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사진. 1950년대 최고인민법원
지난 연재에서는 중국의 1956년 상속법 제정 시도가 단순히 소련식의 사회주의를 이식하려는 것도, 국민당의 1930년 민법처럼 서구의 합리성을 바탕으로 중국사회를 계도하려는 것도 아니라, 남녀평등과 같은 혁명의 아젠다를 실제 인민의 삶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려는 노력의 산물이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상속법 초고를 좌절시킨 세력 중 하나가 바로 아직 이 1956년 초안이 인민의 삶과 괴리가 있음을 지적한 일선 법원의 판사들이었다는 점도 강조하였다.
그렇다면, 마오시기 실제 상속재산을 놓고 첨예하게 분쟁하는 상속인들 사이에 법원의 판사들은 어떻게 판결을 내렸을까? 더욱이 그들 자신의 비토로 인해 제대로 된 법조문도 없는 마당에 판사들은 어떻게 시시비비를 가리고 각각의 상속인들이 마땅히 가져야 공평한 몫을 정했을까? 이 연재의 마지막 글은 필자가 수집한 마오시기 상속재판 132건의 판결 요지문을 분석해 일선 판사들이 1956년 초안을 나침반 삼으면서도 어떻게 구체적인 사안들에 따라 나름의 상속재판 원칙들을 세워나갔는지 각 주제별로 분석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 이 과정에서 도출된 원칙들이 1985년에 처음 공포된 중화인민공화국 상속법의 근간을 이루었음도 조명해 보고자 한다.
1) 딸들과 부모 부양
필자가 수집한 132건의 사례를 보면 딸들이나, 그들의 상속권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제기한 재판이 32건으로 27%를 차지하였다. 실제 1956년 초안작성팀이 1951년과 1956년 사이 베이징과 허베이성 부근에서 발생한 135건 상속재판 사례를 분석한 자료에서 자식간 유산분쟁의 당사자 중 딸들이 65%를 차지하는 것을 봐도 딸들의 유산 몫을 둘러싼 갈등이 얼마나 첨예하였는지 알 수 있다.
한편, 지난 연재에서 살펴본 것처럼 1956년 초안 작성자들은 유산 상속을 아들/딸의 문제가 아닌, 사망자에 대한 부양(照顾)에서 유래하는 권리라는 개념으로 치환해 사망자를 부양한 사람이 유산을 상속한다는 원칙을 확립하였다. 실제, 1978년 닝허현 법원의 판결은 판사들이 지역 여론이나 친척들의 호소보다 딸의 부양 사실을 더 중요한 판결 근거로 내세웠음을 보여준다. 1974년 위원전의 부모가 사망한 후 그들이 남긴 3칸의 기와집을 둘러싸고 위원전과 그 삼촌이 되는 위쉐위엔 사이 상속 분쟁이 발생했다. 위원전은 남편과 함께 아들이 없는 부모를 봉양하였지만, 위쉐위엔은 혼인한 딸이 위씨 집안의 재산을 가져갈 수는 없다고 주장하였고, 친인척으로 이루어진 부락민들도 대개 위쉐위엔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닝허현 법원은 딸인 위원전이 부모님을 봉양했음을 근거로 상속권을 인정하며 오히려 시집간 딸에게 재산을 넘겨줄 수 없다는 삼촌과 부락민들을 봉건적인 잔재에 젖어있다며 비판하였다.
나아가, 1982년 닝보시 중급법원의 판결은 어떻게 지방 법원들이 부양의 개념을 확장해 나감으로써 여성의 상속권을 보장하려고 했는지 보여준다. 이 사안은 데릴사위가 된 천라이런의 두 아들인 천샤오리와 천샤오페이가 친가의 삼촌들인 천라이구이와 천우라이를 상대로 자신들의 할아버지 유산을 놓고 벌인 분쟁에서 발생하였다. 실상, 천라이런은 친가가 가난해 1952년에 자오아이린과 결혼해 자오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토지 개혁 때도 자오 집안의 식구로 계산되어 그에 상당한 토지를 받았다. 한편, 자오아이린은 시어머니가 사망하자, 자신의 시아버지인 천다안, 즉 천라이언의 아버지를 위해 빨래도 해주고 식사도 준비해 주었다. 분쟁은 1981년 형제의 아버지인 천라이언이 할아버지인 천다안보다 5일 일찍 사망하면서 발생했다. 천씨 형제들은 천다안의 유산 중 아버지의 몫을 자신들이 대신 받아야 한다며 자신의 삼촌들을 고소한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해 초심을 맡은 상산현 법원은 형제의 아버지가 이미 자오 집안에 데릴사위로 들어가 친부모를 봉양하지 않은 이상, 천씨 집안의 유산을 받을 수는 없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형제가 다시 닝포시 중급법원에 항소하였을때, 중급법원은 형제는 역시나 아무런 상속권이 없지만, 자신의 시아버지를 위해 빨래와 식사를 도맡았던 자오아이린, 즉 형제의 어머니는 상속권이 있다며 그녀에게 200위안의 유산을 지급해주었다. 즉, 빨래와 식사준비 역시 부양의 카테고리에 포함된 것이다. 또, 실제 인민법원의 판사들은 어릴 때 자신을 키워준 외할머니에게 외손녀가 취직해 매월 챙겨드린 용돈, 딸들이 생일날 찾아와 드렸던 선물, 장례에 동참해서 같이 준비한 딸들의 노력까지 다 이 “부양”의 카테고리에 넣어 이를 근거로 외손녀와 딸들의 상속권을 보장하여 주었다.
