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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4월호
복건성 민남인은 어떻게 화교가 되었나(1) _ 김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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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까지 송우창 선생님의 북한화교와 한반도를 연재한데 이어, 이번 호부터는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김종호 선생님의 동남아화교화인 관행연재를 시작합니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동남아화교 송금문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종호 선생님은 현재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으며, 복건광동동남아지역 중화공동체 및 해상 실크로드 문명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본 연재를 통해 아직까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동남아화교화인 관련 연구가 연구자 및 일반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바다는 민남인의 밭이다’(海者, 閩人之田也)라는 말만큼 중국 복건지역의 정체성을 잘 표현해 주는 문장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민()이란 현재의 복건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복건 지역에 흐르는 강은 민강, 복건인들은 민인 혹은 민족이라 불렸다. 사천지방을 촉(), 광동지방을 월()이라고 지칭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사실 복건지방은 그리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북부지방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무이(武夷)산맥으로 인해 경작지가 다른 지역들에 비해 현저히 적어, 복건인은 일찍부터 바다로 눈을 돌려야만 하는 지리적 환경에 처해있었다.

 

다행히도 산악지역인 북부와는 달리 남부지역에는 천혜의 항구들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바로 천주(泉州)와 장주(漳州)가 그것이다. 19세기 전후에는 그 지위를 하문(廈門)이 이어받음으로써 복건지역의 중심항구가 되었다. 복건성의 성도(省都)는 복주(福州)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문, 천주, 장주 등의 남부지역 항구들을 중심으로 한 복건남부, 즉 민남(閩南) 지역이 복건성 전체의 경제적, 문화적 중심지로 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저명한 화교연구가 왕궁우(Wang Gung-wu)에 따르면, 10세기 초 복건지역에는 민()이라고 하는 독립국가가 50-60여 년간 존속했었다고 한다. 이 시기 복건지역은 복주와 천주를 중심으로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일찍부터 경제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송대(宋代)에 이르러 복건지역, 특히 민남지역의 해양무역이 꽃을 피운다. 민남인들은 주로 필리핀 마닐라, 인도네시아의 수리비자야 왕국 등지에서 장거리 무역을 행하면서 당시 서아시아에서 건너 온 아랍상인들과 대면하였다.

 

아랍상인들은 7세기부터 동남아시아의 향신료(정향, 육두구 등)를 가지고 유럽에 파는 중개무역으로 당시 동과 서를 잇는 해상무역로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0세기 이후 민남인과 광동인들이 본격적으로 해상무역에 개입하게 되면서 향신료 무역을 둘러싸고 두 상인집단(중국인과 아랍인)은 때로는 경쟁하고 때로는 협력하였다. 사실 민남인들의 활발한 무역활동은 이 지역이 가진 지리적 요인뿐 아니라 10세기 초부터 명대초기(15세기초)에 걸쳐 형성된 중앙 및 지방정부의 법적제도적 기반과 기술적 성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명대초기까지 중국의 제국들은 민간 장거리 해상무역을 허가해 주었고, 그에 따라 장거리 무역을 떠났던 선박들과 항해기술자들, 무역상들이 안전하게 귀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제도적으로 보장된 왕복항해야말로 근세 중국해상무역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각 항구의 해외상인들 역시 제국의 법에 의해 다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아랍상인을 비롯한 해외상인들이 드나들 수 있었다. , 이 시기 천주와 장주는 내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중앙의 법적제도적 기반을 바탕으로 지방 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비교적 자유롭게 무역을 행할 수 있는 항구도시였고, 그러한 배경 아래 민남의 상인들은 대시장(emporium)을 형성함으로써 해상무역의 절정을 이루었다.

 

