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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4월호
꽃가마 타고 오는 처, 계약서 쓰는 첩 _ 손승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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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중국의 혼인법은 신분질서를 유지하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한 중요한 규정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첫 법률인 혼인법도 사회주의 중국의 통치이념을 관철시키고 국가의 기강을 확립할 목적으로 제정되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미 1930년 국민당의 남경국민정부는 근대적 혼인법(민법)을 제정하여 축첩의 금지를 입법화했다. 그러나 실제 소송판결에서는 이를 묵인했기 때문에 공산당으로부터 비판을 받아온 터였다. 1950년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의 혼인법에서는 혼인‧이혼에서의 남녀평등과 결혼 당사자의 의사가 존중되었고, 축첩제도나 전족, 조혼 등 악습의 폐지가 명기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등장하기 시작했던 ‘바오얼나이(包二奶)’ 현상은 어딘지 낯설지가 않다. ‘바오얼나이’는 배우자가 있는 남성이 금전이나 물질로 혼외 이성을 두거나 동거하는 행위를 속칭하는 말이다. 1990년대 광저우에서 처음 등장한 이 새로운 용어는 ‘현지처’ 혹은 ‘현대판 첩’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그런데 광저우 일대에서 유행하기 시작하던 이 현상은 어느새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다. 이것은 개인의 일탈이라 하기에는 특정 부류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유행처럼 번졌고, 그들이 동경하는 하나의 생활방식이 되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했다. 심지어는 바오얼나이를 두는 것이 공공연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남자의 상징’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분명히 혼인법에 어긋나는 불법적인 행위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대응으로 2001년 개정 혼인법에서는 ‘중혼(重婚) 금지’가 법적으로 명기되었다. 2018년 최근에 발표된 혼인법 신규정 제3조에도 중혼 금지 조항이 있다. 바오얼나이를 형법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바오얼나이 현상이 없어졌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바오얼나이 현상이 중국의 전통에서부터 유래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중화인민공화국 초기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던 수많은 중국의 전통들이 개혁개방 이후 다시 부활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바오얼나이도 그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전통사회의 첩과 현재의 바오얼나이가 혼외의 배우자라는 점은 공통적이지만 그 발생 원인이나 이들에 대한 사회적, 법적 인식은 다르다. 
 

중국의 전통 혼인제도는 실제로는 ‘일부다처’였지만, 법은 엄연히 ‘일부일처’를 규정하고 있었다. 중국 법률의 근간인 당대(唐代)의 『당률소의(唐律疏議)』에는 ‘일부일처’의 부부제도는 ‘바꿀 수 없는(不刊) 제도’라고 명기하고 있다. 남편은 해, 아내는 달에 비유되어 가정의 근간이 되었다. 달이 둘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첩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첩은 뭇별에 비유되었고 남성은 자유롭게 첩을 둘 수 있었다. 이는 첩이 중국의 전통가족제도에서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는 방증이다. 중국의 전통가정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해 천시되었고, 여성 속에서도 처와 첩은 다른 신분, 다른 법적 지위를 가졌다. 그렇다면 처와 첩은 얼마나 다르고 어떻게 구분되었을까. 
 

우선 처와 첩이 한 집안에 들어오는 과정부터가 달랐다. 처는 정혼을 한 정실 아내였지만 첩은 한낱 노예와도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이다. 처는 남자 집안에 시집을 올 때 꽃가마를 타고 온다. 꽃가마는 온통 홍색으로 장식을 하고 4인 혹은 8인의 인부가 들게 되어 있다. 꽃가마 주변에서는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행진을 했기 때문에 누가 보더라도 시집가는 꽃가마 행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남편 집에 들어가는 것은 여자가 정당하게 그 아내의 신분을 얻었음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꽃가마’는 예로부터 신부를 남편의 집으로 데려오기 위해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정당한 방법이었다. 농촌관행조사에서도 혼인을 할 때 다른 비용은 다 줄이더라도 꽃가마에 태워 여자를 데려오는 것은 반드시 행해졌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첩은 이 꽃가마를 타고 올 수 없는 존재였다. 심지어 첩은 계약의 관계였다. 중국은 일상생활에서 중요한 법률적 행위를 할 때 계약서를 쓰는 관습이 널리 퍼져 있었다. 토지를 매매할 때, 분가할 때, 양자를 들일 때, 데릴사위를 들일 때 등등, 첩을 들일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婚書와는 다름). 민국시기의 최고법원이었던 대리원(大理院) 판결례에서도 “첩을 들이는 것은 정식 혼인이 아니라 일종의 무명계약”이라는 판례가 있다. 첩을 들일 때는 계약을 하며, 정식의 혼인과는 성질이 다름을 명기하고 있는 것이다. 첩은 때로는 매매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의미에서 처와 첩은 원래 다른 신분이었고 처음부터 구별이 되었다. 처인지 첩인지는 처음에 여성이 남편의 집으로 들어올 때부터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첩을 들이는 행위는 혼인 개념에 포함되지 않았다. 첩을 일부일처의 범위에 넣을 수 없기 때문에 첩을 두는 것은 ‘중혼(重婚)’이 아니라는 주장이 논쟁이 될 때마다 되풀이되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첩은 원래 여자노예에서 유래했다. 여자노예 가운데서 주인의 총애를 받아 규방으로 불러들여지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에도 주인의 시중을 드는 일반 여자노예와 동일하게 ‘첩’으로 불렸다. 한 명의 처를 제외하면 모두 첩으로 불렸던 것이다. 처와 첩의 명분은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만약 처를 첩으로 삼고 첩을 처로 삼는 일이 있다면 처벌대상이 되었다. 
 