2) 데릴사위, 남편이 사망한 며느리, 그리고 아들 없는 삼촌을 돌본 조카의 상속권
마오시기 법원들은 딸들을 위해 적용되었던 이 부양을 통한 상속권이라는 개념을 확장해 1956년 초안이 도외시했던 사안들에까지 확장한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아내가 죽은 데릴사위와 남편이 죽은 며느리들이 그들의 처가 부모나 시부모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분쟁들이었다. 실제, 주씨 집안으로 데릴사위로 들어온 위엔허파는 1966년 장모가 사망한 후, 장모 소유의 4칸짜리 집에서 2칸을 처분해 장모의 장례비와 생활비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의 아내가 1972년 사망한 후, 처제가 나머지 2칸의 상속권을 주장하자 자신 몫의 유산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결국 법원은 중재를 통해 결혼 후 장모를 봉양했던 사실이 인정된 위엔허파에게 처제와 함께 남은 집 한 칸씩을 분할 상속받게 했다.
데릴사위보다 더 빈번히 발생했던 갈등은 아들이 사망한 후 과연 며느리가 시부모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였다. 근대법은 오직 생존한 사람만이 상속권이 있기에 남편 사망 후 며느리는 시부모와 인척관계가 소멸하여 상속권이 없거나, 죽은 남편의 몫을 대위상속(代位相續)하는 경우만이 존재했다. 그러나 마오시대의 판사들은 대위상속이라는 법적 지위에 바탕을 두기보다는 실질적인 부양이라는 실체적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며느리들에게 상속권을 부여하였다. 즉 남편을 잃은 며느리들이 사망한 시부모의 아들의 아내여서가 아니라 바로 그들을 봉양했다는 며느리 자신의 행위에 의해 상속 자격을 얻는다는 것이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상하이 법원의 1979년 판결이었다. 리우리전은 자신의 시어머니인 리야친에 대해 자신의 시아버지인 왕지밍의 유산을 요구하며 재판을 제기하였다. 실제 리우리전은 남편이 1972년에 사망한 이후에도 시부모와 한 가정에서 지냈었다. 그러나 왕지밍이 사망했을 때 시어머니는 208,000위안의 유산 중 5,000위안을 딸들에게 나눠줄 뿐 며느리는 법정 상속인이 아니라며 한 푼도 주지 않았다. 지난 호에서 살펴보았듯이 실제 1956년 초안은 며느리를 법정 상속인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안을 심리했던 상하이 법원은 리우리전이 시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일상에서 그를 도왔다는 사실을 근거로 그녀에게 1/3의 유산을 상속하도록 판결하였다. 만약 1956년 초안이 공포된 법률이었다면 상하이 법원의 판사들은 법적 자격이 없는 리우리전의 호소를 외면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이 초안이 공포된 법률이 아니었기에 판사들은 문구 그대로가 아닌, 딸들에게 적용되었던 상속과 부양의 상관관계를 확장해서 과부가 된 며느리에게 적용할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시부모를 봉양한 며느리의 상속권이 남편의 아내라는 자격이 아닌, 시부모를 봉양했다는 행위에 있다는 법적 해석은 심지어 재가한 며느리에게까지 적용되었다. 즉, 남편이 사망한 후, 재가하여 사망한 남편과의 법적 관계가 해소된 후에도 며느리들은 자신들의 보양에 대한 대가로서 사망한 재혼 전 시부모의 유산을 상속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위진리엔이 재혼 전 시어머니의 유산을 두고 벌인 재판에서 가장 명확하게 나타난다. 위진리엔은 류촨한과 1958년 결혼한 후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그러나 류촨환이 문화대혁명의 혼란 와중에 반혁명분자로 몰려 사망한 후, 이웃에 살던 리우 집안의 남자와 재혼했지만, 옆집에 홀로 남겨진 시어머니를 계속 돌보았다.
