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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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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호
비틀즈(The Beatles)의 ‘레이디 마돈나(Lady Madonna)’와 풀로(FULRO)의 귀환: 베트남 ‘떠이 응우옌(Tây Nguyên)’지역 닥락(Đắk Lắk)에 울려 퍼진 총성 _ 심주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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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디 마돈나에 영감을 준 사진 한 장

 

심주형 1.PNG

사진 1. 하워드 소추렉(Howard Sochurek) 촬영 마운틴 마돈나(Mountain Madonna)”, 

베트남에서 활동중인 미국의 특수부대기사에 게재된 사진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19651월호.

  

레이디 마돈나, 당신에게 매달린 아이들이

당신이 어떻게 먹고 사는지 궁금해하고 있어요.

당신이 내는 월세는 누가 벌어오나요?

혹시 돈이 천국에서 내려온다고 생각하셨나요?

...

[더 비틀즈(The Beatles), 1968 ‘레이디 마돈나 Lady Madonna’의 가사 일부]

  

전 세계 대중음악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팝그룹으로 일컬어지는 비틀즈는 19683월에 발매된 싱글앨범을 통해 레이디 마돈나라는 곡을 발표했다. 이 곡은 전통적인 로큰롤(rock & roll) 형식으로 매일 매일 발생하는 새로운 문제들과 씨름하며 힘겹게 아이들을 양육해 가는 노동자 계급 싱글맘의 삶을 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어왔다. 발매 직후 영국 싱글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던 이 노래를 만든 폴 매카트니(Paul McCartney)는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난 2017년 자신이 곡을 만들게 된 결정적 계기는 우연히 접하게 된 잡지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린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고 고백했다[사진1]. 한 여성이 세 명의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한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광경을 담은 사진을 통해 아이를 안고 있는 매우 자랑스러운 여성의 이미지, “성모 마리아와 같은 모습(Madonna thing)의 어머니와 아이를 보게 된 것이 곡을 창작하게 했던 직접적인 영감의 원천이었다는 것이다.1)


레이디 마돈나에 얽힌 한 장의 사진에 대한 상기와 뒷이야기는 단순히 대중음악사의 가쉽거리 정도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자는 한국에서 한때 등골 브레이커로까지 회자되던 아웃도어 의류 업체의 브랜드명으로 더 유명해진 내셔널지오그래픽이 과거에 커피 테이블을 점령하며 우연한 마주침의 대상이었던 잡지였다는 사실에 마냥 흥미로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는 더 진지한 어떤 이들은 마운틴 마돈나로 이름 붙여졌던 사진 이미지를 직접 확인하고서 내셔널지오그래픽에 실렸던 사진들이 재현하는 여성과 아이에 대한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틀즈 할배의 젊은 시절을 여전히 잠식하고 있던 서구 남성주의적 낡은감수성에 고개를 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진 속 여성과 아이들이 다름 아닌 1960년대 중반 베트남의 서부 고원지대인 떠이 응우옌(Tây Nguyên)’지역의 에데(Êđê)’족이라는 사실과2) 점차 격렬해져 가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베트남군과 미군이 건설한 전략촌으로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인해 삶이 뿌리 뽑히고변화와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휩싸였던 당시 상황을 고려한다면, ‘마운틴 마돈나는 조금 더 복잡한 역사적 맥락과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48월 이른바 통킹만 사건(the Gulf of Tonkin incident; 베트남어 Sự kiện Vịnh Bắc bộ)’이 벌어져 미국의 베트남전에 대한 직접 참전 가능성이 고조되던 상황에서, ‘떠이 응우옌지역에서 결성된 민족연합 독립운동단체인 풀로(프랑스어 Front Unifié de Lutte des Races Opprimées의 약자인 FULRO로 일반적으로 표기; “압제당한 인종들의 해방을 위한 연합전선이라는 의미)’가 남베트남군과 미군을 상대로 대대적인 무장 항쟁을 9월에 일으켰다. 이 지역이 역사적으로 베트남과 라오스, 캄보디아가 맞닿는 고원지대로 인도차이나의 지붕으로 불리던 지정학적 중심지이자, ‘북베트남의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 활동에 대한 군사지원과 보급로로 활용되던 호찌밍 루트(Đường mòn Hồ Chí Minh)’로 연결되는 군사·전략적 요충지였기에 떠이 응우옌에서 벌어진 소수민족들의 무장 항쟁은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에 큰 충격을 주었다. 특히 FULRO가 남베트남 정권의 민족 정책에 대한 반대와 저항노선을 분명히 하고 있었기에, ‘비엣 밍(Việt Minh)’ 세력에 협조하고 그에 따라 남베트남과 미국이 이 지역에 대한 군사적 통제력을 잃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컸다.


