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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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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중국 역사 속의 '한전(限田)': '보수의 논리'와 '혁명의 논리' _ 이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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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에 발표된 대통령 개헌안에는 다양한 논점들이 포함되어 있으며, 발표와 동시에 사회 각계에서는 첨예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다. 개헌안의 통과 가능성과 별개로, 그 안에 담긴 주요 논점과 그에 관련된 토론은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전망하는 데 있어서 풍부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특히, 헌법 총강에 ‘토지공개념’을 삽입하는 문제를 두고 열띤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토지공개념이란 토지의 공공성을 강화하는 것으로서, 이를 위하여 법적 테두리 안에서 토지의 사용을 제한하거나 소유자에게 일정한 의무를 부과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 핵심 목적은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로 인한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다. 보수 진영에서는 이 개헌안이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반대하고 있으며, 대통령 개헌안에 대해서 ‘사회주의 헌법’, ‘새빨간 개헌안’ 운운하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하에서는 중국의 역사 속에서 유사한 주제를 찾아 이 문제에 대한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공공의 목적을 위하여 개인의 재산권을 제한하는 것이 역사적으로는 과연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중국 역사 속에서의 ‘한전(限田)’ 문제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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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사 속의 ‘한전(限田)’


‘문경지치(文景之治)’를 지나며 황무지 개간이 확대되고 농업 생산력이 회복되자, 한(漢) 무제(武帝) 시기에 이르러 이미 곳곳에서 토지 겸병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유학(儒學)의 국교화를 주도한 인물로 널리 알려진 동중서(董仲舒)는 대토지 겸병을 국가에서 제한하고 소농민을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그의 주장은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 사례를 통하여 적어도 무제 시기에 이미 대토지 소유로 인한 사회문제의 해결이 중요한 국정 현안으로 제기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무제 이후 호족(豪族)에 의한 토지 겸병은 더욱 확대되었고, 이에 애제(哀帝) 시기에 이르러 재차 한전론(限田論)이 제기되었다. 토지 겸병의 확대로 인한 빈부격차의 증가가 심각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사단(師丹)의 주장에 동의한 애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조정에서 논의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승상(丞相) 공광(孔光)과 대사공(大司空) 사무(伺武)는 제후왕에서 일반 평민에 이르기까지 신분에 따라 소유할 수 있는 토지와 노비의 규모를 제한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이로 인하여 한때 토지와 노비의 가격이 하락하기도 하였지만, 결과적으로는 호족의 반대에 부딪혀 실시되지 못하였다.


빈부격차의 확대와 그로 인한 사회 불안 속에서 권력을 장악한 왕망(王莽)은 서주(西周) 시대의 정전제(井田制)를 모델로 삼아 왕전제(王田制)를 실시하였다. 천하의 모든 토지를 ‘왕전(王田)’으로 규정하고 노비를 ‘사속(私屬)’이라 하여, 토지와 노비의 매매를 금지하였다. 1인당 100무(畝)를 지급한다는 정전제의 이념적 모델을 현실에 그대로 적용하여 유가(儒家)의 이상적 토지제도를 현실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회경제적 조건의 변화를 무시한 복고주의 정책으로 인하여 여러 문제가 발생하였고, 결국 왕전제도 시행 3년 만에 취소되었다.


