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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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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탄카키와 천지아겅 – 제국민과 국민사이 호키엔 정체성 (1)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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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동남아시아 화교화인사에서 탄카키(Tan Kah Kee, 陳嘉庚)의 존재는 매우 특별하고 화교화인연구의 다양한 요소들을 상징하고 있다. 그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등 지역에서 고무사업으로 거부가 된 대표적 기업가이기도 하고, 쑨원을 정치적으로 수없이 후원한 대표적 중화 내셔널리즘의 경제적 지원자이기도 하며, 중일전쟁기 동남아시아 화교화인들의 고국원조를 체계적으로 조직함으로써 지금도 대표적 애국화교로 칭송되는 인물이다. 그의 활동 가운데 가장 흥미롭고도 지금까지도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동남아시아 전체 화교화인들에게 존경을 받던 그가 19505월 돌연 싱가포르를 떠나 푸젠성 샤먼(廈門)에 정착해버린 사건이다. 게다가 그는 1961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근거지인 동남아시아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대륙행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친공(親共)’활동을 활발히 해온 그가 애국화교로서 신중국 건설에 기여하겠다는 의지로 떠났다는 설도 있고, 당시 그의 친공활동에 대해 부정적이던 영국 식민정부의 통제와 국민당 및 미국의 영향아래 있던 화교화인 단체의 압력에 못 이겨 떠났다는 의견도 있다. 여기에는 현재 학자들 사이에도 일치된 의견이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해 보인다. 그가 대륙행을 하고 그의 근거지인 동남아로 돌아오지 못한 사실은 그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 초 아시아에 독립과 국민국가 형성의 바람이 불어오던 시기 이주민으로서 그의 정체성이 제국민에서 국민으로 전환되어야만 했던 시대적 배경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탄카키는 1874년 중국 푸젠(福建)성 통안(同安)(지금의 샤먼廈門)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그의 아버지는 싱가포르에 거주하면서 사업으로 돈을 벌어 고향의 탄()씨 가족 및 클랜들을 먹여 살리고 있었다고 한다. 탄카키 역시 그렇게 아버지가 벌어서 보내주는 송금으로 16세까지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17세에는 싱가포르로 건너가 아버지가 운영하는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게 되면서 비즈니스의 세계에 입문하였다. 사실 동남아시아 화교화인들의 사업장에서 이런 식으로 인력을 수급하는 것은 매우 전형적인 형식이었다. 돈을 좀 벌었다는 화교화인들은 그들의 고향에 크든 작든 교육기관을 설립하였고, 그들의 자식, 혹은 클랜의 젊은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해 주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한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젊은이들을 그들의 사업장으로 불러들임으로써 인력을 수급하는 형식이다. 이런 식의 혈연, 지연에 기반한 동향조직의 네트워크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끌어들이는 데에 매우 효과적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매우 일상적이었다. 이렇게 형성된 초국적 네트워크는 사실 당시 화교화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배경이었던 지라 그들은 지금과 같은 국민국가적 경계인식보다는 다양한 공동체를 품고 있는 초국가적/제국적 경계인식을 가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탄카키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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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탄카키의 아버지인 탄키펙(Tan Kee Pek)과 탄카키의 어린 시절

 

탄카키의 아버지는 싱가포르에서 순안(Soon Ann順安)’이라는 미곡상을 운영하고 있었다. 해당 미곡상은 시암(Siam 지금의 태국), 안남(Annam 프랑스령 중부 베트남), 랑군(Rangoon 영국령 버마의 거대도시)으로부터 쌀을 수입하여 싱가포르 및 주변 해양부 동남아시아 항구도시로 판매하는 중개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미곡으로 해양부 동남아시아 주요 항구도시의 식량을 공급하는 형식의 동남아시아 역내무역은 매우 오래된 형식의 무역으로 늦어도 17세기부터 존재했는데, 19세기 전후한 시기에 와서는 이 시장을 중국인들이 장악하게 된다. 순안미곡상은 탄카키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사업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푸젠계 탄씨 클랜에서 운용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 미곡상의 운영은 같은 클랜원으로 탄카키에게는 삼촌뻘에 해당하는 인물이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미곡상을 기반으로 다른 사업적 기회를 모색하고 있었다.