결국 FULRO의 무장 항쟁 발발 이후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남베트남군의 대대적인 떠이 응우옌지역 증파와 함께 군사기지가 미군의 지원을 통해 건설되었고, ‘비엣 밍과 소수민족을 분리하려는 전략촌건설사업이 펼쳐져 토착 민족들의 삶에 급격한 변화가 초래되었다. 사실상 전통적으로 화전을 일구며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강제적인 정착 생활 그 자체만으로도 삶의 방식의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었다. 한편, ‘비엣 밍세력에게도 이 지역은 남베트남 해방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지붕이었기에 포기할 수 없었고, 남베트남과 미국에 대항해 19652떠이 응우옌의 주요 도시인 현재의 자라이(Gia Lai)성 쁠레이쿠(Pleiku) 인근의 미군 주둔지인 캠프 할러웨이(Camp Holloway)’에 대한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 전투에서 미군 희생자가 발생하게 되면서, 결국 북폭이 실행되고 미국의 전면적인 베트남전 개입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렇게 전략촌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었던 마운틴 마돈나와 아이들의 삶도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처참한 전장의 포연으로 뒤덮이게 되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임시혁명정부의 결정적 승리로 종전이 임박했음을 확인시켰던 부온 마 투옷(Buôn Ma Thuột) 전투’(현재의 닥락성 성도)도 바로 이 지역에서 벌어졌다. 사실상 전쟁의 개전과 종전의 역사가 모두 떠이 응우옌지역에 중첩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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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떠이 응우옌지역에 속한 다섯 개의 성

위로부터 순서대로 꼰뚬(Kon Tum), 자라이(Gia Lai), 닥락(Đắk Lắk), 

닥농(Đắk Nông), 럼동 (Lâm Đông)



‘FULRO’의 귀환

FULRO의 역사가 태동한 떠이 응우옌지역은 영어로는 중부 산악지대(Central Highlands)’로 불리기도 하지만, 지리적으로는 북위 17도선 아래, 즉 북쪽으로는 꾸앙남(Quảng Nam)성 산악지역, 남쪽으로는 동남부의 산악지역을 면하며, 서쪽으로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동쪽으로는 남중부연안에 위치한 성들의 산악지역과 마주한 지역을 일컫는다. 현재는 행정구역상 5개의 성을 포괄하는 지역[사진2 참조]을 일반적으로 의미하지만, 자연 지리와 소수민족 거주지들을 고려할 때 쯔엉선 산맥의 남쪽지역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는 주장도 있다.


