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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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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하늘만큼 땅만큼 즐거운 사랑 이야기: 「서상기(西廂記)」 두 번째 이야기 _ 윤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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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절간에서 벌어진 로맨스

 

  서상기」서상(西廂)’, 즉 서쪽 곁채를 배경으로 한다. 보구사(普救寺)라는 절의 서쪽에 곁채가 하나 있었는데, 이곳에서 장생(張生)과 앵앵(鶯鶯) 두 사람의 밀회가 이뤄졌기 때문에 작품의 제목이 서상기가 된 것이다. 보구사는 당() 무측천(武則天) 때 창건된 절로, 지금도 중국 산서성(山西省)에 가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두 남녀는 도대체 어떻게 절간에서 사랑을 나누게 되었을까? 앵앵의 가족은 재상이었던 아버지가 병사하자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에 묻기 위해 길을 가던 중 잠시 보구사에 묵게 된다. 한편 장생은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길에 한 여관에 묵는데, 보구사를 구경하려고 들렀다가 우연히 앵앵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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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1. 앵앵에게 반한 장생 


위 그림은 청 중엽에 나온 판본에 수록된 삽화로, 두 면에 걸쳐 장생이 앵앵을 보고 반하는 순간을 묘사했다. 바로 이 순간 때문에 천고의 명작 「서상기」가 탄생한 것이다. 오른편에 장생은 보구사의 법총 스님과 함께 서 있고, 왼편에는 앵앵이 홍낭과 함께 나비를 구경하고 있다. 장생과 앵앵 두 사람의 시선을 한번 살펴보자. 앵앵은 즐거운 표정으로 나비를 희롱하는 홍낭을 보고 있고, 그런 앵앵을 장생이 먼발치에서 보고 있다. 여기서 앵앵과 홍낭이 바라보고 있는 것은 한 쌍의 나비인데, 전통적으로 한 쌍의 나비는 남녀 간의 사랑의 상징으로 쓰였다.

 

앵앵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장생은 그녀를 자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절의 주지 스님을 만나 자신이 글공부를 해야 하는데 여관은 너무 소란스러우니 절이 더 좋을 것 같다며 방을 빌려달라고 하고, 주지 스님은 이를 흔쾌히 수락한다. 장생이 여관에서 짐을 들고 와 보구사에 묵게 되면서부터 두 사람의 러브스토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 손비호(孫飛虎) 장군이 부하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보구사를 포위하고 앵앵을 내놓지 않으면 절에 불을 지르겠다고 협박한다. 고민 끝에 앵앵이 계책을 내어 절에 있는 사람 가운데 도적떼를 무찌르는 자와 혼인하겠다고 하고, 앵앵의 모친은 절의 사람들을 모두 모아놓고 공개적으로 약속을 한다. 장생은 동문수학했던 두확(杜確) 장군에게 편지를 써서 구원을 요청하고, 두확 장군은 손비호의 군대를 쳐부순다. 그런데 앵앵의 모친은 애초 했던 약속과 달리 장생과 앵앵을 오누이로 맺어주고, 장생은 낙담을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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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연회자리에서 낙담한 장생

 

위 그림 왼쪽에 장생은 술에 흠뻑 취해 홍낭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고 있다. 어깨가 바닥으로 내려앉을 듯이 축 쳐진 모습이다.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앵앵의 모친이라면, 두 사람을 맺어주는 중개자는 앵앵의 시종 홍낭이다. 이제 홍낭이 나설 때가 된 것이다. 앵앵 모친의 변심에 화가 난 마음을 억누르고 돌아온 장생에게 홍낭이 살짝 귀띔을 해준다. 앵앵 아가씨가 거문고를 좋아하니 아가씨가 밤에 분향하는 틈을 타 거문고 연주를 하라고. 장생은 그 말대로 하고 앵앵은 분향하러 나왔다가 거문고 소리를 듣고서 장생이 있는 방의 창가로 다가가 몰래 연주를 듣는다.