서진(西晉) 시대에 이르러 재차 한전책(限田策)이 추진되었다. 서진에서 시행된 점전제(占田制)는 ‘남자 70무, 여자 30무’를 토지 소유의 한도로 설정한 것으로서, 한 쌍의 부부를 기준으로 할 때 100무의 토지를 초과하지 못하도록 제한한 것이었다. 비록 관료에 대해서는 관위(官位)에 따라 토지 소유의 한도가 10경(頃/1頃=100畝)에서 50경까지 늘어났지만, 기본적으로 점전제는 대토지 소유의 무한 확장을 제한하려 한 정책이었다. 다만, 점전제는 서진이 단명함으로써 대대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북위(北魏)에서 시작되어 당대(唐代)까지 시행된 균전제(均田制)도 부분적으로는 한전책으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왕조에 따라 구체적인 규정에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균전제는 전국의 인구를 파악하여 신분과 성별에 따라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하고 환수하는 것을 추구하는 토지제도였다. 균전제의 성격과 관련해서는, 계속된 전란 끝에 사회질서를 회복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토지 소유관계를 인정하면서 동시에 빈민의 안착과 황무지 개간을 도모한 것이라고 보기도 하고, 또는 호족(胡族)의 할당생산방식을 제국 전역에 적용하여 일원적인 토지지배체제를 구축한 ‘호한체제(胡漢體制)’의 결과물로 보기도 한다. 여기서는 균전제의 실제 기능과 별개로,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균분(均分)’의 측면에 주목하고 싶다. 북위에서 처음 균전제 도입을 제안한 이안세(李安世)도 빈부의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을 제도 시행의 목적으로 제시한 바 있으며, 이러한 맥락에서 균전제는 정전제에서 한전제, 왕전제, 점전제로 연결되는 토지 균분 정책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한편, 국가에서 토지를 지급하고 토지 소유의 제한을 설정함으로써 ‘균빈부(均貧富)’의 실현을 추구하는 통치방식은 당 후기의 양세법(兩稅法) 채택과 함께 사실상 종식되었다. 양세법은 개별 가구의 자산 규모에 따라 호등(戶等)을 책정하고 이 등급에 따라 차등 과세하는 제도이다. 물론 자산이 많을수록 보다 많은 세금을 납부하는 제도이지만, 중요한 것은 양세법 시행을 계기로 현실에서의 토지 소유 불균형이 제도적으로 인정되었다는 점에 있었다. 이전까지의 왕조들이 어떻게든 현실의 빈부격차를 극복하고 ‘균빈부’를 실현하기 위하여 다양한 한전책을 고민해왔다면, 양세법 체제가 들어선 이후에는 현실의 토지 소유 불균등 현상 자체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는 정확한 토지조사를 통하여 과세의 공정성과 효율성을 제고하는 것에 중점이 놓이게 된 것이다.

 

‘보수(保守)의 논리’로서의 ‘한전(限田)’


고대 중국에서 시도된 다양한 한전책들은 공통적으로 정전제에서 그 근거를 찾는다. 동중서나 사단, 왕망, 이안세 등은 모두 서주시기에 시행되었던 정전제를 근거로 삼아 토지 소유를 제한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으며, 정전제는 ‘옛날의 성왕(聖王)’이 시행한 제도로서 태평성세를 가져온 이상적인 토지제도로 간주되었다. 토지 겸병으로 인한 대토지 소유의 확대는 토지 균분의 균형 상태를 깨뜨리는 부정적인 현상으로 평가되었고, 이에 따라 국가권력은 토지 소유의 한도를 설정함으로써 최대한 정전제 시대와 유사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을 지향하였다. 요컨대, 현실에서는 토지 소유의 불균형이 확대되고 있었지만, 당대까지 국가권력은 적어도 이념적으로는 ‘한전’을 통하여 ‘균빈부’를 실현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균(均)’의 실현은 고대 중국에서 오랜 기간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기능해왔다. 공자(孔子)가 일찍이 “적음을 걱정하지 말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하라(不患寡而患不均).”라고 말했던 것은 널리 알려진 바인데, 공자가 이상화한 서주시대의 제도에 관한 기록을 담은 『주례(周禮)』에서도 ‘균’을 핵심이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주례』에서는 정치제도와 신분제도, 재정운영 등에서의 이상적인 상태를 ‘균’・‘평(平)’・‘균제(均齊)’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였으며, 정전제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심지어는 음악이나 기술 방면에서도 ‘균’을 핵심적인 가치로 설정하였다. 유가의 사상이 제국의 통치이념으로 자리 잡으면서 ‘균빈부’가 국가권력의 중요한 통치 목표가 되었음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런데 ‘균’・‘평’은 유가만의 핵심가치가 아니었다. 도가(道家)의 대표적 경전인 『장자(莊子)』에서는 완벽한 균형성을 갖춘 물의 속성을 강조하며, 수면과 같은 완벽한 균형의 상태를 이상화하여 ‘천하균치(天下均治)’를 이야기하였다. 법가(法家) 또한 ‘균’・‘평’의 상태를 중시하였다. 『상군서(商君書)』에서는 군주의 ‘술(術)’을 강조하면서, 군주가 저울의 중심을 유지하듯이 균형 있게 신하들을 평가하여 관(官)・작(爵)을 하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울러 법령의 정비와 조세의 부과 등에서도 ‘평’의 상태를 이상적인 것으로 설명한다.


