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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8월호
동남아시아 역사 속 혼혈(2) - 메스티조, 페라나칸, 까삐딴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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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포르투갈과 스페인 진출 이후 18, 19세기 네덜란드, 영국의 진출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은 유럽에서 온 상인들에 의해 도시가 건설되고, 무역이 행해졌으며, 각종 경제 시스템과 사회적 변혁을 경험하였다. 향신료를 비롯하여 동남아시아의 각종 천연자원 및 경작물은 원래 유럽 및 아시아 각 지역에서 인기가 많았는데, 유럽인들이 직접 무역에 참여하게 됨에 따라 기존에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중국인, 인도인, 아랍인들 사이에 더욱 극심한 경쟁이 발생하였다. 특히 믈라카, 마닐라, 바타비아와 같이 유럽인들에 의해 통제되던 주요 도시에서는 각 종족들 간의 결합과 경쟁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동남아시아에 거점을 두고 무역을 행하던 유럽인, 중국인, 인도인의 경우 현지의 여성들과 결혼함으로써 현지사회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고, 상업적 기회를 다양하게 획득할 수 있었다. 특히 많은 중국인 상인들이 현지여성과의 결혼을 통해 현지사회의 신뢰를 획득하고, 무역활동에 있어서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 남편을 맞이한 현지여성은 존재 자체가 외국인인 남편의 신분을 보장해 주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직접 현지사회와 남편 사이의 상업 협상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이는 당시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고, 해외교역과 같은 상업분야에 있어서는 오히려 여성들이 주도하고 있었다는 배경이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그들 사이에 발생한 혼혈그룹이 이러한 역할을 이어받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인들이 현지인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현지사회에 적응하는 과정에는 유럽인들의 이해관계 역시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상당수의 중국인들은 유럽인들이 장악한 도시보다는 도시에 공급되는 자원들이 생산되는 현지 농촌사회로 직접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는 유럽인들의 이해관계에도 잘 들어맞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어 스페인인들은 카톨릭으로 개종한 중국인들에게 마닐라 주변의 현지 농촌 마을에 거주하여 경작물들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고, 중국인들은 연간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현지 농촌사회와 마닐라를 자유롭게 오가며 상행위를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현지 농촌의 필리핀 여성과 결혼하였고, 그 결과 메스티조(Mestizo)라 불리는 혼혈들이 발생하였다. 17세기 중반부터 스페인이 다스리는 필리핀 사회에 중국인-필리핀 혼혈의 메스티조 그룹이 최초로 탄생하였다. 메스티조 그룹은 스페인령 필리핀 사회에서 농촌사회의 경작물을 구입하여 주요 도시인 마닐라로 운반하는 역할을 하였고, 19세기에는 미국 및 영국으로부터 온 해외 기업과의 무역 역시 담당했을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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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스페인령 필리핀의 중국계 메스티조 여성. 중국 상인들이 필리핀에 진출한 것은 사실 스페인인들이 필리핀으로 진출하기 전이었다. 그 시기 중국 상인들은 당시 필리핀 현지인들에게 Sangley 라고 불렸는데, 그 어원은 상업(business)’을 의미하는 중국어 生理의 복건어 발음이다. 이 당시 중국인들이 대부분 상업에 종사했기에 그렇게 불렸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혼혈이 아닌 중국인을 가리킨다. 스페인이 진출하고 중국 상인들이 필리핀 현지여성과 결혼하면서 탄생한 중국계 혼혈을 ‘Sangley Mestizo’ 혹은 ‘Mestizo de Sangley’라고 불렀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다른 해양부 동남아시아인 말레이 및 인도네시아 지역에 정착한 중국인들에게도 발견된다.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말레이 지역에 중국인 혼혈이 발생하는 것은 명청시기 중국인 상인 및 노동자들의 이주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부터다.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서 상행위를 한 것은 당송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만(20184월 연재 참고), 명나라 말이 되면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등의 유럽국가들이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명 조정의 중앙 권력이 급격히 약해지면서 수천 단위의 중국인들이 상인들을 중심으로 믈라카, 바타비아, 마닐라, 루손섬 등에 본격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다. 이 당시 중국인 상인들은 주로 네덜란드나 스페인 상인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을 제공해 주고, 멕시코 은, 유럽 및 서아시아산 물품, 동남아시아의 진귀한 물산(향신료 등)을 가지고 대륙으로 돌아가는 방식의 무역을 했다. 그러다가 18세기 후반 및 19세기에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의 식민지 운영 방침이 점(각 항구도시)을 선으로 연결하여 진출하는 '무역' 중심에서 면()을 차지하여 생산력을 늘리는 '착취'의 방향으로 그 중심이 바뀌면서 수백 혹은 수천 단위의 노동력으로는 해결되지 않아 수만 혹은 수십만 단위의 중국인들이 건너오게 되었다.