탄카키가 18세가 되던 시기 순안미곡상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되는데, 설상가상 매니저 역할을 하던 삼촌마저 병을 얻어 귀향하게 되면서 그 역할을 탄카키가 맡게 되었다. 때마침 그 해에 탄카키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파인애플 교역사업과 부동산 사업으로부터 이익이 나기 시작했다. 아울러 탄카키의 사업적 역량으로 순안미곡상 역시 어느 정도 안정권에 접어들게 되었다. 이후 26살까지 사업을 운영하다가 어머니의 사망을 계기로 샤먼에 돌아갔다가 다시 싱가포르로 돌아오게 되는데, 어떠한 심경의 변화가 있었던지, 혹은 기존 순안미곡상 및 아버지의 사업이 거의 다 망해가던 이유였던지 모르겠지만 남은 자본금을 밑천으로 새로운 자신만의 사업을 진행하였다. 바로 200헥타르에 달하는 파인애플 농원을 개척하여 운영한 것이다. 20세기 전후한 시기 파인애플 농원 사업은 일종의 호황이었는데, 왜냐하면 당시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인도네시아 등에서 대량으로 채굴되는 주석으로 제작한 통조림이 개발되어 유행하게 된 것이다. 탄카키 역시 통조림 공장을 설립하여 장기보관이 가능한 파인애플 통조림을 판매하면서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어 1905년 그를 거부로 만들어 주는 고무농장을 경영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고무산업은 유례없는 활황을 맞게 되는데, 흥미로운 사실은 고무는 원래 동남아시아가 원산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무는 원래 브라질이 원산이었고, 1870년 영국에 의해 처음으로 보르네오섬과 말레이반도에 이식되었다가 이후 1880년대 수마트라, 태국, 베트남, 캄보디아 등으로 전파되었다. 1900년대 고무산업이 활황을 맞게 되는 것은 자전거가 일상적으로 보급되고, 개인 자동차가 상용화되면서부터다. 게다가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고무 타이어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면서 고무를 대량으로 심고 있었던 동남아시아의 고무산업은 주요 산업으로 거듭나게 되는데, 1950년까지 전 세계 고무 생산량의 75%가 동남아시아로부터 생산되었다. 이러한 바람을 타고 탄카키의 고무사업 역시 급성장하였다. 1926년에는 종업원 6천여 명, 경영하고 있던 농장 면적만 16천 헥타르에 달했다. 그가 세운 ‘Tan Kah Kee Corporation’은 전 세계에 80여개 소의 지점을 설치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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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서구의 식민제국이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의 내륙을 점령하여 천연자원과 상품작물의 강제경작 및 착취에 몰두하면서 동남아시아의 농업시장은 본격적으로 세계시장에 링크되기 시작한다. 동남아시아 특유의 열대기후는 역내의 자원들이 세계시장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도록 해주었는데, 1950년까지 전 세계 쌀과 주석의 50%, 고무 75%, 팜오일 25%, 코코넛오일 75%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물론 그 수출의 과실은 철저하게 일부 현지 엘리트 계층과 화상 그룹, 식민지 본국에 돌아가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철저히 식민체제다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은 고무나무에서 수액을 채취하는 장면과 현재에도 여전히 전 세계 명품화장품의 원재료로 서구 다국적 기업들의 천연자원 시장으로 기능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지역의 팜오일 농장이다.

 

고무사업의 성공으로 그는 말레이,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거부로 성장하였고, 동남아시아의 고무왕’, 말레이시아의 헨리 포드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고무사업은 1930년대에 들어서면 현저한 하락세를 겪게 되는데, 첫째로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전 세계적으로 고무가격이 하락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일본의 상사들이 자체적으로 대량 제작한 고무제품을 가지고 동남아시아로 진출했기 때문이다. 기존 화교화인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던 고무산업에 강력한 경쟁자가 생긴 것이다. 화교화인 기업가들을 연구하는 저명한 역사학자인 쿼훼이잉(Kuo Huai Ying)의 연구에 따르면, 이와 같은 사업적 정체를 맞는 시기에 공교롭게도 탄카키가 중국 본국과의 정치적 관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물론 탄카키는 사업이 활황이었을 때에도 그의 고향인 푸젠 및 샤먼과의 관계를 매개로 중국 본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온 측면은 있다. 실제 그는 쑨원의 열렬한 지지자였고, 그의 사후에도 본국에 원조하기 위한 활동을 해 온 대표적 애국화교였다. 그럼에도 그는 1930년대에 본국에 대해 보다 적극적 개입 및 관계 맺기를 마다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상업적 이익을 노린 측면도 있다는 것이고, 충분히 설득력 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본 연재에서는 그러한 측면보다 제국민으로서 광대한 초국적 상업 네트워크를 통해 성장한 탄카키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이 시작되고, 중국이 공산화하면서 이러한 제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시기를 겪게 되는 과정을 그의 친공산당 활동 이면에 숨겨진 의미와 더불어 살펴볼 예정이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3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1. 탄키펙(Tan Kee Pek)과 탄카키

C.F.Yong, Tan Kah Kee The Making of an Overseas Chinese Legend -, Singapore: World Scientific, 2014

그림 2. 팜오일농장

https://en.wikipedia.org/wiki/Agriculture_in_Malay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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