떠이 응우옌지역에 거주해 왔던 토착 민족들의 삶과 환경의 변화는 역사적으로 15세기 베트남 북부 홍강 델타에 거주하던 낑(Kinh)족의 남진(Nam tiến)’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베트남을 통일한 응우옌(Nguyễn) 왕조와 프랑스 식민지 시기의 여러 정책과 이주사를 통해서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크고 급격한 변화는 1954년 제네바 협정을 통해 베트남이 17도선을 기준으로 분단되고, 북부로부터 약 60만에서 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남부지역으로 이주하면서 발생했다. 17도선 이북 지역에 거주하던 상당수의 천주교도와 낑족들이 떠이 응우옌지역으로 이주해 정착했고,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지도자 응오 딩 지엠(Ngô Đình Diệm)은 북부로 부터의 이주자들 특히 낑족과 화교들의 이주 정책을 펼치고 고원지대 화전민족들에 대한 정착 정책을 시행하였는데, 그에 따라 토착 민족들은 토지를 두고 이주자와 경쟁하거나 빼앗기고 인종적 멸시와 차별이 일상화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떠이 응우옌지역 토착 민족들 사이에 정치·경제적 상황에 대한 불만이 축적되고 확산되고 있던 중, 에데족 출신의 이 브함 에누올(Y Bhăm Êñuôl)’이 이끄는 일단의 토착 민족 출신 지식인들은 바자라까(BAJARAKA)’라는 조직을 건설하고 공식적으로 독립을 요구했다. ‘바자라까는 바나(Bahnar), 자라이(Jarai), 라데/에데(Rade/현재는 Êđê로 표기)족 그리고 까호/꺼호(Kaho; 현재는 Cơ Ho로 표기)족의 앞 글자를 딴 민족 연합체였고, 결성 후 떠이 응우옌의 주요 도시인 꼰뚬, 쁠레이쿠, 부온 마 투옷에서 독립과 남베트남 정권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그러나 바자라까운동은 남베트남 정권의 무자비한 탄압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 브함 에누올을 비롯한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구속되는 상황에 내몰리게 됐다.


바자라까의 결성과 활동이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되던 상황에서, 본격적으로 베트남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 미국은 떠이 응우옌지역에서 반공 작전의 일환으로 토착 민족을 무장시키고 훈련하는 비정규 방어군(Civilian Irregular Defense Group; CIDG)’ 프로그램을 실행하였다. 토착 민족이 폭력과 전쟁에 본격적으로 동원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1963년 응오 딩 지엠 정권에 대한 쿠데타가 벌어지고 정권이 무너지자 수형생활을 하던 바자라까운동의 지도자들이 석방되었다. CIDG에 동원되고 훈련된 무장세력이 성장한 상황에서 토착 민족 독립/자치 운동도 단순한 시위가 아니라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들은 급진적인 민족 정책을 펼치며 정치적 기반을 확대해 가던 캄보디아 시아누크(Sihanouk)의 지원을 받으며 무장투쟁 조직으로서 FULRO를 창립하고,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을 넘나들며 남베트남군과 미군에 대한 무장항쟁을 펼쳤다. 그러나 시아누크가 정권에서 밀려나고 친미적인 론 놀(Lon Nol)이 집권하자 FULRO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국경 지역에서 양쪽 모두에 공격을 받는 상태에 놓여 제한적인 활동밖에는 펼칠 수가 없었다.


FULRO베트남전이 끝난 이후 수립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떠이 응우옌지역을 신경제지구(Khu Kinh tế mới)’로 지정하고, 대규모 강제 이주 프로그램을 실행하며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따른 개조 학습(Học tập cải tạo)’을 실시하자, 그에 반대하며 저항하는 무장투쟁을 통해 다시 정치적 입지를 키우기 시작했다. 사실 FULRO가 베트남의 다수종족인 낑족과의 관계에 있어서 역사적 지배와 차별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하게 표명해 오기는 했으나, ‘베트남전중에는 남베트남정권 타도에 상대적으로 집중하는 투쟁노선을 지니고 있었고 비엣 밍에 대해서는 중립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시대가 개막하자 낑족 중심의 정책과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일반에 대한 반대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종교의 자유에 대한 사회주의 정권의 억압정책과 사회 안전과 경제개발 논리에 따른 인구통제정책은 격렬한 저항의 대상이 되었다.