 

대량이민 이전, 기존의 중국 상인들은 청 제국 시기를 거치면서 상당수가 동남아시아 땅에서 현지화(localisation)했다. 네덜란드와 영국, 스페인의 식민정책 변화에 발맞추어 서구 제국이 조성한 플랜테이션 농장 및 광산을 대리경영하거나 고리대금업을 동족인 중국인 혹은 원주민들(말레이 및 필리핀인)을 대상으로 운영하면서 치부(致富)하였는데, 이들을 ‘Tax-farmer’이라고 부른다. 이 과정에서 명대 혹은 청대를 거치면서 많은 복건성 및 광동성의 상인들이 동남아시아로 건너와 정착하였다. 복건성 상인(취안저우, 장저우, 샤먼등 민남 출신)들의 경우 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지로 건너와 중개무역, 금융업, 플랜테이션 농장 및 광산의 대리경영을 하면서 사업을 벌이게 되었고, 필연적으로 유럽의 식민지 본국뿐 아니라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지역 현지 권력자들과의 관계가 적응과 성공의 필수요소였다.

 

사실 여기에는 명대와 청대 중국대륙의 주요 대외정책 기조가 '해금(海禁)', 즉 백성들이 해외로 나가는 것도 금하고 외부세력이 들어오는 것도 금하는 방향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외에 정착해야만 했던 노동자들 및 상인들이 상당수였다는 점도 작용하였다. 어쨌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중국계 상인들과 노동자들이 현지 말레이 여인들과 결혼하면서 지역사회에의 편입을 시도했다. 그들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 및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태어난 후손을 소위 페라나칸(peranakan)이라고 칭한다. 페라나칸이라는 단어는 말레이어로서 현지에서 태어난 이(local-born)”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즉 공동체 내부에서 태어난 이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당시에는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을 의미하지만, 현재에는 꼭 혼혈이 아니더라도 2세대, 3세대에 걸쳐 말레이시아 및 인도네시아에 오랫동안 거주한 중국계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 페라나칸들은 중국인 그룹과 말레이 현지 그룹 모두에 속해있다는 특징 때문에 두 그룹을 동시에 통치하는 서구 식민 세력에게는 매우 필요한 이들이었다. 영국 식민정부는 싱가포르, 믈라카, 페낭 등의 항구도시들을 따로 행정적으로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로 분류하여 말레이시아, 미얀마, 보르네오섬 일부와는 별개로 독자적으로 통치하였는데, 그러한 이유로 싱가포르의 페라나칸들을 해협식민지 중국인(Straits Chines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또한 남성 페라나칸은 바바(baba), 여성 페라나칸은 논야(nonya)라고 지칭한다. 특히 이들 해협식민지의 페라나칸들은 일찍부터 영국식 교육을 받아 영어에 능통하고 혼혈의 특성상 중국어(정확히는 복건지역 방언)와 말레이어 모두 구사가 가능한 경우가 많아 주로 영국 식민지 본국으로부터 해협식민지 중국계 상인연합 등 지역 커뮤니티의 리더 혹은 식민정부의 관료로 뽑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까삐딴(Kapitan) 시스템이다.

 

해양부 동남아시아는 유럽인들이 진출하기 이전부터 동서교역을 잇는 중요한 지역이었고, 그에 따라 천 년이 넘는 매우 긴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들만의 다양한 해상교역 관행이 있었다. 해상교역의 발전에 따라 여러 지역에 대규모의 교역항이 설립되었고, 각 항구에는 다양한 종류의 상인들이 수개월 혹은 수년 동안 머물다가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소수이지만 영구 정착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이 경우 각각의 공동체는 각 공동체 내부의 논리에 따라 통제되는 것이 원칙이었는데, 예를 들어 이슬람 정치체가 다스리는 항구에서 교역을 하는 중국 상인, 힌두 상인, 불교 상인의 경우 외부활동에서는 이슬람 율법의 통제를 받지만, 각 공동체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은 각각의 내부적 관행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 일환으로 각 공동체는 내부의 장을 뽑아 통제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해상교역의 전통적 관행을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영국이 공식화하여 마치 제국의 식민지 공무원처럼 활용하였으니 바로 까삐딴 시스템이다.