매년 해외로 나가 항해를 이어가는 민남의 상인들은 명백히 귀항을 담보로 하는 일시적 해외거주자였지만, 항해로의 발전과 함께 그 숫자도 증가하게 된다. 그러면서 동남아시아의 해외 항구에는 몇몇 화상(華商)들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는데, 광동성의 화상들도 마찬가지였다. 화상들은 주로 베트남의 참파왕국, 캄보디아, 수마트라, 자바, 마닐라, 믈라카 등의 동남아 지역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16세기 초 동남아에 진출했을 때 정박하는 곳마다 화상공동체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기록도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예를 들어 신대륙 발견 이후 스페인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의 마닐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중국인 300여명이 비단, , 자기 등을 거래하고 있었다. 당시 마닐라는 중국산 도자기와 비단, 인도와 페르시아의 융단(면직물), 믈라카 향수, 자바 정향, 실론 계피, 인도 후추 등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고급상품들이 모여드는 상업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민남인들을 비롯한 화상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슬람 상인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던 동남아시아의 민남인들이 이제는 유럽인들을 상대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형성된 민남 해양상업문화를 잘 보여주는 핵심은 천주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천주를 무역항으로서 주목한 것은 북송(北宋)이었다. 1087년 시박사(市舶司)를 천주에 설치하면서 해외무역항으로서 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남송(南宋)시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항주(杭州)를 중심으로 한 남방으로 옮겨가면서 남방의 무역대항으로서 자리 잡게 된다. 특히 남송 조정에게는 1127년 이후 천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무역수입 및 세금이 국고의 주요 수입원이었을 만큼 주요한 항구였다. 그 이후 원대(元代)에 이르기까지 아랍, 아프리카, 동남아, 유럽 등지의 다양한 해외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외래문물과 문화의 창구이자 국제무역항으로서 한때는 동방제일항(東方第一港)이라고까지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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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해상실크로드의 한 축을 담당했던 천주(泉州)의 다양성을 잘 보여주는 북송대의 이슬람 사원 청정사(淸淨寺).

    

 

송원대를 거치면서 축적된 국제무역대항으로서 천주의 역량은 명대(明代) 정화(鄭和)의 대함대가 천주에서 그 항해를 시작함으로서 꽃을 피웠다. 그러나 영락제(永樂帝) 사후 홍희제(洪熙帝), 선덕제(宣德帝)를 거치면서 무리한 대외정책으로 소모된 국력을 회복해야 한다는 통치방향이 채택되면서 천주를 중심으로 하는 국제해양무역은 금지되었다. 이른바 해금(海禁)정책과 동시에 대항으로서의 천주의 위상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렇듯 복건 민남지역의 정체성은 바다로부터 형성되었다. 근세시기에는 천주라는 국제무역항을 통해, 근대에 들어서는 아편전쟁과 남경조약으로 개항한 하문을 중심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무역을 통해 바다를 이용한 외부와의 교류가 끊임없이 이어진 지역이 바로 이 민남지역이었다. 사실 근세와 근대시기에 걸쳐 민남지역으로부터 수출된 가장 유명한 상품은 차()였다. 복건 지역은 차의 주산지다. 흔히 반숙성차로 유명한 안계(安溪)의 철관음(鐵觀音), 무이산(武夷山)의 대홍포(大紅袍) 등의 차는 서구로 건너가 유럽 귀족들의 기호식품이 되었는데, 차를 의미하는 티(Tea)의 어원이 민남지역의 방언인 민남어 떼(Teh)에서 기원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남지역의 진정한 히트상품은 바로 사람이었다. 상인들의 활동은 천주가 대항으로서 자리 잡기 시작한 근세시기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었고, 근대시기 민남인의 해외활동은 주로 동남아시아로 향한 노동이민이 핵심이었다.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이 되면,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은 동남아시아 대부분 지역을 식민화하였고, 자원 착취라는 목표를 위해 건설한 아편, 고무 농장 및 주석 광산에 필요한 대규모의 노동력을 상당 부분 중국으로부터 충당하였다. 지리적으로 농경에 적합하지 않은 자연환경과 청 말의 혼란한 정국을 피해 수많은 민남지역의 성인남성들이 자진하여 동남아시아로 향하는 정크(Junk)선에 몸을 실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하문에 모여 배를 타고 싱가포르로 향했다. 운이 없으면 태풍을 만나 좌초하게 될 지도 모르는 두려움을 안고, 바다의 여신 마조(媽祖)의 이름과 고향에서 가장과 아들의 금의환향만을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말이다. 빠르면 한 달, 길면 몇 달이 걸리는 항해 끝에 기회의 땅, 싱가포르에 도착하게 된 민남인에게 남겨진 과제는 일자리 구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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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복건 민남인의 무사항해를 기원하기 위해 마조를 주신으로 싱가포르에 세워진 천복궁(Thian Hock Keng 天福宮)의 현재 모습. 1840년에 지어진 이후 현재까지도 계속해서 개보수를 거치는 과정에 있다.

    

 

동남아화교화인 관행 1

 

김종호 _ 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이미지 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Qingjing_Mosque_-_entry_-_DSCF8668.JPG

https://commons.wikimedia.org/wiki/Thian_Hock_Keng#/media/File:Thian_Hock_Keng_Temple_2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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