1970년대 말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고, 북부 국경지역에서 베트남과 중국의 전쟁이 발발하자 FULRO의 활동 방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중국은 FULRO에 대한 지원을 통해 떠이 응우옌지역의 민족문제를 활용하여 베트남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펼쳤고, 베트남은 캄보디아에 수립한 친베정권을 통해 FULRO를 괴멸시키려 시도했다. 1986년 이후 중국으로부터의 지원이 중단되고, 캄보디아에서 함께 활동 거점을 형성하고 있던 크메르 루주(Khmer Rouges)’ 세력도 쇠락하면서 FULRO는 지속적인 투쟁을 펼치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91년 베트남과 중국이 외교관계를 정상화하고 캄보디아 내전 종식을 위한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되어 1992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United Nations Transitional Authority in Cambodia; UNTAC)’의 활동이 시작되자 FULRO는 공식적으로 활동 중단을 선언하고 무기를 반납한 후 상당수가 정치 난민의 자격으로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떠이 응우옌의 소수민족들과 FULRO 지도자들은 1992산악민 재단(The Montagnard Foundation, INC.; MFI)’를 설립하고 국제사회와 미국 정부를 상대로 베트남의 소수 민족문제를 이슈화하며, 베트남에서 FULRO 활동을 재건하고 지속해가는 활동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또한 떠이 응우옌을 중심으로 한 베트남 남부지역에서 역사적 영토를 수복하고소수민족의 연합체로서 독립 국가인 데가(Đê Ga; Degar)’를 건설하는 것을 정치적 목표로 천명하였다. ‘데가는 본래는 에데족의 명칭에서 기인했으나 베트남인 즉 낑족을 제외한 산악지역의 모든 민족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제시되었다. 사실상 천년왕국건설을 꿈꾸며 자신들 나름의 전쟁을 지속하겠다는 선언이었다. 캄보디아를 떠나 미국에 자리 잡은 FULRO의 해외 본부로서 산악민 재단의 활동은 지난 2001년과 2004떠이 응우옌에서 벌어진 격렬한 소수민족 시위의 배후로 주목받았다. 특히 데가 교회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활동은 강력한 민족적 종교공동체를 형성하며, 베트남 당-국가의 종교와 인권 정책에 대한 저항의 기반이 되었다.


떠이 응우옌지역에서 소수민족들과 낑족 그리고 당-국가 사이에 크고 작은 문제와 갈등은 끊이지 않았지만,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FULRO의 활동은 베트남과 미국의 관계가 발전해 가면서 약화되는 듯 보였고, 최소한 베트남 당-국가 체제를 전복하려는 무장투쟁 노선은 폐기된 듯했다. 그러나 2023611일 자정을 막 지난 시각, 고원에 드리워진 어둠의 정적을 깨고 닥락성 부온 마 투옷시 외곽 끄 쿠인(Cư Kuin)’현의 싸(Xã)급 인민위원회 두 곳을 향해 FULRO의 귀환을 알리는 총성이 울려 퍼졌다.


베트남 당-국가가 사건 발발 초기의 언론보도를 삭제하고 정보 통제를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무장세력의 인민위원회 공격에 대한 구체적 내용과 목적을 외부에서 파악하는 것은 쉽지 않다. 베트남 당-국가는 사건 발발 직후 이 사건을 테러집단의 공격으로 규정했고, 가담자들을 단순한 반동(phản động)이 아니라 (kẻ thù)’으로 호명했다. 제한된 언론보도와 정보에도 불구하고 현재(2023626)까지 공개된 내용을 종합해 보면, ‘끄 쿠인현의 인민위원회 두 곳이 무장한 수십여 명의 소수민족 테러리스트들에게 동시적으로 공격을 당했으며, 그 과정에서 9명이 사망했고 2명이 부상하고 3명이 인질로 잡혔다. 사망자 중에는 다섯명의 공안과 싸의 지도자급 간부 두명이 포함되었다. 사건 발발 후 곧바로 베트남 당-국가는 지역에서 대대적인 테러리스트색출과 검거 작전에 나섰고, 캄보디아 정부도 베트남과 국경을 면한 과거 FULRO의 활동 거점이었던 캄보디아의 북동부지역 몬둘끼리(Mondulkiri)성에서 적극적인 수색과 점검에 나서며 공조를 펼쳤다.4) 이처럼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펼친 결과, 베트남 정부는 모두 75명의 테러리스트를 검거했으며, 23정의 총기와 각종 무기류 그리고 10장의 FULRO 깃발을 압수했다고 발표했다.


