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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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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호
중국에서 온 비(非)화교 – “찐 허” (1) _ 현시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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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찐 허혹은 윈난인(云南人)



동남아시아에서 화교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단연 싱가포르다. 그 뒤를 잇는 나라가 말레이시아로 총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한다. 그렇다면 세 번째로 화교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는 어디일까? 바로 태국이다. 태국의 화교인구는 12세기부터 현재까지 타이 사회에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잘 동화되어서 말레이시아와 달리 딱히 눈에 띄는 인종 갈등이나 차별이 있지는 않다. 태국의 유명한 정치인이나 연예인, 사업가 중 다수가 화교 출신이 많고, 현재 태국을 지배하는 짜끄리 왕조를 세운 라마 1세도 중국계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2PM의 닉쿤이나 GOT7의 뱀뱀, 그리고 NCT의 텐 역시 중국계 태국인이다. 이렇듯 태국의 중국인들은 그냥 평범한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태국으로 온 중국인 모두가화교화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 태어나고 태국으로 이주했지만, 화교나 화인이 아니라고산족(태국어로차오 카오”)혹은소수민족으로 분류되거나 불리는 경우도 생각 외로 많다. 태국의 제2 도시로 알려진 북부의 치앙마이나 국경지역인 치앙라이, 매홍손, 딱 주와 같은 국경 지역에 사는 소수민족 다수가 중국 북서부와 남부 출신이다. 이들 중에는 19세기에 청나라의 강압적인 동화정책과 차별에 살길을 찾아 남하한 이들도 있지만, 1949년 중국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서 국민당 지지자들과 군인들이 남쪽으로 후퇴할 때 함께 이주한 민간인들도 있다. 이렇게 태국에 온 중국계 이주민이지만 소수민족으로 알려진 이들 중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찐 허이다.

 

태국어로은 중국을 의미하는데는 그 기원이나 의미가 모호하다. 12세기 전후로 중국에서 육로로 태국, 라오스, 미얀마 등지로 이주한 윈난 출신의 보부상 혹은 상인들을 일컫는 타이와 라오어인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고, 무슬림을 가리키는 중국어 (, 휘 혹은 후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선포 이후 1950년대부터 시작한 중국인들의 대량이주는 태국 정부와 미국 북부지역 소수민족에 대한 집중적 관심을 두게 한 계기가 되었는데, 이들 중 특히 육로로 이동한 윈난 출신의 이주민들은 찐 허로 분류가 되었다. 중국어도 태국어도 아닌 이 명칭에서도 알 수 있는 건 이들의 모호한 위치다. 윈난 출신의 중국인이지만 태국에서는 화교나 화인이 되지 못하는 고산족이나 소수민족으로 여겨지는 국적 없는 이주민이고, 그렇기 때문에 역사 없는 사람들로 묘사되기도 한다.

 

태국인들의 눈에는 역사 없는 사람들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찐 허라는 이름이 이미 암시하듯 이들에게 역사가 없는 건 아니다. 그들의 짧지 않은, 그리고 쉽지도 않은 역사를 1949년을 기점으로 나누어 보려고 한다. 1949년 이전 태국에 정착한 윈난 출신 이주민들의 역사는 그들에게 찐 허라는 이름을 준 캐러밴 무역을 통해 보고,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미얀마를 통해 태국으로 이주한 이들의 역사는 냉전시기 태국 정부의 국민당 잔류군에 대한 정책을 통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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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윈난 서부마을을 지나가는 회족 캐러밴 무역상들과 노새



윈난 회족과 캐러밴 무역

우리가 알고 있는 동남아시아에 정착한 대부분 화교는 해외(overseas)” 이주민이다. , 바닷길을 통해 동남아시아로 이주한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태국에 이주한 중국인들의 반 이상이 광둥성과 중국 동남부 출신인데, 윈난 출신과는 소통이 힘들어 태국인들은 후자를 중국인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들을 바닷길로 이주한 중국인이 아닌 다른 육로(overland)” 이주민으로 분류했고, 특히 윈난 출신 중국인들을 찐 허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면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민족과 국가의 등장이 애매모호한 선사시대에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이 처음부터 중국이 아니었고 수많은 왕조와 이들에 대항하는 변방국가들 간의 대결로 점쳐왔듯이 중국과 동남아시아 왕조, 민족, 그리고 국가들 간의 관계는 수천 년 동안 다양하게 발전해 왔다. 윈난 역시 13세기 몽골 제국의 확장 과정에서 통합되었고, 한족과 중앙아시아의 무슬림 이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한족들은 주로 저지대와 계곡에 정착했기 때문에 산악지대나 그 주변 지역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치지 못했다. 명시대에 들어 윈난과 버마, 인도, 태국 북부, 라오스, 그리고 베트남 지역 간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육로를 통한 무역 또한 활발해졌다. 특히 지리적으로 윈난과 가장 가까운 버마는 무역상들뿐만이 아니라 정치적 망명자들까지 드나들고 정착하게 되는 말 그대로 윈난의 후문역할을 하게 된다.

