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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월호
프리부미, 토톡, 페라나칸 – 푸젠의 발리촌 (1)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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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젠성(福建省) 취안저우시(泉州市)의 한 마을, 이른 아침부터 한 무리의 노인들이 둘러앉아 마작을 하고 있다. 옹기종기 모여 농담하는 와중에 담배를 피며 돈을 거는 풍경이 여느 중국인 마을과 다를 바 없다. 중국인 노인들이 서로 발리어(Balinese)로 대화한다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얼마 전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에 보도된 푸젠성 발리촌의 일상풍경이다(20191116일 보도). 정식 행정명칭은 ‘남산사구 인도네시아합리촌(南山社區 印尼峇厘村)’, 주민들의 경우 ‘Kampung Bali Nansan’으로 부르는 이 마을은 1959년 수만 명의 인도네시아 거주 화교화인들이 공산화된 중국으로 도망치듯 돌아왔을 때 섞여 들어온 발리 거주 화교화인들을 위해 마련된 구역으로 현재는 1세대 귀환화교들과 그들의 2세대, 3세대 자손들이 모여살고 있다. ‘깜풍(Kampung)’은 말레이·인도네시아어로 마을을 가리킨다. , 2019년 현재 푸젠성 취안저우 난샨구에는 발리출신 화교화인들이 모여살고 있는 것이다. 이 발리마을의 형성배경은 수백 년의 네덜란드 식민과 잠깐의 일본 식민을 거쳐 독립한 신생 독립국 인도네시아의 원주민과 그들을 대리착취해 온 화인공동체 사이의 불편한 관계가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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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푸젠성 취안저우에 위치한 발리촌의 입구. 발리라는 지역의 특색을 드러내는 입구 구조물의 장식이 독특하다.

 

어느 지역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식민의 핵심은 착취와 기회의 박탈이다. 식민, 혹은 반식민을 겪었던 동북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처럼 동남아시아 역시 태국을 제외하고는 모든 국가가 완전한 식민을 경험했다. 차이점은 19세기 중후반, 혹은 20세기 초에 시작되는 동북아시아의 식민과는 달리 동남아시아의 식민은 빠르면 16세기, 늦어도 19세기 초에는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동남아시아의 식민은 족히 수백 년의 긴 역사적 과정으로 2차대전 이후 동남아시아 각 국가들이 독립한 이후에도 그 유산은 여전히 남아있다. 이는 21세기인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서구 제국의 동남아시아 식민지 건설의 가장 중요한 효과는 동남아 지역을 서구 주도의 유럽시장과 연결시켰다는 것과 유럽의 선진적 사상과 기술문명을 식민지역에 전파시켰다는 것 등이지만, 이러한 서구중심주의적 인식은 그동안 꾸준히 비판받아왔다. 각각 런던, 파리, 암스테르담, 마드리드 등에서 결정된 식민지 건설과 그 정책이라는 것이 사실은 현지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유럽인들의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통치와 착취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식민지라는 것은 식민주의자들을 위해 식민주의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대표적으로 서구 식민에 의해 동남아시아의 시장이 세계시장에 링크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인식의 경우 사실 동남아시아 문명은 그동안 세계시장에 링크되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이미 기원전 · 후부터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시장이었던 인도와 중국의 문명을 중개하면서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연결하고 있었고, 7-8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상품들이 유럽을 포함한 전 세계로 퍼지고 있었다. 족히 천 수백 년에 달하는 기간동안 세계시장에 링크되어 상업을 나름대로 발달시키고 있던 동남아시아 지역이 마치 유럽인들을 통해 처음으로 세계시장으로 등장했다고 인식하는 것은 부적절할 것이다. 다만 이렇게 평가할 수는 있다. 양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이전 시기와는 다른 규모의 동남아 생산품이 세계시장으로 수출된 계기가 바로 서구 식민시기라는 점이다. 여기에는 당시 유럽이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대량의 산품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전 주요 귀중품이나 희귀 천연물품을 위주로 무역이 이루어지던 시기와는 양적으로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대량의 물품들이 세계시장으로 진출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1950년까지 전 세계 쌀과 주석의 50%, 고무의 75%, 팜오일의 25%, 코코넛 오일의 75%가 동남아로부터 수출된 것이었다. 20세기에 동남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원을 생산해 내고 수출하던 지역이었다. 즉 양적인 측면에서는 세계시장에서의 비중이 매우 커졌다는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것이 현지의 문명적 역량이나 자체적인 물질문명의 발전에 의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19세기에서 20세기까지의 기간 동안 동남아시아인들은 본인들도 모르게 세계경제에 주요 교역상품의 생산자로서 참여하고 있었지만, 이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 과실을 제대로 축적하여 대자본을 형성한 경우는 없었다. 그 이유는 그 과실을 각 지역의 식민정부가 획득하고 있었고, 무역품은 대부분 매우 싼 가격으로 유럽의 본국으로 옮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 지역, 특히 자바섬 지역에서 행해진 강제경작제도(Cultivation System)’가 있다.