이처럼 사상사적인 측면에서 적어도 춘추전국시대부터는 ‘균’의 이념이 이상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정치의 측면에서도 이 무렵부터 ‘균’의 이념이 실현되었음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춘추시대 후기부터 각 제후국에서는 ‘변법(變法)’을 단행하면서 수전(授田)제도를 시행했는데, 이를 통하여 국가권력은 개별 농가에 일정량의 토지를 지급하고 그 대가로 부국강병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수취하였다. 수전제도를 실시함으로써 국가는 빈부격차로 인한 계급 분화를 억제하여 소농민이 국가권력의 통제범위에서 빠져나가는 것을 방지하려 하였고, 재산과 지위가 균등한 ‘제민(齊民)’을 창출함으로써 강력한 국가권력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제민지배체제’의 관점에서 보면, 토지의 겸병은 소농민의 몰락으로 인하여 결과적으로는 국가권력이 직접 지배하여 세역(稅役)을 수취하는 대상인 ‘제민’의 상실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요컨대, ‘균빈부’는 ‘제민지배체제’의 유지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가치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안세는 균전제 시행의 목적을 ‘균빈부’를 통하여 ‘편호제민’을 실현하는 것이라고 직접 언급하기도 하였다(“所以恤彼貧微, 抑玆貪欲, 同富約之不均, 一齊民於編戶.”)


이와 같은 관점에서 역대 왕조에서 시도된 한전책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기본적으로 ‘제민지배체제’의 유지 내지는 복원을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표면적으로는 유가의 담론이 강조되어 있기는 하지만, ‘균빈부’의 이념이 제국 통치라는 현실의 차원에서는 ‘제민지배체제’의 유지와 맞물려 있었음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결국, 위에서 살펴본 다양한 한전책들은 현실의 계급 분화를 억제함으로써 ‘제민’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이를 통하여 제국의 통치체제인 ‘제민지배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에서의 ‘한전’은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체제의 안정적 유지 또는 재건을 목적으로 하는 ‘보수(保守)의 논리’를 담은 것이었다.

 

‘혁명의 논리’로서의 ‘한전(限田)’