여전히 사건과 관련한 조사와 검거 작전이 계속되는 상황이지만, ‘-국가의 전복을 기도한 폭력 테러리스트 집단과 같은 호명을 제외하고 도대체 이들이 어떤 이유와 목적으로 두 곳의 싸급 인민위원회를 특정해 공격을 감행했던 것인지에 관해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없다. 사건이 발생했던 인근의 부온 마 투옷시에서는 2023년 초 코로나19’로 인해 중단되었던 커피 축제가 역대 최대규모로 개최되어 베트남의 커피 수도로서 위상을 국내외에 재확인했고, 동시에 떠이 응우옌지역의 발전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시 외곽의 현에서 발생한 충격적인 사태가 불러온 충격이 쉽사리 해소되기는 쉽지 않다.


만약 지역신문과 이전 언론보도를 통해 인민위원회에 대한 무장 공격 원인을 추적해 본다면, 지역 내 큰 갈등 사안은 베트남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토지와 관련된 문제들이다. ‘떠이 응우옌지역을 관통하며 베트남 북부와 남부를 연결하는 호찌밍 도로(Đường Hồ Chí Minh)’의 건설계획에 따라 두 싸 지역의 커피 회사 농장 일부가 수용되고, 이에 따라 회사에 토지를 위탁해 생산하는 커피 재배 농가가 경작지를 잃게 되는데도 불구하고 지역 인민위원회가 이러한 문제에 대한 고려와 적절한 보상 없이 강제수용을 강행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현재 부온 마 투옷시 외곽에 신도시를 개발하는 부동산 개발사업이 추진되고 있는데, 그에 따라 부동산 시장이 들썩이고 커피 농장 부지가 계획에 수용되는 과정에서 각종 부정과 부패가 횡행하는 난맥상이 벌어졌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건이 벌어진 끄 꾸인현의 인민위원회가 기독교 집단 및 FULRO와 종교문제로 인한 오래된 긴장 관계에 놓여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들도 있었다.


토지 수용과 보상을 둘러싼 생계와 생존권에 대한 현실적 위기 상황과 종교적 신념에 관한 문제가 소수민족들과 당-국가 권력 사이의 오래된 정치적 긴장을 증폭시키고 폭발하게 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70여 명의 소수민족 청년들이 스스로 운명을 내걸고 인민위원회에 대한 무장 공격을 조직적으로 감행할 만큼의 정치적 동기를 형성될 수 있을 정도의 사안들인가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분분할 수 있다. 또한 사건에 대한 제한된 정보들로 인해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과거에 대한 손쉬운 상기와 인과론들이 넘쳐나며 떠이 응우옌의 소수민족, 특히 FULRO는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낙후되고’ ‘야만적인 집단들이라는 오래된 편견과 차별의 담론들이 재생산되고도 있다. 어쩌면 안타까운 폭력 사태가 벌어진 지금이야말로 떠이 응우옌지역에서의 FULRO귀환무장 항쟁이라는 시대착오적상황이 징후적으로 재현하거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에 관한 성찰과 분석이 필요한 것일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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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닥락성의 인민위원회 두 곳에 대한 공격 혐의로 검거된 소수민족 전사.

 

다시 마운틴 마돈나를 생각하며...

1960년대 중반 떠이 응우옌지역에서 FULRO가 결성되어 자신들의 전쟁을 시작했을 때, ‘그들의 전쟁으로 인해 전략촌에서의 삶과 마주하게 됐던 에데족 여성의 모습은 마운틴 마돈나라는 이름으로 사진 한 컷에 담겼다. ‘떠이 응우옌지역의 민족들을 프랑스 식민자들은 산악인(Montagnards)’, 미국인들은 그들의 편의대로 야드(Yards)’, 베트남인들은 야만인이라는 뜻의 모이(Mọi)’, 베트남 당-국가는 인구학적 셈법에 기반해 소수민족으로 호명했었다. 모두 다 붙여진이름이었다. ‘떠이 응우옌지역의 민족들이 스스로 데가라고 지칭하며 숲속에서 자유를 위해 싸우는 사람으로 정체화했던 것은, 민족들 간 차이에 대한 근본화를 넘어 지역의 역사적 공동운명체로서 주권적 주체가 되고자 하는 열망의 표현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