 

해발 2,000미터가 넘는 산악지대를 통과하여 상품을 실어 나르는 캐러밴 무역을 가능하게 한 것은 노새(mule)였다. 캐러밴 무역은 윈난 출신의 한족과 비()한족 모두가 참여했지만, 그 중 라고 불린 회족이 노새몰이에 가장 능숙했다고 한다. 그래서 캐러밴 무역의 주역이 회족이었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 한족 출신이 더 많았고 영향력도 컸다고 한다. 캐러밴 무역상이 지나가는 길에는 이들이 묵고 갈 여관과 식당, 간이 상점들이 등장했고, 무역로의 종점에는 무슬림 사원이 세워지기도 했다. 산적을 만나거나 야생 동물의 공격을 당하는 경우가 많아 캐러밴 무역상들은 완전무장을 한 경호원을 고용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렇듯 캐러밴 무역상은 마을에서 마을로 이동하는 보부상 이상으로 육로 무역지대를 형성하는 데 막대한 기여를 했다.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 윈난 출신 무역상들이 활동했던 지역은 티벳에서부터 인도의 아쌈지역, 버마, 태국, 라오스, 북부 베트남(통킹), 그리고 쓰촨성, 구이저우성, 광시성까지 확대된다.

 

윈난과 태국 북부지역의 무역로는 버마를 통과하는 길과 라오스를 통과하는 길이 있었다. 보이차로 유명한 쓰마오에서 시작해 버마의 샨주의 주도인 껭뚱지역을 거쳐 태국의 치앙라이의 메사이로 들어오는 길이 전자이고, 라오스의 퐁살리를 통해 들어와 루앙프라방을 거쳐 메콩강을 건너 역시 치앙라이의 치앙콩으로 들어오는 길이 후자다. 버마를 통과하는 길이 훨씬 더 안전하고 쉽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시암(1938년 전 태국 정식 명칭)과 버마 간의 긴장 관계가 지속되어 태국 북부지역상들은 라오스를 통과하는 길 추천했다고 한다. 그래도 쓰마오-껭뚱-메사이를 잇는 길이 윈난과 태국 북부지역 간 캐러밴 무역의 동맥역할을 했고, 덕분에 태국-버마-라오스 국경이 맞닿아 있는 치앙센이 황금 삼각지(골든 트라이앵글)라는 무역상들의 집결지로 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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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중국과 버마, 라오스, 태국 북부지역 사이의 캐러밴 무역로



윈난과 태국 북부지역 간에 거래되던 물품들은 다양했다. 윈난에서 출발하는 무역상들은 비단, , 구리로 만든 그릇, 밀짚모자, 밀랍, 호두, , 옻칠함, 레이스, , 아편 등을 가지고 왔고, 돌아갈 때는 태국과 껭뚱 지역에서 난 면직물, 태국의 상아와 뿔, 껭뚱의 차, 그리고 염료나 금가루 외에 유럽, 인도, 일본에서 온 상인들이 파는 상품 등을 가지고 갔다. 윈난 수출품 중에서 가장 중요한 상품은 비단과 아편이었고, 수입품 중에서는 면직물과 차였는데, 19세기 중반부터 영국령 인도에서 수출하는 아편량이 줄어들기 시작하자 윈난에서의 아편재배가 늘어나고, 덩달아 샨주 산 아편 수출이 늘어나게 된다. 아편전쟁 이후 중국에서의 아편판매가 힘들어지자, 윈난과 샨주의 아편은 황금 삼각지로 몰리게 된다.

 

아편전쟁 이후 청황조는 급격한 혼란의 시대에 접어들게 된다. 1850년 태평천국운동을 시작으로 곧이어 염군의 반란이 일어난다. 그리고 윈난에서는 1856년 운난회변(雲南回變)으로 알려진 회족의 반란이 일어난다. 영문으로는 빤떼 반란(Panthay Rebellion)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서 빤떼는 버마인들이 중국인 무슬림을 일컫는 말이다. 13세기 몽골이 버마를 침략할 때 가장 큰 공을 세운 이들이 회족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후 이들이 불교 신자가 다수인 버마로 이주하면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고, 버마인들에 의해 빤떼라고 불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버마에 정착한 중국계 무슬림들은 빤떼라는 명칭이 인종 비하적 뉘앙스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쓰지 않는다.

