927년 3월 17일 동아일보 2면 사화-황금(黃金)의 유혹(誘惑) 삼성금광탐방기(三成金鑛探訪記) 6회.jpg


사진 12  스크랩-1929년 11월 22일 동아일보 2면 사회-인면수심 경찰이 처벌

사진12 스크랩-1929년 11월 22일 동아일보 2면 사회-인면수심 경찰이 처벌.jpg


사진 13  스크랩-1929년 1월 8일 동아일보 3면 생활 문화-소설 젊은개척자(開拓者)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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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1월 16일 기사 “…그안에서‘빵’과과자와 일본‘우동’을도적하야흰보재기에싸가지고나오는…”와 1931년 10월 8일 기사 “…불결하야 먹을수업는것을준다고 먹지안흠으로 우동(中國麵(중국면))을사다준일이잇고…”로 보아서 당시 우동은 ‘일본식 우동’과 ‘중국식 우동이 공존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시대가 시대인 만큼 한국의 화교들이 일본의 우동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식 면(麪)요리를 팔았을 것이다.


사진 14  스크랩-1927년 1월 16일 동아일보 2면 사회 죄인(罪人)만드는 현대(現代)의 사회(社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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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5  스크랩-1931년 10월 8일 동아일보 7면 사회 목포격문범(木浦檄文犯)

유치중단식(留置中斷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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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대중들이 이용하는 중국요리점에서 대표하는 요리는 지금처럼 짜장면이 아니고 우동이라는 사실이다. 아래의 기사 1930년 12월 5일의 기사 “中國料理(중국요리)우동三十錢(삼십전)을十五錢同二十錢(십오전동이십전)을十二錢雜菜四十錢(십이전잡채사십전)을二十五錢糖酢肉五十五錢(이십오전당초육오십오전)을四十錢(사십전)얀잡피八十錢(팔십전)은六十錢(육십전)덴부라五十錢(오십전)을三十五錢日酒二十錢(삼십오전일주이십전)을二十二錢소주십전(이십이전소주십전)을八錢(팔전)”에서 더 명확해진다.


사진 16  스크랩-1930년 12월 5일 동아일보 6면 사회 천내리(川內里)에도 물가(物價)를 감하(減下)

사진16 스크랩-1930년 12월 18일 동아일보 6면 사회 천내리(川內里)에도 물가(物價)를 감하(減下).jpg


이 기사에서 흥미로운 것은 당시 중국요리를 대표하는 메뉴를 우동, 잡채, 탕수육, 덴부라(고기튀기), 얀잡피(양장피)와 술을 꼽는다. 아래 1937년 9월 20일 기사 “府內支那料理店(부내지나요리점) 八割以上(팔할이상)이廢休業(폐휴업) 호떡, 우동, 탕수육 맛볼수없어 味覺(미각)에도非常時來(비상시래)… 철귀는‘우동’‘잡채’‘탕수육’ 이러케 입에붙은말같이되도록 대중…”을 계속 보면 호떡 역시도 대중이 즐겨먹는 중국요리 중 하나였다.


사진 17  스크랩-1937년 9월 20일 동아일보 1면 시회 횡성수설(横說竪說)

사진17 스크랩-1937년 9월 20일 동아일보 1면 시회 횡성수설(_說竪說).jpg


그렇다면 당시 대중들이 즐겨 찾는 중국요리점은 어떤 모습인가? 위 기사들은 종합하면 호떡도 팔고, 만두도 팔고, 우동, 잡채, 탕수육, 고기튀김인 덴뿌라, 양장피 등을 파는 아래와 사진 과 같은 가게에 모습이 상상된다.


사진 18  1959년 명동거리의 한 호떡집 취천루(聚泉樓)사진18 1959년 명동거리의 한 호떡집 취천루(聚泉樓).jpg


그동안 짜장면이 처음부터 중국요리점의 대표 음식으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에 짜장면의 역사를 한국화교사와 함께 그리고자 한다. 뉴스 데이터베스가 말해주는 짜장면의 대중화는 1953년 이후이며, 한국전쟁을 고려할 때 1948년 짜장면의 원료인 ‘춘장’ 공장이 최초로 설립되는 시기와 궤를 같이한다.


사진 19  동네 중국집 메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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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동네 ‘중국집’에서 짜장면보다 우동이 첫 번째로 나오는 메뉴판을 볼 수 있다. 우동이 왜 짜장면보다 앞에 나와 있는지 그 의문이 다소 풀리지만 지금도 우리가 즐겨 먹는 잡채와 양장피는 중국 산둥요리가 아닌 전형적인 중국 동북요리이다. 이것은 한국의 중국요리가 중국 산둥요리를 기초하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지금 짜장면의 모습이 중국동북의 짜장면과 유사한데 오이채를 고명으로 얻는 것이 매우 닮아 있다. 아래는 중국의 검색엔진 ‘바이두(百度)’에서 “동북자짱면(東北炸醬麪)”을 검색한 이미지 결과이다. 우리가 지금 먹는 오이채를 고명으로 얻는 짜장면과 그 모습이 매우 흡사하다.


사진 20  바이두(百度)’에서 “동북짜장면(東北炸醬麪)”을 검색한 이미지 결과

사진20 바이두(百度)’에서 “동북자짱면(東北炸醬_)”을 검색한 이미지 결과.jpg


중국 동북지방은 고구려부터 간도(間島)까지 우리와 역사적으로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문화적 왕래는 필연적이다. 역사는 돌고 돈다고 했던가? 지금도 이러한 중국 동북지방과의 문화적 왕래는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즐겨먹는 ‘칭다오앤양꼬치’가 그러하고 중국 동북요리 ‘찹쌀탕수육(꿔바로우, 鍋包肉)’이 그러하다. 이 두 음식 모두 한국의 유학생들이 중국에서 즐겨먹고 중국의 동북지방 사람들이 한국으로 가지고 온 것이다. 


한국중화요리, '()''()' 24

 

주희풍 _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박사수료 / 인천화교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중국·화교문화연구소

필자 제공

http://caf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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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일보 20161129일 판 우리나라 두번째 호텔 스튜어드호텔 표지석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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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821일 동아일보 6면 생활 문화 소설 진재전후(震災前後) 스크랩

1936216일 동아일보 3면 사회 대회여록(大會餘錄) 스크랩

1925925일 동아일보 6면 경제-8월중경성(八月中京城)물가보세(物價保勢)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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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25일 동아일보 6면 사회 천내리(川內里)에도 물가(物價)를 감하(減下) 스크랩

1937920일 동아일보 1면 시회 횡성수설(横說竪說) 스크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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