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2월호
일하는 ‘염황자손’의 삼황오제 숭배 _ 박경석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

중국 허난성(河南省) 정저우(鄭州)에서 서남쪽으로 30㎞ 정도 가면 황하풍경명승구(黃河風景名勝區)가 나오는데, 그곳에는 황하를 바라보고 있는 두 인물의 거대한 석상이 우뚝 서있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염제(炎帝)와 황제(黃帝)를 형상화해 놓은 ‘염황이제(炎黃二帝) 조각상’이다. 태항산(太行山)의 진석(眞石)을 옮겨 만든 것으로 높이가 51m에 이른다. 20년에 걸친 작업 끝에 2007년 완성되었다. 모두 1억 8천 위안(한화 약 308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는데, 정부의 지원 이외에 국외 화교와 국내 기업의 적극적인 기부로 비용이 충당되었다고 한다.


2017-01-31 10;55;51.JPG

사진 1  염황이제 조각상(炎黃二帝塑像)


거대한 염제와 황제의 석상을 중국문명의 발원지인 황하 유역 중원의 한 가운데에, 그것도 해외 화교를 포함한 ‘화인(華人)’의 광범위한 모금을 통해 만든 것은 ‘염황자손(炎黃子孫)’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중국에는 전통적으로 ‘염황자손, 불망시조(炎黃子孫, 不忘始祖)’라는 말이 있다. ‘염제와 황제의 자손은 시조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중국인 스스로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는 정체성을 통해 일체감과 문화적 자긍심을 발양하려는 의도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염제와 황제는 삼황오제(三皇五帝) 중에 속해 있다. 삼황오제는 전국시기의 『주례·춘관‧외사(周禮‧春官‧外史)』에 처음 언급된 이래,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일정하지 않다. 삼황(三皇)의 경우 6가지 용례가 있는데, 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 ; ⑵ 천황, 지황, 인황(人皇) ; ⑶ 복희(伏羲), 여와(女媧), 신농(神農) ; ⑷ 복희, 신농, 축융(祝融) ; ⑸ 복희, 신농, 황제(黃帝) ; ⑹ 수인(燧人), 복희, 신농 등이다. 오제(五帝)는 3가지 용례가 있는데, ⑴ 황제(黃帝), 전욱(顓頊), 제곡(帝嚳), 당요(唐堯), 우순(虞舜) ; ⑵ 태호(太皞=伏羲), 염제(炎帝=神農), 황제, 소호(少皞), 전욱 ; ⑶ 소호(少昊=少皞), 전욱, 고신(高辛=帝嚳), 당요, 우순 등이다. 
 

주지하듯이, 삼황오제는 ‘신화적인’ 존재로서 중국, 중국인, 중국문화의 원류 내지 정체성을 상징한다. 특히, 복희, 여와, 신농(염제), 황제, 수인, 축융, 요제(堯帝), 순제(舜帝) 등 중국문명의 기원을 밝히는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스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복희와 여와는 창세의 남녀 주인공일 뿐만 아니라, 수렵, 어로, 불, 문자, 음악, 혼인 등 문명 창조의 주체를 상징한다. 신농은 농업과 상업을 인간들에게 가르쳤고, 의학과 약학에 통달한 존재였다. 황제는 통합된 나라의 최초 통치자일 뿐만 아니라, 가옥, 우물, 절구, 활, 수레, 배, 옷, 신발, 달력, 악기 등 인간에게 필요한 많은 물건을 발명하였다. 수인은 인공으로 불을 얻는 방법을 창안하였고 음식을 익혀 먹는 방법을 전해주었다. 축융은 불을 관장하는 존재로 인식되었고, 요순(堯舜) 임금은 ‘태평성대의 선정(善政)’을 상징하였다.


근대 이후의 인류는 문명의 기원을 고고학이라는 과학을 통해 밝히려고 하지만, 훨씬 더 오랫동안 옛사람들은 이야기를 통해 궁금증을 풀어왔고, 그 이야기가 신화로 남아 있다. 이러한 신화가 전해져 내려오면서 삼황오제는 중국인 스스로의 존재론적 기원으로 여겨졌고, 광범위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다면 일하는 서민들 가운데에서는 어떤 업종이 삼황오제를 숭배했을까? 이교(李喬)의 『행업신숭배 : 中國民衆造神史硏究』(북경출판사, 2013년 8월판)에 따르면, 다양한 업종에서 삼황오제를 조상신이나 수호신으로 섬겼다. 아래에서는 2회에 걸쳐 그 내력을 살펴본다.


• 농업


역사상 농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에, 농업과 관련해 제사를 드리는 신령도 매우 다양하였다. 예컨대, 팔사(八蠟), 후직(後稷), 토곡신(土穀神), 청묘신(靑苗神), 우박신(雹神), 벌레신(蟲神), 우리신(圈神), 제방신(塘神), 면화신(棉花神), 우왕(牛王) 이외에도, 복희, 신농, 황제 등 삼황(三皇)을 널리 섬겼다. 농업에서 삼황을 조상신으로 섬긴 이유는 복희의 경우 팔괘(八卦)를 그려 사방(四方)을 정하고 그물을 만들어 고기잡이를 가르쳤기 때문이다. 또한, 신농은 오곡(五穀)을 심어 농사를 일으키고, 여러 약초의 효능을 알아내고 약초를 가꾸는 밭을 개간하였으며, 황제는 농기구를 발명하고 절기(節氣)를 정하였기 때문이다. 모두가 농사에 필요한 것들을 발명한 문화 창조자이다.