 

강제경작제도1830년 네덜란드 동인도 식민지의 총독인 요하네스(Johannes van den Bosch)에 의해 실시되었다. 이는 자바의 현지인들로 하여금 커피, 사탕수수, 인디고, 후추 등의 상품작물을 강제로 재배하여 판매하도록 한 제도다. 사실 자바는 전통적으로 쌀 재배지역이었고, 쌀이 현지인들의 주요 식량이자 교역품 가운데 하나였다. 그리고 1600년대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진출을 계기로 외래종인 커피와 사탕수수가 소개되어 일부 재배되었지만, 강제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1830년 이후 식민정부가 원하는 농작물을 재배하도록 강제하는 제도가 마련된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자바인들에 의해 재배된 상품작물들이 적절한 시장가격에 의해, 혹은 재배한 자바인들의 수익을 보장해 주는 가격으로 판매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계시장에 한참 못 미치는 가격으로 판매할 것 역시 동시에 강제되었다. 이 생산과 판매의 강제까지가 바로 강제경작제도의 핵심이다.

 

이 제도를 통해 생산된 상품작물들은 그대로 식민지 본국인 네덜란드로 수출되는데, 네덜란드의 입장에서는 예상을 훨씬 웃도는 성과가 발생한다. 자바지역의 수출액이 18301,100만 길더(gulider)에서 18406,600만 길더로 급증하였고, 같은 시기 수출량 역시 3,600만 킬로그램에서 16천만 킬로그램으로 증가하였다. 자바지역의 수출품이 네덜란드 본국으로 향하는 비율 역시 60-80%였다가 1860년대 이후 90%를 넘게 된다. 자바지역이 네덜란드의 1차 산품 생산기지로 종속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강제경작제도는 자바인들을 네덜란드 식민정부에 종속되도록 만들었고, 그들의 생산품을 식민정부가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사들임으로써 그들의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네덜란드 식민정부를 지주로 둔 대량의 농노가 발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대량의 숲과 밀림이 해당 상품작물들을 생산하기 위해 벌목되었고, 낮은 금액으로 작물들을 팔 수밖에 없던 자바의 농노들은 그 수익을 보전하기 위해 더욱 많은 시간을 노동에 투입해야만 했다. 1870년대를 기준으로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이 제도를 외국의 투자자들 및 다른 유럽국가 소유의 대농장에도 개방하여 토지와 노동력, 상품작물의 착취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세기, 20세기에 걸쳐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 등 네덜란드령 동인도(Dutch East Indies)라 불리던 식민지 영역내의 땅과 인력을 열대의 천연작물과 상품작물 등 자원을 공급해 주는 공급자 및 유럽의 대량생산을 뒷받침해주는 공급기지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소수의 친 네덜란드 협력자를 제외한 대부분 자바의 농노들은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 반동으로 네덜란드 점령 이전 자바인들에 의해 헤게모니가 장악되어 있던 과거 시기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한 시인은 이 시기를 암흑시기(Time of Darkness)”라고 칭하기도 하였다. 1900년 네덜란드의 관료는 보고서를 통해 식민정책이 다수의 자바인들을 곤궁에 빠뜨렸다는 점을 시인하기도 했다.

 