이처럼 통치집단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중국의 국가권력이 시도한 다양한 ‘한전’의 시도들은 ‘제민지배체제’의 지속을 목표로 하는 ‘보수의 논리’로서 기능하였다. 하지만 통치집단이 아닌 저항세력의 관점에서 보면, ‘한전’의 논리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였다. 양세법 시행 이후로 현실의 대토지 소유가 제도화되면서, 당 말에 등장한 민중 봉기는 ‘균평(均平)’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다. 875년에 발발한 황소(黃巢)의 난의 초기 지도자 왕선지(王仙芝)는 자신을 ‘천보균평대장군(天補均平大將軍)’이라 칭하였는데, 이는 송(宋) 이후에 ‘균산(均産)’을 제창한 여러 민중 봉기의 선구가 되었다. 비록 반란군이 실제로 ‘균평’의 이념을 실천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들은 ‘균’의 이념을 제시함으로써 토지 소유의 불균등이라는 현실의 사회경제 구조를 부정하고, 이를 통하여 광범위한 민중의 기대에 호소하려 하였다. 북송 초기의 왕소파(王小波)・이순(李順)의 난(993-995), 북송 말의 방랍(方臘)의 난(1120-1121), 남송 초기의 종상(鍾相)의 난 등(1130-1135)은 모두 ‘빈부의 불균(不均)’을 없애겠다는 구호를 제기하며 민중의 호응을 얻었다. 송대부터 청대까지 민중 봉기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던 백련교(白蓮敎)에서도 ‘불평(不平)’을 척결하는 것을 ‘태평(太平)’의 실현으로 간주하였는데, 이 또한 ‘균’의 이념이 민간에서는 체제 전복(‘혁명’)의 논리로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근대에 들어와 ‘균’의 이념은 ‘혁명의 논리’와 더욱 강력하게 결합하였으며, 저항세력들은 개인의 토지 소유를 제한하는 ‘한전’의 구상들을 제시하였다. 근대 진입 초기에 발생한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1850-1864)에서 제기된 <천조전무제도(天朝田畝制度)>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토지 사유의 폐지와 토지의 절대적 ‘균분’을 주장하면서 기존의 지주전호제 자체의 전복을 주장한 것이다. 중국동맹회(中國同盟會) 시절의 쑨원(孫文)이 주장한 ‘평균지권(平均地權)’ 역시 ‘한전’의 맥락에서 제기되었다. 국가가 토지가격을 정한 뒤, 혁명 이후의 토지가격 상승분을 국가에서 가져가는 것이 그 주장의 골자였다. 쑨원의 ‘평균지권’ 주장은 이후에 토지의 경작자가 토지를 소유할 것을 주장하는 ‘경자유기전(耕者有其田)’으로 발전하였으며, 이는 중국공산당의 토지개혁에서도 계승되었다.


당 말부터 ‘균분’은 저항세력의 중요한 이념으로 제기되었다. 토지 소유 불균형의 심화라는 현실에 직면하여 민중은 ‘평균’을 요구하였고, 그러한 요구는 토지문제와 관련해서는 ‘한전’이라는 방향으로 구체화되었다. 토지의 균등한 소유, 또는 토지의 사유(私有) 자체에 대한 반대 주장은 토지 시장의 자유로운 발전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궁극적으로는 기존의 사회체제 자체에 대한 부정이기도 하였다. 요컨대, 이들에게 있어서 ‘한전’은 ‘혁명의 논리’로 작용하였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개인의 토지 소유권을 제한하는 ‘한전론’은 ‘한전’을 추구하는 주체에 따라서 상반되는 의미를 지녔다. 당대까지 중국의 고대 제국들은 ‘제민지배체제’의 유지를 위하여 ‘균빈부’의 이념에 따라 ‘한전’을 시도하였다. 비록 현실에서 성공적으로 관철된 경우는 적었지만, 고대 제국에 있어서 ‘한전’은 국가의 통치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보수의 논리’로 기능하였다. 반면, 민간의 저항세력은 ‘한전’을 불평등한 현실의 사회구조를 타파하기 위한 이념으로 제기하였고, 이는 기존의 시장질서와 사회체제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혁명의 논리’이기도 하였다. ‘한전론’은 관점과 입장에 따라서 체제의 유지를 위한 ‘보수의 논리’가 되기도 하였고, 반대로 체제의 변혁을 위한 ‘혁명의 논리’가 되기도 하였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의 ‘한전론’도 빈부격차의 축소를 통한 시장경제체제의 장기지속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일각의 주장과는 반대로 오히려 ‘보수의 논리’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원준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www.kaiwind.com/culture/hot/201406/26/t20140626_1724426.shtml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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