 

하지만 거문고 연주를 들려준 후에도 앵앵과 장생의 연애전선에는 진전이 없고, 장생은 결국 상사병에 걸려 앓아눕고 만다. 앵앵은 장생이 병이 났다는 소식에 홍낭을 보내 병세를 묻는데, 종일을 기다려도 홍낭의 보고가 없자 앵앵은 지쳐서 잠이 들고 만다. 한편, 홍낭은 장생에게 문병하러 갔다가 편지를 전해달라는 장생의 간곡한 청을 수락한다. 홍낭은 장생의 편지를 가지고 앵앵의 방에 들어왔다가 마침 그녀가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몰래 편지를 화장대 위에 두고 앵앵의 눈치를 살핀다. 앵앵은 장생에 대한 그리움에 힘이 쭉 빠져 늘어져 있다가 그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하고는 기운이 살아나 편지를 읽고 또 읽는다. 그런데 앵앵은 편지를 읽다 말고 갑자기 홍낭을 불러 놓고 안색까지 붉히며 화를 낸다. “못된 계집아, 이 물건은 어디서 가지고 온 것이냐? 나는 재상의 딸인데, 누가 감히 이런 편지를 가지고 나를 희롱한단 말이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편지를 읽고 또 읽더니만 금세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앵앵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일단 편지를 읽으면서는 황홀한 기분에 젖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생각해보니 이 편지가 여기에 있는 이유는 홍낭이 가져다 놨기 때문일 것이라는 데 생각이 닿은 것이다. 그래서 편지를 읽다말고 홍낭을 불러 화를 낸 것이다.

 

이처럼 장생을 좋아하지만 홍낭 앞에서는 내숭을 떠는 앵앵의 심리는 「서상기」에서 놓치지 않고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예전의 독자들도 이 장면을 꽤 좋아했는지, 장생의 편지를 읽으며 좋아하는 앵앵과 이를 훔쳐보는 홍낭이라는 테마는 많은 그림에서 보이고, 화가들은 특히 이 장면을 어떻게 하면 더 잘 표현할까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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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3. 앵앵을 엿보는 홍낭


위 그림에서도 역시 홍낭이 병풍 뒤에서 앵앵을 훔쳐보고 있다. 화려한 병풍의 묘사가 특히 인상적인 이 그림은 송대의 유명 화가인 진홍수가 그린 것으로 서상기 삽화 중에서도 작품성이 뛰어난 삽화로 꼽힌다. 병풍 속에 오른쪽부터 순서대로 계절 별로 화려하게 핀 꽃과 나무를 그렸는데, 이는 사랑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찬 앵앵의 심리를 말이 아닌 그림으로 대변하고 있다. 맨 오른쪽 병풍 화폭에는 역시 커다란 나비 한 쌍이 보인다.

 

2. 천고의 수수께끼 - 앵앵의 돌변

 

한편, 앵앵은 장생에게 정성껏 답장을 쓴다. 답장의 말투는 화를 내던 때와는 딴판이고, 짧은 시구의 뜻이 은근하다. “서상 아래에서 달님을 기다리며, 바람을 맞아 문을 반쯤 열어두리. 담장 너머로 꽃 그림자가 움직이니, 아마도 그이가 오시나보다앵앵의 편지를 받은 장생은 수수께끼 같은 이 시를 단번에 풀이해 홍낭에게 말한다. “‘서상 아래에서 달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나더러 달이 떴을 때 오라는 것이고, ‘바람을 맞아 문을 반쯤 열어두리라는 말은 그녀가 문을 열어두고 나를 기다리겠다는 것이며, ‘담장 너머로 꽃 그림자가 움직이니, 아마도 그이가 오시나보다는 나더러 담을 넘어서 오라는 것입니다.” 장생은 홍낭과 말을 맞춰놓고 그날 밤 앵앵을 만나기 위해 그녀와 자신의 거처 사이에 있는 담장을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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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담장을 넘는 장생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장생을 발견한 앵앵의 반응은 예상과는 달리 싸늘하기만 하다.

 

앵앵: 홍낭아, 도둑 들었다!