그 중에서도 신농(神農=炎帝)은 농사일을 가르쳤다는 전설의 주인공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 신농만을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농민들도 많았다. 고대 문헌에는 신농과 농업의 관계에 대해 많은 기록이 남아 있는데, 신농은 복희를 계승한 성인(聖人)으로서 많은 농기구를 발명했으며, 백성들에게 오곡백과를 심고 가꾸는 방법을 가르쳤던 존재로 기록되어 있다. 이에 농민들이 신농에게 제사를 드리는 풍속이 전국 각지에서 매우 중요하게 행해졌다.


2017-01-31 10;56;19.JPG

사진 2  복희여와도


• 의약업


의사, 약포(藥舖), 약재상, 약초 재배 농민, 의학교 교사 등은 모두 나름의 의약 관련 신령을 섬겼는데, 복희, 신농, 황제를 비롯해 손사막(孫思邈), 편작(扁鵲), 화타(華佗), 비동(邳彤), 여동빈(呂洞賓), 이시진(李時珍), 보생대제(保生大帝), 안광낭랑(眼光娘娘), 이철괴(李鐵拐) 등 매우 다양하였다. 대개는 복희, 신농, 황제 등 삼황을 ‘약황(藥皇)’이라고 부르며 주신(主神)으로 삼고, 나머지 역사상의 명의(名醫)들을 배석시켜 제사 드리는(陪祀) 방식이었다.


의약업이 삼황을 ‘의약의 시조’로 숭배하는 것은 삼황과 의약의 관계에 관한 신화와 전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요컨대, 신농과 관련해서는 그가 ‘온갖 풀(百草)의 맛을 보고 약성(藥性)을 분별해내어 약초로 삼았다’는 전설이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러 의학서적을 저술하여 병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말하자면 의술이 그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황제는 음양오행의 이치를 깨우쳐준 존재로 여겨졌기 때문에 의사들로부터 조상신으로 숭배되었다. 주지하듯이 전통적인 중의학은 ‘음양오행설’에 철저히 근거하고 있다. 또한, 황제는 신하인 기백(岐伯)으로 하여금 초목의 맛을 보고 약초에 관한 책을 쓰라고 지시했었다는 전설도 있다.


복희는 팔괘를 만들어 백성으로 하여금 길흉(吉凶)을 알게 했다는 전설과 관련 있다. 말하자면, 질병이 기본적으로 길흉화복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므로 복희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다.


• 미장이(미장공)


흙을 만지며 일하는 미장공들도 삼황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그 중에서도 여와(女媧)를 주신(主神)으로 섬겼다. 삼황을 섬겼지만 실질적으로는 여와를 숭배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여와는 사람을 만든 창세의 여신으로 유명한데, 처음에는 흙을 정성스럽게 빚어 사람을 만들었으나 시간이 지체되자 흙을 공중으로 뿌렸는데 점점이 흩어진 흙 알갱이들이 사람이 되었다고 한다. 전자는 고귀한 사람이 되었고 후자는 미천한 사람이 되었다. 미장공과 여와 사이에는 흙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미장공이 벽면을 작업할 때는 다섯 가지 색상을 사용하는데, 이는 여와가 무너진 하늘을 떠받치기 위해 사용했던 오색석(五色石)과 관련이 있다.


• 도량형업


도량형을 취급하는 사람들도 복희, 신농, 황제를 조상신으로 섬겼다. 이는 이들 삼황이 도량형을 창제했다는 전설과 깊은 관계가 있다. 특히, 사천(四川) 내강(內江)의 삼황묘(三皇廟)에 걸려있는 복희 초상화에는 태극도(太極圖)라는 도량형이 손에 들려 있다. 복희가 팔괘를 창안해 냈다는 전설도 관련이 있다.
 
• 의류업


옷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의류업은 대개 황제(黃帝; 軒轅)를 조상신으로 섬겼다. 그래서 옷을 만들 때 사용하는 자를 ‘헌원척(軒轅尺)’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의류업이 황제를 조상신으로 섬긴 것은 황제가 복장(服裝)을 발명했다는 전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특히 백여(伯餘)와 호조(胡曹)가 황제의 명령에 따라 옷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역에 따라 복희, 신농, 황제 등 삼황을 포괄해 신봉하기도 했다. 특히 베이징(北京)의 경우, 의류업 종사자들이 매우 많아 대규모 회관을 건축하였는데, 회관 안에 있는 신전(神殿)에는 삼황신상(三皇神像)을 모셨다. 이들은 삼황이 먹고 입는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함께 숭배했던 것이지만, 이 경우에도 옷과 관련이 가장 깊은 황제를 주신(主神)으로 삼았다.


• 모자업(帽業)


모자를 취급하는 업종에서도 복희, 신농, 황제 등 삼황을 조상신으로 섬겼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황제(黃帝)를 조상신으로 숭배했다. 이는 황제가 의관(衣冠)을 발명한 존재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未完)


【중국 행업신 이야기 동업자들의 세속화된 신성 8

 

박경석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bit.ly/2kIMOz8




프린트 복사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