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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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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호
산동성 최초의 교제철도 이야기 _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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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제철도는 산동성의 성도인 제남과 항구도시 청도를 연결하는 노선으로서청도의 교주만에서 시작하여 교주고밀유현 등을 거쳐 제남에 이르는 산동성에서 최초로 부설된 간선 횡단철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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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1915년 초의 교제철도 지난 역


189711월 산동에서 독일선교사가 살해된 사건인 조주교안을 빌미로 독일은 중국 측에 산동성에서 철도를 부설할 수 있는 권리와 광산 개발권을 요구하였다. 마침내 189836일 독일공사와 청조의 이홍장은 조약을 체결하고 독일이 교주만을 99년간 조차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로부터 산동성은 독일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189961일 독일은 철로공사를 설립하여 산동성 청도에서 제남에 이르는 1.435미터 표준궤 철도를 부설한다고 내외에 공표하였다. 이를 위해 독일은 중국과 합판 형식으로 산동철로공사를 설립하여, 철도 부설과 관련된 일체의 업무를 위임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61명에 달하는 공사의 직원은 모두 독일정부가 임명한 독일인으로 충당되었으며, 실질적으로 독일이 공사 및 철도의 제반 업무와 경영, 관리 권한을 장악하고 있었다. 철도 부설에 필요한 일체의 자재와 기관차 역시 독일로부터 수입하여 철도를 부설하고, 열차를 운행하였다. 이와 같이 산동철로공사는 독일정부가 특허한 식민지회사로서, 일본의 남만주철도주식회사나 인도의 동인도회사와 같이 자국 이익을 위해 철도를 부설하고 경영하였다.

 

18996월 측량을 시작하여 같은 해 923일 청도로부터 서쪽으로 철도 부설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의화단운동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마침내 1904713일 제남에 이르는 394킬로미터의 간선과 지선 등 총 440킬로미터의 선로를 준공하고, 다음 해인 1905년부터 영업을 개시하였다.

 

당초 중국과 독일 사이의 합의에 의하면, 철도의 경비 등 치안은 중국군대에 의해 유지하도록 하며, 외국병사를 고용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독일은 이러한 규정에 속박되지 않았다. 독일군대는 교제철도의 부설 공사 기간 중에 주둔하여 경비하였으며, 준공이 완료되고 열차가 개통된 이후에도 철도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계속 주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일차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제국은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관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이러한 틈을 타 중국에서 세력을 확장한 국가가 바로 일본이다. 일본은 일차대전 기간 중 중국시장에 대한 상품 및 자본 수출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였으며, 특히 중국 철도에 대한 확장에 박차를 가하였다. 대전이 발발하기 전 해인 191310월 주중 일본공사 야마자 앤지로(山座圓次郞)는 원세개와 비밀협정을 체결하고,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다수의 철도 노선을 부설하기로 합의하였다. 이후 1915년 일본은 원세개의 帝制를 지원하는 조건으로 21개 조항의 요구를 제출하였다. 여기서 산동성 내에서 독일이 부설한 교제철도 등 일련의 권익을 일본에 양도한다는 데에 합의가 이루어졌다.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은 즉시 독일에 선전을 포고한 후 191410월에 청도, 제남 등 지역을 점령하고, 독일 소유의 교제철도를 접수하였다. 이와 함께 교제철도를 산동철도로 개명하고, 철도의 보수와 관리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종전 후 54운동 등의 영향으로 1922년 워싱턴회의에서 중일 양국은 협의 끝에 마침내 교제철도를 중국에 이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결과 교제철도는 중국의 국유철도로 귀속되었다.

 

교제철도가 완공된 이후 산동성의 물류는 획기적으로 변화되고 개선되었으며, 이를 통해 산동성 전반에 걸쳐 비약적인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종래 청도에서 제남까지 물류 유통에 소요되던 9-10일의 시간이 12시간으로 크게 단축되었다. 철도의 각 역이 소재한 지역은 산동성 내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종래 산동성의 대외무역은 모두 연태항을 통해 이루어졌으나, 철도가 개통된 이후 물류가 점차 청도항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결과 연태 소재의 수많은 상호들이 청도로 이전하였다. 산동 무역의 중심이 기존의 연태로부터 청도로 이동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교제철도가 개통된 이후 전 중국에서 산동반도가 차지하는 경제적 위상 역시 크게 상승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교제철도를 점령하여 병력의 이동과 군수물자의 보급에 활용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한 이후 일본군이 철수하면서 교제철도 원래의 정상적인 여객 및 화물의 운송 기능을 회복하였다. 194962일 중국공산당이 청도를 점령하고 곧 교제철도의 복구와 정비에 착수하였다. 이후 71일 교제철도의 전 구간이 복구되어 정상적으로 운영되었다.

 


중국문화오디세이 16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이 글에서 사용한 사진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http://news.e23.cn/jnnews/2021-09-06/202109060018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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