중국 전통가정의 규율이나 서열관계는 종종 복제(服制)로 표현되는데, 이는 가족이 사망했을 때 혈연관계의 친소에 따라 상복을 입는 규율이었다. 예를 들어, 첩은 남편이 사망하면 3년의 상복을 입고 적처가 죽으면 1년의 상복을 입으며, 남편의 맏아들 및 아들들이 죽으면 역시 차등적으로 상복을 입었다. 그러나 첩이 사망했을 때는 첩의 아들을 제외한 누구도 상복을 입지 않았다. 첩의 친생자만이 3년의 복상을 했을 뿐, 적처의 아들들은 상복을 입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첩이 종족 중에서 공적인 지위를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만 첩의 친생자는 개인적인 모자관계이기 때문에 모자관계의 복상을 했던 것이다. 
 

또한 복제상에서 첩은 남편을 지아비(夫)가 아닌 군주(君主) 혹은 가장(家長)으로 불렀다. 즉 주인이라는 의미이다. 『당률소의』에서는 첩도 처와 더불어 남편을 지아비로 칭하고 있지만, 복제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관습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지아비가 아닌 군주로 칭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법보다도 관습이 더 견고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첩이 불법적이거나 법 밖에 있는 존재는 아니었다. 첩도 남편과 제도적으로 결부되어 있던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첩도 남편에 대한 정조의 의무가 있고 남편이나 가정의 화목에 대한 아내로서의 의무가 있었다. 그렇다면 첩은 왜 필요했던 것일까? 
 

중국의 전통 가정에서 ‘종조계승(宗祧繼承)’을 빼놓고는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중국 가족제도의 근간은 바로 종조계승이었기 때문이다. 종조계승은 대를 잇는 것, 즉 혈통관념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의미한다. 제사는 같은 혈통의 남자 자손이 지내야 조상이 이를 섭취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혈식(血食)’이라고 한다. 종조계승의 입장에서 보면 혼인을 하는 이유도 남자 자손을 보기 위한 것이고, 첩을 들이는 이유도 적처 소생의 아들이 없을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전통시기에는 영아 사망률도 높았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건강한 아들’을 확보하는 것은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가장 중대한 일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자손손이 번창하고 분가를 통해 세포분열을 하여 대대로 내려오면 하나의 거대한 종족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자손은 각 가정으로 나뉘지만 동일 종족이라는 범위 속에서 종족의 결합력이 강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대를 잇기 위해 첩을 들이는 일은 사회적으로 용인되었다. 첩을 들일 수 있는 신분은 주로 고관이나 부유한 상인들이었고 일반 농민들 사이에서는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또 대를 잇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일종의 사치로서 첩을 얻는 사람에 대한 사회적인 평가는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전통사회에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중국인들에게 절대적인 명제였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방도를 강구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 이유였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수천 년간 지속되었던 가치관과 의식은 중국사회를 견고한 남성중심의 사회로 만들어 놓았다. 지금의 시각에서 종조계승의 사고방식이 옳건 그르건 상관없이 당시에는 첩을 둘 수 있는 ‘명분’이 제공되었던 셈이다. 오랜 전통을 깨고 1930년 국민당에 의해 남녀평등의 근대 혼인법이 제정되었지만 이러한 남성중심의 가치관과 의식은 사라지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직후 혼인법을 반포하고 국가가 나서서 강력하게 근대적 혼인법 캠페인을 벌였다. 그 결과 축첩, 전족, 조혼 등의 전통적 악습은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의 경직성이 약화되고 개혁개방으로 인한 상대적인 자유로움 속에서 전통의 첩과 비슷한 양상이 일부 부유층에서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1가구 1자녀 정책 시행 이후 종조계승의 의미가 퇴색되어 버린 현재의 중국에서, ‘바오얼나이’ 현상이 부활했다는 것은 여전히 남성중심의 사고방식이 사회 곳곳에 남아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사회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지만 인간의 사고와 의식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변화가 가장 힘든 것은, 인간의 머리로 만들어내는 제도가 아니라 가슴으로 공감하고 이해하는 인간의 감성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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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습과 중국문화 5

 

손승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www.xfwed.com/ketang/topic/20130543287.html

 

참고문헌

金池洙, 中國婚姻法繼承法, 전남대학교출판부, 2003.

滋賀秀三, 中國家族法原理, 創文社, 1981.

郭洁, 論淸代妾的民事法律地位, 金華職業技術學院學報2007-9.

董倩, 包二奶問題的法律思考, 法制與社會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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