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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11월호
접경자산을 활용한 대만 진먼다오의 평화 명소화 _ 김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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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먼다오의 무망재거(毋忘在莒)’ 정신

 

국공내전에서 패색이 짙던 194910월 말, 장제스(蔣介石)에게 진먼다오(金門島)로부터 승전보가 날라 왔다. 101일 마오쩌둥(毛澤東)이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을 공표하며 사실상의 내전 승리를 공언한 상황이었다. 1017일에는 진먼다오 바로 코앞의 샤먼(廈門)마저 함락됐다.

 

타이완으로 퇴각하던 국민당은 중공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진먼다오에 군화력을 집중시켰다. 동남아 전장에서 진지전 경험이 풍부한 일본군 장군을 고문으로 삼아 진먼의 해변에 참호를 깊게 파고 만반의 태세를 갖췄다. 1025일 새벽을 기해 중공군 4개 사단 28천명이 진먼의 구링터우(古寧頭)로 상륙을 감행했다. 연이은 승리에 도취해 충분한 준비없이 진먼을 공격했던 중공군은 3일 간의 전투에서 수많은 전사자를 내고 퇴로가 끊긴 5000여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참패를 당했다.

 

비록 구링터우 전투를 통해 국공내전의 승패가 바뀌지는 않았다. 하지만 국민당은 파죽지세의 중공 공세를 꺾고 연이은 패배로 바닥에 떨어진 군의 사기를 추스를 수 있었다. 진먼다오 구링터우 전투는 절제절명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승리로 기록되었고, 대만 국민들의 단결과 안보의식을 북돋아주는 역사의 상징이 됐다.1)

 

1952년 몸소 진먼다오를 방문해 군장병을 위문한 장제스는 붓을 들어 무망재거(毋忘在莒)’의 휘호를 남기고 타이완 본섬으로 돌아갔다.

 

전국시대 연나라의 공격으로 나라 대부분을 빼앗긴 제나라가 유일하게 남은 거()성을 기반으로 힘을 길러 국토를 회복하게 되었다는 고사에서 연원한 무망재거’. 권토중래의 거점에 있음을 잊지 말라는 이 글귀는 중국 대륙을 수복하기 위한 최전방으로서 진먼이 가져야 할 사명이자 의무가 됐다.

 

무망재거네 글자는 진먼의 정신으로서 섬에서 가장 높은 타이우산(太武山)의 암벽에 붉은 글씨로 새겨졌다. 같은 해 무망재거의 뜻을 담은 3층 높이의 쥐광러우(莒光樓)가 진먼의 랜드마크로서 섬 중심의 언덕 위에 세워졌다.2)

 

2. 승리의 기억과 반공·안보 이념의 교육장

 

대만정부는 1984년 구링터우기념관 준공을 시작으로 823포격전과 소진먼도의 후징터우(湖井頭) 전투 등을 기리는 전쟁역사관을 차례로 개관했다. 그러나 이 때는 양안 간 군사 대치가 누그러지고 세계적으로 탈냉전 분위기가 무르익던 무렵이었다.3)

 

중국은 1979년 미국과 수교를 맺은 직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명의의 대만동포에게 보내는 서신(告臺灣同胞書)’를 발표, 양안 간의 군사대결의 종결 논의, 양안 삼통(三通) 및 양안교류 확대를 전격적으로 제안했다. 대만정부는 이 같은 중국의 화해 제스처를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중국과 타협·접촉·담판을 하지 않는 기존의 3(三不)원칙을 재차 강조했다.

 

미중 수교에 연이은 미국-대만의 단교, 갈수록 커지는 국내의 민주화 요구 등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한 대만 당국은 반공안보 의식의 고취를 통해 이 위기를 돌파하고자 했다. 대만은 중국이 주장하는 평화는 새로운 통일전선 술책에 불과하고 이럴 때일수록 전 국민이 경계를 강화하고 단결해야 한다고 여겼다. 대만의 국시(國是)삼민주의(三民主義)’ 통일 방안이 제창되었다.4)

 

이 같은 분위기에서 진먼의 구링터우기념관 등 여러 전쟁기념관이 세워져 반공안보 교육시설로 활용되었다. 대만 당국은 전쟁기념관 설립을 통해 접경인 진먼이 가진 전쟁과 충돌의 장소성, 그리고 승리의 기억을 끄집어내고 집성(集成)하여, 국민들의 반공안보 의식을 다시 북돋아 자신들의 권위주의적 통치체제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이미 탈냉전이 시작되었지만 진먼은 여전히 승전과 반공·안보 이념의 교육장으로서의 역할을 부여 받았다.

 

3. 탈냉전과 전장자산의 활용

 

이 같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탈냉전과 변화의 바람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대만정부의 3불 조치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개혁개방이 심화됨에 따라 홍콩을 통한 대만자본의 중국 간접투자 등 양안간의 경제·사회교류가 물밑에서 점차 확대되었다.