이는 자바섬만의 상황은 아니었고, 영국령 말라야, 버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등 동남아시아 전체에 걸쳐 공통으로 진행된 현상이기도 하다. 그리고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은 유럽과 미국, 일본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각종 생활가공품(의복, 주방용품 등)의 주요시장이기도 했다. 사실 이러한 가공품은 당시 동남아시아 현지인들이 수공업으로 생산하여 마을들끼리 교환하여 파는 주요 수입원 가운데 하나였고, 그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주요 수단 가운데 하나이자 자체적 시장 형성의 주요 동력이었는데, 유럽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가공품의 투입으로 자연스러운 현지의 경제적 동력마저 끊기게 된 것이다. 또한 몇몇 상품들은 높은 세금과 함께 각 현지 마을들에 강제로 판매되기도 했다. 아편과 술이 대표적이다. 프랑스령 베트남의 경우 모든 현지의 마을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일정량의 아편과 술을 구입하도록 강제하였다. 이렇게 강제판매된 상품의 수익은 모두 식민정부에게로 향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서구 근대적 문명의 혜택을 입는다던가, 경험해 본다던가,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는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 경제는 주로 하나 혹은 두 종류의 상품작물의 수출기지로만 작동하였는데, 자바섬 외에 말라야의 고무와 주석, 버마의 쌀, 베트남의 고무와 쌀 등의 생산에만 집중하였다. 서구의 근대적 기술문명을 통해 다수 동남아시아인의 생활수준이 높아지는 등의 효과는 거의 없었다. 일부 엘리트 및 도시 중산계층을 중심으로 서구식 교육, 교통, 통신, 위생 등의 혜택을 입은 것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자카르타), 싱가포르(Singapore), 사이공(Saigon 현재 호치민시) 등 거대도시의 존재는 배후지 생산물의 수출입 혹은 유럽인, 중국인들을 위한 거주공간으로서 기능했을 뿐이었다. 동남아시아의 근대화는 2차 세계대전 이후 각 지역이 독립을 하고 난 이후, 그것도 20세기 후반, 21세기에 와서야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무엇보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책이 자바인들에게 끼친 중요한 영향은 자바인들이 자체적으로 농업과, 상업, 산업에서의 발전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동남아시아 해양문명의 대표적 상업집단으로 꼽히던 자바인들은 네덜란드의 식민정책을 계기로 대부분 농노로 전락하게 되고, 그 빈자리를 식민지 정부와 결탁한 화교들이 차지하였다. 자바섬 각지에 설치된 대농장을 모두 직접 관리하기 어려웠던 네덜란드 식민정부는 그 대리경영을 화인들에게 맡겼고, 이들은 각 지역에서 지주 및 지배계층으로 활동하며 현지인들의 노동환경을 관리하였다. 주로 현지에 일찍부터 뿌리를 내린 조상을 가진 현지에서 태어난 이들을 보통 페라나칸(Peranakan)이라 불렀고, 자바에 거주하는 현지인들은 인도네시아 독립 이후 프리부미(Pribumi)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그리고 19세기 이후 강제경작제도로 각지에 형성된 대농장의 노동자로서 대량으로 이주하기 시작한 중국 본토 출생 신이민자들은 토톡(Totok)’이라 불렸다. 지배계층으로 군림한 대부분 페라나칸들과는 달리 토톡의 경우 현지인과 다름없는 일용직 노동자였고, 때로는 농업지역에서 작은 소매업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페라나칸과 토톡의 존재는 자바를 비롯한 인도네시아 지역의 상업활동이 대자본가의 영역에서부터 중소상인의 영역까지 모두 중국계 이주민들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음을 상징하는 것이고, 그 아래에서 프리부미라 불리는 자바의 현지인들은 네덜란드 식민정부와 중국인들에 의해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농노에 불과한 지위를 유지하며 이중으로 억압을 당해 왔다. 이것이 식민시기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의 사회경제적 구조이자 식민지배의 민낯이라 할 수 있다. 그 구조 속에서 자바의 프리부미, 즉 현지인들은 어떠한 역량을 키우고 증진시킬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유럽인과 중국인에 의해 수백 년간 착취당해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2-45년 사이 일본의 침략은 네덜란드 세력이 없는 정치적 공백과 더불어 현지인에 의한 지역통치라고 하는 새로운 경험을 프리부미들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 이후 1945년 일본의 항복과 함께 자바를 포함한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은 독립을 선언하였고,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네덜란드의 식민지 정책 아래 구조화되어 있던 프리부미, 페라나칸, 토톡 사이의 관계는 인도네시아라고 하는 신생 국민국가, 특히 프리부미의 경제적 자립과 자생을 추구하는 국가 공동체의 설립을 맞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이후 푸젠성 발리촌 형성의 직접적인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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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방카섬(Bangka Island) 주석광산의 중국계 노동자. 수마트라 섬 동편에 위치한 방카섬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지역 주석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지역이다. 그림에 나오는 것처럼 이 당시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의 주요 노동력은 현지인이기도 했지만, 중국계 토톡들도 상당수였다. , 독립직후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경제는 페라나칸 자본가-토톡 자영업자-토톡 노동자로 이어지는 중국계의 네트워크가 경제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자바인와 말레이인 등으로 구성된 현지인, 즉 프리부미 중심으로 경제를 재편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는데, 수백 년 동안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아래 농노로 삶을 영위해 온 현지인들이 쉽게 중국인들의 경제적 역량과 네트워크를 대체하기는 쉽지 않았다. 프리부미들의 강력한 반()화교화인 정서에는 이러한 현실적 이유도 주요하게 작용하였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21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발리촌 입구

http://www.cnepaper.com/fjqb/html/2016-11/04/content_12_1.htm

그림 2. 방카섬 주석광산의 중국계 노동자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Indonesians#/media/File:COLLECTIE_TROPENMUSEUM_Arbeiders_in_de_tinmijn_te_Banka_TMnr_10007202.jpg

 

발리촌관련 기사

https://www.scmp.com/week-asia/politics/article/3037931/chinese-who-fled-sukarnos-indonesia-build-new-bali-under-mao?fbclid=IwAR0kWeIMsaW35atyF6QHNckJTf69GiSnfDDaGJ4dbbELRVFD1lVqj2XSL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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