 

청황조의 인종차별과 한족과의 갈등으로 윈난 회족들의 불만이 쌓일 대로 쌓여 있던 상황에서 반란은 쿤밍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은광에서 회족 광부들이 한족 감독관을 죽인 것을 시작으로 폭발했다. 회족 광부들의 반란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실패한 윈난성 관료가 회족에 대한 무차별적 탄압과 학살을 명령한다. 이에 반청봉기를 꾀하고 있었던 두원슈(杜文秀)가 회족 반란군을 조직하게 된다. 그 해 윈난성에 있는 50여 개의 마을을 점령한 두원슈는 이듬해 다리(大理)를 수도로 삼고, 자신을 술탄 술레이만으로 등극시킨다. 두원슈의 술탄국은 버마와의 국경지역으로 확장해 나가는데 이에 샨족과 카친족들의 지원이 한몫했다. 아편전쟁의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던 청나라 정부는 이미 태평군과 염군과의 전쟁으로 윈난에서의 봉기를 진압할 만한 정부군을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렇게 술탄국은 186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문제는 술탄국의 수립 이후 윈난과 버마간의 무역이 거의 중단되다시피 한 것이다. 청정부는 반란군을 제압할 만큼의 정부군을 보낼 수 없었지만, 윈난과 주변 지역 한족들은 정규군 외에 도적들을 동원하여 술탄국의 고립을 꾀했다. 영국의 기록에 따르면 반란 전 1854년 윈난과 버마간의 무역 규모가 무려 연간 50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특히 윈난에서 들여오는 비단과 차, 금박을 대량으로 사들이던 영국의 상인들은 반란으로 인해 무역이 중단된 것에 대해 불만이 컸다. 이에 사절단을 술탄국으로 보내 무역 재개 의사를 타진했는데, 역시 고립을 두려워하고 무역 중단으로 인한 경제적 혼란을 두려워한 회족들은 영국에게 캐러밴 무역이 재개될 수 있다면 경호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게 된다.

 

1869년 전열을 가다듬은 청정부군은 윈난 술탄국에 대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두원슈와 회족들은 저항을 이어갔지만, 결국 1973년 다리의 수도가 함락당하면서 윈난 회족 반란은 종결된다. 반란 진압은 곧 회족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으로 이어졌고, 수천 명이 학살되는 가운데 다수의 윈난 회족이 버마로 탈출하게 된다. 이들 중 일부는 샨 주의 도적대에 합류하여 청황조에 대한 보복을 계획했지만, 다수는 이미 버마의 샨주나 보석 광산이 있는 모곡 등지에 있던 회족 공동체에 합류했다. 그러면서 중국과 버마 간의 무역도 점진적으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1885년 상부버마를 점령한 영국은 중국과 국경이 맞닿은 샨주와 카친주로 진출하는데, 이 과정에서 윈난 출신 회족, 특히 노새몰이꾼들은 영국군의 국경 지역 진출에 막대한 기여를 하게 된다. 무역 재개는 캐러밴 무역의 전성기를 불러왔는데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 윈난-버마 간의 무역량은 급격히 증대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하고 일본이 버마를 점령하면서 다수의 윈난 회족이 중국으로 잠시 피신을 했었지만, 종전 이후 다시 버마로 돌아왔다. 여전히 버마에 중국계 무슬림 공동체는 건재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버마로 돌아오거나 버마에서 태어난 2세대는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가운데 버마의 언어와 문화를 받아들이며 살아갔다. 다수의 윈난 회족은 여전히 캐러밴 무역과 상업에 종사하면서 중국계 무슬림으로서의 전통을 이어 나갔다. 윈난 출신 캐러밴 무역상의 전통을 지키려는 이러한 노력이 이후 태국으로 이주했을 때 찐 허라는 정체성을 만들어 내는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1/2]



현시내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연구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참고문헌

정면. “영웅과 매국노 사이 - 杜文秀를 둘러싼 기억 경쟁.” 동북아문화연구 1, no. 63 (2020): 203-228.

Forbes, Andrew D. W. “The ‘ČĪN-HǬ’ (Yunnanese Chinese) Caravan Trade with North Thailand During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Journal of Asian History 21, no. 1 (1987): 1-47.

Schrock, Joann L., ed. Minority Groups in Thailand. Washington, DC: American Institutes for Research. Cultural Information Analysis Center Department of the Army, 1970.

Tinker, Hugh. “Burma’s Northeast Borderland Problems.” Pacific Affairs 29, no. 4 (December 1956): 324-346.

Yegar, Moshe. “The Panthay (Chinese Muslims) of Burma and Yunnan.” Journal of Southeast Asian History 7, no. 1 (March 1966): 73-85.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위키커몬스,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YUNNAN-Notable_de_Posi.jpg

사진 2. 게티이미지, https://www.gettyimages.co.uk/detail/news-photo/the-tea-horse-road-was-a-network-of-mule-caravan-paths-news-photo/1354436419

사진 3. Andrew D. W. Forbes, “The ‘ČĪN-HǬ’ (Yunnanese Chinese) Caravan Trade with North Thailand During the Late Nineteenth and Early Twentieth Centuries,” Journal of Asian History 21, no. 1 (1987):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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