 

또한 중국의 군사위협을 빌미로 지속되던 계엄령의 해제와 정치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만 내부의 사회적 요구가 점차 거세어졌다. 결국 1987년 타이완 본섬에 이어 1992년 진먼도 역시 계엄령이 철폐되고 대만의 헌정 체제가 수립되었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진먼 역시 군축이 시작되고 10만 명에 달했던 군인을 상대로 한 서비스업으로 먹고살았던 지역경제의 근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먼 당국은 급변하는 여건에서, 전장으로서 갖고 있는 지역자산을 활용한 명소화를 통해 활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5)

 

지방정부는 구링터우 등의 유명 전장, 철군으로 인한 유휴 군 시설을 정비하여 전쟁관광지로 개발했다. 흉물스럽게 방치되었던 해변의 용치와 보루 등의 군사시설은 접경지가 갖는 충돌과 폭력의 특징을 담은 장소로 재조성되었다. 반공교육을 위해 1980년대 건립된 전쟁역사기념관은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리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4. 접경자산을 활용한 평화공간의 조성

 

2000년대 들어 양안교류가 확대되고 진먼을 찾는 중국관광객이 늘어나면서, 진먼 지방정부는 단순 전장관광지를 넘어 반전과 평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관광인프라를 정비하기 시작했다.6)

 

중국의 샤먼과 가장 가까웠던 탓에 지뢰 집중 매설지대였던 소진먼다오(小金門島) 해변가의 진지는 지뢰전시관으로 조성, 2001년 민간에 개방됐다. 한번 묻히면 군인과 민간인,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않는 가장 비인도적인 무기 가운데 하나인 지뢰. 지뢰전시관은 각종 전시물과 체험시설을 통해 방문객에게 지뢰의 폭력성과 반전·평화의 가치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7)

 

중국의 포격을 피해 안전하게 인력과 보급품을 운송하기 위해 단단한 화강암을 뚫어 만든 해저터널이 역시 2001년 민간에 개방됐다. 진먼 당국은 이 해저터널에 배를 띄워 작은 음악 공연을 개최하고, 터널 내부의 지질을 활용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 문화·교육 등의 다목적 활용에 주안점을 두었다.8)

 

진먼은 전쟁 유산을 활용한 지역 특산품개발과 마케팅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군인 보급을 위해 재래식 공법으로 제조한 진먼고량주는 지역을 대표하는 특산품이 됐다. 또한 중국이 1979년까지 진먼에 퍼부었던 폭탄의 잔해를 재료로 삼아 수작업으로 만든 식칼 역시 대표적 기념품으로 손꼽힌다.9)

 

구링터우 전역 60주년을 기념하여 2009년 평화기념광장이 건립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평화기념광장은 대만의 승전을 기념하고 반공·안보 이념을 고취하는 목적으로 건립된 구링터우전쟁역사관 입구에 조성됐다.

 

전쟁터이자 최전방 군사요새였던 진먼다오는 충돌과 폭력의 장소성을 품고 있다. 이 같은 진먼의 장소성은 양안 대치 시기에는 승전의 기억을 확산하고 반공이념을 교육하는 데 쓰였다면, 지금은 반전과 평화를 체험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접경이었던 진먼은 칼을 쳐서 보습(쟁기날), 창을 녹여 낫을 만드는구약 성경의 구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는 평화의 섬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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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진먼다오 군용해저터널의 전시장 및 지질교육장 활용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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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진먼다오 군용해저터널의 전시장 및 지질교육장 활용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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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소진먼다오 지뢰전시관 내부 전시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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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소진먼다오 지뢰전시관 내부 전시물



김수한 _ 인천연구원


                                       


1) 구링터우 전역 및 그 역사 상징에 대해서는 Michael Szonyi (2008::15-24) 참고.

2) 양안대치 초기 쥐광러우 및 무방재거 암벽 등 랜드마크 조성에 대해서는 金門縣政府(2014:402-403) 참고

3) 진먼다오의 전쟁박물관 개관 및 그 의미에 대해서는 金門縣政府(2014:416-417) 참고

4) 1980년대 대만의 양안정책 내용은 蔡東傑 (2018:80-81) 참고

5) 접경자산을 활용한 진먼다오의 평화지향의 장소마케팅에 대한 내용은 김수한(2020) 참고 

6) 탈냉전기 진먼다오의 관광정책 및 주요 성과에 대한 종합적인 내용은 張梨慧(2017) 참고

7) 지뢰전시관 형성에 대해서는 우쥔팡·정근식(2016) 참고

8) 현지 조사 및 관계자 인터뷰 (2020.6.15)

9) 냉전산업으로서의 고량주 경제의 형성과 해체는 박배균·김민환(2016)참고.


* 참고문헌


김수한(2020), “탈냉전기 대만 진먼다오의 평화지향의 장소마케팅:역사맥락 및 시사점”, 중국정치연구회 발표문(미발간)

박배균·김민환(2016), “냉전산업으로서의 고량주 경제의 형성과 변화”, 정근식·김민환 편 , 냉전의 섬, 금문도의 재탄생(서울:진인진)

정근식·우쥔팡(2016), “탈냉전과 민주화의 이중적 전환”, 정근식·김민환 편,냉전의 섬, 금문도의 재탄생(서울:진인진)

Michael Szonyi (2008), Cold War Island: Quemoy on the Front Line, (Cambridge:Cambridge Univ)

蔡東杰 (2017),圖解: 兩岸關係,(臺北:五南出版社)

李任德(2014), “近百年來金僑的成就與貢獻”, 金門縣政府,世紀的金門百年冠慧,金門建縣百年紀念(台北;國家書店)

張梨慧(2017),”觀光旅遊”, 陳奇中編,金門學概論(台北;東華書局)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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