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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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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호
베트남화교·화인의 ‘친일’ 활동,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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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완의 학자 리잉후이(李盈慧)는 그의 저서 抗日與附日(항일과 부일)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 각국 및 각 지역 거주 화교·화인의 항일과 친일의 정도를 분석했다. 항일의 정도가 강한 지역에서 약한 지역의 순서를, 필리핀말레이시아미얀마인도네시아홍콩마카오불령인도차이나태국의 순으로 나열했다. 그의 주장대로 하면 베트남화교·화인은 항일보다는 친일의 정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편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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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베트남화교의 지도자 장쩐판이 주석으로 있던 쩌런의 남기중화총상회 건물

 

베트남화교·화인 가운데 최고의 친일인사로 손꼽히는 인물은 장쩐판(張振帆)이었다. 그는 1882년 베트남에서 태어나, 베트남화교경제의 중심인 쩌런에서 가장 유력한 화상이었다. 미곡수출상으로서 정미공장을 3개나 경영하고 있었다. 푸젠성 출신 화교들의 동향회관의 회장인 푸젠방장(福建幇長)이자 각 동향회의 연합단체인 칠부공소(七府公所)의 주석 자리에 있었다. 동시에 1938년부터 1939년까지 월남중화총상회(越南中華總商會)의 회장, 불인상업회의소(佛印商業會議所) 산하 미곡거래소의 주석을 맡았다. 일본군이 19275월 제1차 산둥출병을 하자 조국에 50만원의 구국헌금을 보냈다. 장제스는 그의 구국헌금에 대해 상인이 울분을 토하면서 보낸 의연금은 어려움에 처한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왔다. 기쁘기 그지없다. 그 공을 칭찬하고 격려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중일전쟁 직후인 193781일 조직된 베트남 남부지역의 항일단체 월남남기화교구국총회의 회장에 취임했다. 장제스 충칭국민정부는 1938년 그를 국민참정회의의 참정원으로 임명했다. 프랑스 식민정부가 항일운동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면서 19405월 월남남기화교구국총회를 해산하자, 19415월 중순 쩌런을 떠나 차오저우방장(潮州幇長)인 쭈지싱(朱繼興)과 광둥방장(廣東幇長)인 류쩡(劉增)과 함께 홍콩으로 피신했다.

 

1941년 사이공에 들어가는 일본군.jpg

    사진 2. 1941년 사이공에 진주한 일본군

 

그런 그가 1942818일자 타이완일일신문에 게재된 그의 발언은 상당히 충격적이다. “내가 왕징웨이국민정부 측에 서려고 결의한 것은 훨씬 이전부터였지만, 사방의 정세가 이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때문에 최근 마카오 방면에서 줄곧 정세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일본군의 불인진주(佛印進駐)에 의해 항일 화교의 모습도 사라졌고, 불인군 당국의 대 화교 태도도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나는 참정원이었지만 충칭의 정치에 한 번도 참가한 적이 없고, 참정원이라는 이름은 공수표에 지나지 않습니다. 작년 12월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일본이 南方동남아에서 큰 승리를 거둔 것을 듣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불인 거주 50만 화교를 규합하여 주석 옹호의 전보를 보냈습니다. 현재 국민정부에 대한 연락이 불충분해 송금 등의 구체적 원조를 할 수 없지만, 빨리 연락을 취해 원조운동을 개시하려고 합니다. 다행히 나는 정미공장 3개를 가지고 있고, 또한 무역업을 겸하고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해상교통이 복구되어, 일본 및 신중국 측과 무역을 하고 싶습니다. 현재 우리들이 가장 바라는 바는 프랑스 및 불인이 빨리 국민정부를 승인해 주는 것이다. 우리들은 이렇게 국민정부 지지를 성명하고 있지만, 프랑스 당국이 승인하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운동하기 어려운 상태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성명 등에 대해 불인 당국은 하등의 간섭도 하지 않고, 오히려 호의적인 태도조차 엿볼 수 있었습니다. 남방 화교의 규합 등에 대해서는 아직 고려하고 있지 않지만, 남방 화교가 하나가 되어 대일협력에, 주석 옹호에 몸을 바칠 날도 멀지 않을 것입니다.”


장쩐판의 발언은 충칭국민정부를 이탈하여 19403월 성립된 왕징웨이 남경국민정부 측 지지로 돌아선 것을 선언하고, 동 정부를 위한 각종 원조활동을 전개하려 한다는 계획을 밝힌 것이다. 그의 주도로 1943117일에 남기화교참전후원회가 조직되고, 회장을 맡았다. 이 후원회는 코친차이나 지역 화교의 각종 친일활동을 지원하는 핵심적인 기구였다. 이 후원회는 설립된 직후에 장제스 충칭국민정부 앞으로 우리들은 대동아공영권 구현을 위해 일본군에 협력하고 있으며, 속히 배신의 무리의 주구 짓을 그만두고, 중화를 위태로운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라는 전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베트남화교·화인의 항일의 상징이었던 장쩐판이 어떤 경위로 친일인사로 돌아선 것일까. 먼저 왕징웨이 남경국민정부 교무위원회의 불령인도차이나 특파원인 말레이시아화교 출신인 장영푸(張永福)가 장쩐판에게 편지를 보내, 가족의 안전과 재산의 보호를 약속하면서 설득한 것을 들 수 있다. 장쩐판의 재산은 쩌런에 거의 대부분 있었기 때문에 해외에서 마냥 체류할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었다. 당시는 일본이 파죽지세로 동남아 각지를 점령하고, 중일전쟁의 전세도 일본군에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친일괴뢰정권이기는 하지만 왕징웨이 남경국민정부가 19403월 들어선 것도 컸다. 장쩐판이 쩌런으로 되돌아 온 것은 홍콩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후인 1942년 봄이었다.

 

일본측도 베트남화교를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장쩐판 귀국 공작을 편 것도 작용했다. 그러나 베트남화교·화인사회의 내부 구성에서도 그 원인을 찾아볼 수도 있다. 17세기에 베트남으로 이주한 중국인의 후손인 명향(明鄕)과 중국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태어나 현지화 된 교생(僑生)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중국에 대한 관심과 애국심이 중국 태생의 화교에 비해 일반적으로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는데, 장쩐판 자신도 그러한 교생의 한 명이었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불령인도차이나는 19443월 일본군이 완전히 점령하기 전까지 다른 동남아지역과 달리 프랑스 식민당국과 공동통치를 했다는 점이다. 일본 측은 미곡 확보를 위해 상업을 장악하고 있던 화교·화인을 자신들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는데, 이러한 배경이 화교·화인의 친일활동을 조장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이러한 사정을 감안하지 않고 그냥 항일과 친일의 정도를 단순화시켜 순서를 매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2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부교수

 

                                          


 

*참고문헌

李盈慧, 抗日與附日, 水牛出版社, 2003

ヴォミンヴ(VO MINH VU), 第二次世界大戰期佛領インドシナにおける日本華僑政策, 東京大學大學院總合文化硏究科博士學位論文, 2014

立川京一, 第二次世界大戰とフランスインドシナ, 彩流社, 2000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越南華僑之領袖, 圖畫時報, 1926年 第3102

사진 2.  https://ja.wikipedia.org/wiki/佛印進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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