홍낭: 누구냐?

장생: 소생입니다.

홍낭: 장생, 당신은 여기서 무슨 짓이오?

앵앵: 어머니 계신 곳으로 끌고 가라!

홍낭: 마님 계신 곳으로 가면, 그의 품행을 훼손할까 걱정됩니다. 제가 대신 그를 한바탕 심문할게요. 장생, 당신은 이리 오시오.

(장생이 무릎을 꿇는다.)

홍낭: 무릎 꿇으시오! 당신은 공자의 책을 읽었으니, 분명 예의를 잘 아실 텐데, 깊은 밤에 이곳에 와서 뭐 하는 짓이요?

앵앵의 돌변에 방에 돌아온 장생은 상사병에 걸려 급기야 앓아 누워버린다. 앵앵은 이번엔 약 처방이라며 홍낭을 속여 장생에게 밀회를 약속하는 편지를 보내고, 약속한 날 밤 장생의 방에 찾아가 사랑을 나눈다. 한 달 넘게 계속된 그들의 밀회는 결국 들통이 나는데. 뒤의 이야기는 작품의 번역본을 읽어보실 것을 권한다.

 

3. 「서상기」19?

 

장생은 스물 셋, 앵앵은 열아홉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에 비하면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 두 사람은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혼인을 맺기 전에 함께 여러 번 밤을 보냈다. 게다가 앵앵의 부친은 생전에 앵앵을 정항(鄭恒)과 맺어준 상태이다. 정항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앵앵 모친의 조카이다. 두 사람의 밀애를 알게 된 앵앵 모친의 입장에서는 집안 체면이 무너진 것은 당연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서상기」의 작자는 이 청춘남녀의 편이었다. 결국엔 두 사람을 부부로 맺어준 것이다. 이 정도면 음서라고 할 만할까?

 

지금은 몰라도 옛날 사람들이 보기에 「서상기」는 음서라는 말을 듣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야합한 남녀가 정혼 관계를 파기하면서까지 정식 혼인을 맺게 된다는 내용은 봉건예교를 숭상했던 상층 사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서상기」의 제4본 제1절에서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성행위 묘사가 등장한다. 따라서 공적인 자리에서 「서상기」는 금기시될 수밖에 없었고, 청대에는 「서상기」가 여러 차례 금서로 지정되었다. 조선에서도 역시 「서상기」회음(誨淫)’, 즉 음란함을 가르치는 책이라 하여 점잖은 사대부들은 「서상기」를 비난하는 일이 많았고, 「서상기」 애호가라도 공개적으로 이를 언급하는 것은 꺼렸다.

 

이러한 음란성 논란에도 불구하고 역대로 쏟아져 나온 「서상기」에 대한 찬사는 많다. 조선의 한 애독자의 감상을 들어보면 「서상기」사건 서술이 매우 자세하고, 노래 가사는 맑기 그지없어, 다정한 남자가 아름다운 장면을 보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하늘만큼 땅만큼 즐겁게 된다.(敍事詳盡, 綴詞淸絶, 能使多情男兒, 看到佳境, 則不覺歡天喜地.)”고 했다. 지난 수백 년 동안 수많은 독자들을 하늘만큼 땅만큼즐겁게 해준 사랑 이야기에 한번쯤 빠져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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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5 장생과 홍낭, 그리고 둘을 훔쳐보는 두 스님. 두 스님이 바로 관객이고, 독자다



 누워서 읽는 중국 고전 4




윤지양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1.서울대 도서관 소장 「수상제육재자서(繡像第六才子書)」

그림2. 서울대 도서관 소장 「수상제육재자서(繡像第六才子書)」 

그림3. 우홍(巫鴻), 「그림 속의 그림: 중국화의 매체와 표현」, 서울: 이산, 1999, 275.

그림4.  徐小蛮王福康, 「中國古代揷圖史」, 上海古籍出版社, 2008, 176.

그림5.  徐小蛮王福康, 「中國古代揷圖史」, 上海古籍出版社, 2008,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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