 

각 공동체의 장을 뽑는 과정 역시 공동체 내부의 논리에 의해 정해지는데 중국인 공동체의 경우 무조건 그 그룹에서 가장 돈이 많은 이가 까삐딴으로서 권력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영국과 네덜란드의 경우 18세기 후반, 19세기에 급증한 신이민자(영국령 말레이 및 해협식민지에서는 Singkeh,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Totok)들을 통제하기 위해 각 지역별로 까삐딴들을 두었는데, 이 경우 대부분 일찍부터 정착하여 돈이 많고, 각종 언어에 능해 중개자로서 기능을 잘 할 수 있는 페라나칸들이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페라나칸으로 대표되는 구이민자들의 경우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언어에 능숙하며 식민정책에 깊이 관여하여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신이민의 고용주일 가능성이 높았다. 신이민의 경우 대부분 단순 노동인 경우가 많았다. 까삐딴을 중심으로 한 구이민 그룹과 페라나칸들은 중국인 공동체 내에서는 영국 및 네덜란드 식민정부의 권위 아래 거의 독보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까삐딴은 공관(公館 Kong Koan)이라 불리던 공식 사무실을 짓고 강한 우월의식 및 리더쉽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기득권을 상징하는 페라나칸/구인민 그룹과 피고용인으로서 주로 중국인 공동체에서 빈곤계층을 이루고 있던 신이민자들 사이에 잠재되어 있던 갈등의 골은 20세기 신해혁명과 중일전쟁, 공산주의 열풍 등의 격변을 거치며 마침내 폭발하여 말레이,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화교화인 공동체의 내부적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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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 카삐딴이라 불리던 지위는 공동체 구성원에 따라 다양하게 표현되었는데, 아랍인 공동체의 경우 ‘Kapitan Arab’, 인도인 공동체의 경우 ‘Kapitan Keling’으로 불렸다. 중국인 공동체는 ‘Kapitan Cina’ 라고 한다.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는 지역 및 지위에 따라 다르게 표현되는데, ‘Majoor der Chinezen’, ‘Kapitein der Chinzen’ 등이 있다. 사진은 인도네시아의 중국계 페라나칸이자 바타비아 중화공동체의 5번째 마요르(Majoor)를 역임한 코우 킴 안(Khouw Kim An 許金安 1875-1945)이다. 바타비아의 코우(Khouw)가는 매우 유명한 페라나칸 집안으로 대대로 바타비아 식민정부의 관료를 역임하였다.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 역시 모두 바타비아 중화공동체의 리더이자 식민지 관료로 활동하였다고 한다.

 


스페인령 필리핀 사회의 중국계 메스티조 그룹과 말레이-인도네시아 지역 중국계 페라나칸 그룹의 탄생과 활동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중국 상인의 동남아 진출과 적응, 현지화의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점이고, 동남아시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화교화인의 상업 네트워크와 동남아 현지사회를 링크시켜주는 역할과 서구 식민세력의 현지 통치를 용이하게 해주는 역할 모두 훌륭하게소화했다는 사실이다. 그로 인해 17세기에서 19세기까지 동남아시아 지역사회가 중국인-동남아 현지사회-서구 제국이라는 삼각 구도로 작동하는 과정에서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다만 이러한 중국계 혼혈들의 적극적 활동은 근본적으로 동남아시아 현지 주민들에 대한 서구 세력의 가혹한 착취를 대리함과 동시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면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20세기 이 지역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하여 건국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심지어 지금까지도 남아있는 - 강력한 반()화교화인 정서의 근간에는 이들 중국계 혼혈들의 활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7】


김종호 _ 서강대학교 동아연구소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그림 1. 스페인령 필리핀의 중국계 미스티조 여성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Pinayavatar.jpg#/media/File:Pinayavatar.jpg


그림 2. 코우 킴 안 초상화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ajoor_Khouw_Kim_An.jpg#/media/File:Majoor_Khouw_Kim_An.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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