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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월호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중공팔로군계모략단 일동회사건 자료》의 소개 (8)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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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지방법원형사사건기록 265~271문건 가운데는 당시 미생정(현재의 선린동)의 거리와 인천부 부근의 각종 시설을 촬영한 사진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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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1943년 인천차이나타운 서쪽(인천역 쪽)의 모습


사항락 등의 모의 장소로 활용된 왕배국의 집은 미생정 52번지로 그 반대편인 서쪽, 현재의 인천역 쪽에 있었다. 그래서 사진1은 미생정 서쪽 지역을 동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 지역은 현재의 농협은행 하인천역 부근으로 당시는 도로 공사중에 있었다. 미생정 서쪽 지역이 인천역에서 해안정 사거리 방향으로 가는 길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구 청국조계 지역을 관통하는 도로 작업이 진행됐다. 인천화교는 청국조계 이래 유지되어 온 자신들의 거주지를 관통하는 도로가 놓이는 것을 상스럽게 생각했다고 하는데, 그 도로 건설이 바로 이때 이뤄졌다는 것을 이 사진은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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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2. 청일조계계단과 전서경 주택


현재의 해안동서 선린동으로 올라가는 제물량로 232번길과 청일조계계단을 촬영한 사진이 여러 장 있다. 특히 사진2는 현재 인천차이나타운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전서경(錢瑞慶) 주택이 이전에 순태양복상점(順泰洋服商店)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순태양복상점의 경영자는 전금근(錢金根)으로 절강성 출신이었다. 그는 1913년 설립된 인천중화상회의 초대 의원으로 선출되어 일했다. 1923년의 연간 매상액은 78천원이었다. 1927년에는 상호명이 순태호(順泰號)로 바뀌었고, 경영자는 전신인(錢信仁)으로 절강성 근현(勤縣) 출신이었다. 1942년의 경영자는 고림여(高林如)로 절강성 진해현(鎭海縣) 출신이었다. 직공인 범홍청(笵鴻淸)은 절강성 영파현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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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3. 인천 부도정 유곽 입구

 

그리고 인천부 부도정(敷島町, 현재의 숭의동) 유곽을 촬영한 사진은 이채롭다. 부도정 유곽 관련 사진은 일본인 출입 유곽의 정문, 조선인 출입 유곽의 정문 등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3은 부도정 유곽 정문 출입구에 るなデマ らすな機密’(유언비어에 넘어가지 마라, 기밀을 누설하지 마라)의 표어가 적혀있는 것은 당시의 전시상황을 잘 설명해 준다.

 

방세능과 손건치의 검증조서에는 당시 인천을 대표하는 영화관인 인천키네마, 히사코칸(瓢館)의 사진도 있다. ‘가와무라정미소(河村精米所) 검증조서는 방세현 주택에서 방세능과 왕지신이 화정(花町, 현재의 화동) 소재 가와무라정미소 방화를 모의하고 실행한 조서이다. 화정은 19201930년대 해안 매립과 산업도로건설이 이뤄진 지역으로 이곳에는 정미소가 집중되어 있었다. 하촌정미소와 스기노정미소(杉野精米所)의 실내외 시설을 촬영한 사진과 내부 철로는 매립지인 화정의 연구에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30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류창호, 인천부세진흥회의 대인천건설 운동-192030년대 화정(花町) 해안 매립과 산업도로 건설을 중심으로-, 중앙권력과 인천의 역할(5회 인천문화재단·한국역사연구회 공동 심포지엄 발표집), 2022.4, pp. 135-152.

이정희. 2022, 중일전쟁 시기 인천화교 조직 일동회(日東會)의 항일활동-중공팔로군계모략단 일동회사건 자료의 소개를 중심으로, 중국학보100, pp.381-412.

인천시립박물관, 화교들의 항일운동-1943년 인천, 일동회 전시회 팸플릿, 2022.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2, 3. 국사편찬위원회 전자도서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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