군사 전략적 요충지로 인식되었던 떠이 응우옌지역은 전쟁이 끝나고 사회주의 신경제 지구로 지정되며 지역경관이 급변했다. 이미 지역의 대도시는 낑족이주자들이 다수를 이루고 정치·경제활동을 지배하고 있고, 지역의 토착 민족들은 소수민족으로 도시 외곽과 오지로 밀려나 낯선 삶의 경관 안에 놓여 있다. 한편, 베트남 당-국가의 개발 계획에 따른 6개의 경제-사회지역중 하나인 떠이 응우옌은 가장 낙후되고 저발달된 지역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분단 시기와 통일이후 시기까지, 정권과 이데올로기의 차이를 불문하고 지속된 정책적인 이주, 소수민족 정착 그리고 동화정책이 가장 폭력적으로 실행됐던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그렇다면 이주, 정착, 동화로 상징되는 베트남의 민족 정책에 대한 근본적인 재고와 성찰이 필요한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인다. 호찌민의 사상으로까지 일컬어지는 민족 대단결(Đại Đoàn kết Dân tộc)’은 어쩌면 민족의 상황에 대한 진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반세기 훌쩍 넘은 그 시대, 베트남 떠이 응우옌마운틴 마돈나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었고, 어떤 고민이 있었기에 고개를 떨구고 있었으며, 현재적 삶의 도전은 무엇이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그녀와 아이들의 삶을 어떻게 잠식하고 있었는지를 함께 고민하긴 어려웠을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는 마운틴 마돈나였고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다. FULRO귀한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현재적 상황은 문제적이다. 붙잡힌 테러리스트들의 이미지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은 크지 않을 수 있다. ‘떠이 응우옌의 민족들에 대한 여전한 무지라도 인정하는 자리에서 이해, 접근, 소통의 진부한 틀을 새롭게 짜는 것은, 최소한 폭력의 시대가 회귀할 자리를 치우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심주형 _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참고자료

1) Press Association, “Inspiration for the Beatles' Lady Madonna? National Geographic” The Guardian, 2017112.

2) 에데족과 여성에 대한 논의는 다음을 참조. 심주형. "여성성, 아름다움, 소수민족 그리고 초국적 경합: 베트남 미인선발대회 열풍의 문화-정치적 함의." 세계화의 창() 동남아: 사회·문화의 혼종적 재구성, edited by 심주형 외, 서강대학교 출판부, 2018, pp. 9-54.

3) Nguyễn, Văn Tiệp. Chính Sách Dân Tộc Của Chính Quyền Việt Nam Cộng Hòa Và Tác Động Của Nó Đến Vấn Đề Dân Tộc Và Quan Hệ Dân Tộc Ở Tây Nguyên (1955-1975). Hà Nội: Tri Thức, 2020.

4) Torn Vibol, “Deputy Chief of National police assigned to northeastern border inspection amid violence in Vietnam” Khmer Times, 2023613.


심주형. "여성성, 아름다움, 소수민족 그리고 초국적 경합: 베트남 미인선발대회 열풍의 문화-정치적 함의." 세계화의 창() 동남아: 사회·문화의 혼종적 재구성, 심주형 외, 서강대학교출판부, 2018, pp. 9-54.


Nguyễn, Văn Tiệp. Chính Sách Dân Tộc Của Chính Quyền Việt Nam Cộng Hòa Và Tác Động Của Nó Đến Vấn Đề Dân Tộc Và Quan Hệ Dân Tộc Ở Tây Nguyên (1955-1975). Hà Nội: Tri Thức, 2020.


Scott, James C.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 : An Anarchist History of Upland Southeast Asia.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9. Yale Agrarian Studies Series.


Sochurek, Howard, “American Special Forces in Action in Vietnam” National Geographic, January 1965.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와 표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Bích Ngọc, “Phụ nữ Việt truyền cảm hứng cho “Lady Madonna” của The Beatles“ Dân Trí, 2017112.

사진 2. Wikipedia Commons.

사진 3. Phạm Dự, "Bộ Công an: 'Nhóm tấn công hai trụ sở xã ở Đăk Lăk là khủng bố'" VNEXPRESS, 2023년 6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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