분쟁은 1971년 류촨환의 어머니이자 위진리엔의 전 시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불거졌다. 갑자기 덩용지엔이라는 남자가 나타나 류촨환의 어머니의 아들임을 주장하며 시어머니가 살던 집의 상속권을 주장한 것이다. 실상은 류찬환의 어머니 역시 류의 아버지와의 결혼이 두 번째 혼인으로, 이전 결혼에서 덩용지엔이라는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사망한 시어머니의 아들로서 상속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재혼을 통해 이미 사망자와 법적 관계가 해소된 위진리엔에겐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이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분명하였다. 우선 1971년 류촨환 사망시, 그의 재산인 가옥은 위진리엔과 시어머니에게 반반씩 상속되어, 다툼이 대상이 되는 유산은 가옥의 절반만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나아가, 시어머니의 유산이 되는 절반의 가옥에 대해서도, 더용지엔은 비록 사망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사망 후 어머니가 재혼했다고 원망하여 어떤 부양도 하지 않았기에 아무 상속권이 없다는 것이다. 반면, 비록 재혼을 통해 법적 관계가 해소되었지만 분명히 부양의 의무를 다한 위진리엔이야말로 시어머니의 진정한 상속인이라고 판시하였다. 결국 류찬환이 남긴 가옥은 위진리엔이 상속한 절반에, 시어머니 몫까지 더하여 전부 위진리엔의 소유로 결정되었다.
마찬가지로, 현과 항소법원의 판사들은 아들 없는 부부를 노년에 돌보던 조카들도 그들이 아들 대신에 대를 이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부양의 사실에 근거해 상속을 결정하였다. 판사들이 이러한 일반적인 방침에도 불구하고 특별한 주의를 기울였던 경우가 바로 아들 없는 부부를 돌보았던 조카들과 그런 부부의 딸들 간의 분쟁이었다. 바로 다싱현에 있는 진씨 집안의 사례가 그러하였다. 진지치엔과 그 아내는 아들 없이 딸만 셋이었는데, 딸들이 결혼 후 모두 도시로 떠난 1969년부터, 마을에 같이 살던 조카 진잉저우가 돌보았다. 소송은 1973년에 진지치엔이 사망하자 진잉저우가 그들이 살던 7칸 집에 대한 상속을 주장하면서 발생했다. 이에 대해 다싱현의 법원은 일단 진지치엔이 살던 7칸 집은 토지개혁 때 진지치엔 부부와 세 딸을 위해 분배된 것이기에 상속재산은 전체 가옥 7칸이 아니라 부부의 몫인 2.8칸만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이중, 0.8칸은 부모의 장례식에 100위안의 돈을 보조했던 세 딸에게 “상속”하여주고, 2칸은 이 부부를 돌본 조카에게 “보상”으로 준다고 판결하였다. 즉, 부락민들이 조카 진잉저우가 봉건적 전통에 따라 아들 대신에 상속을 받았다고 오해할 우려를 차단한 동시에, 조카의 부양에 대한 물질적 보상을 분명히 해준 것이다. 이와 같이 마오시대의 판사들은 시집가 부락을 떠난 딸들을 대신해 조카들이 노부부를 부양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아들만이 대를 잇는다는 봉건적 가부장제의 타파 사이에 균형점을 찾고자 부심했던 것이다.
3) 부모의 자녀 유산에 대한 상속순위
이와 같은 마오시기 판사들이 행했던 인민의 삶의 현장과 혁명의 아젠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는 자식의 유산에 대해 가지는 부모의 상속순위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다. 필자가 분석한 132건의 사례 중 부모가 자녀의 유산에 대해 상속권을 주장한 경우는 7건이 있었다. 흥미롭게도 이 7건의 판결 요약본을 분석해 보면, 1956년 초안과 달리 부모의 노동능력은 어떤 고려의 대상도 아니었다. 실제 판사들이 주목한 것은 자녀의 유산에 대해 상속을 주장하는 부모들의 동기였다. 즉, 부모들이 아들 사망 후 재혼한 며느리에 대한 보복 차원으로 상속을 주장한 경우 그들은 모두 패소하였다. 반면, 분쟁의 대상이 순수한 재산이었을 경우 판사들은 남은 자녀, 며느리와 부모가 유산을 일정 비율에 따라 분배하라고 판결하였다.
이러한 반 혁명적인 그리고 봉건적인 “동기”에 대한 응징의 사례는 판아이잉에 자신의 전 시아버지였던 장위에 대해 제기한 소송에 대한 순이현 법원의 1974년 일심판결과 베이징시 중급법원의 1977년 항소재판의 재심판결에 잘 나타난다. 판아이잉은 장위의 아들 장즈궈와 1972년 결혼했지만, 장즈궈는 1973년 임신한 아내와 두 부모를 남긴 채 교통사고로 사망하고 만다. 그리고 장즈궈의 직장에선 사고에 대한 보상으로 1,980위안을 지급하였다. 문제는 판아이잉이 출산 후 곧 재혼하였고, 장위는 분노해 낳은 아이에 대한 양육권을 주장하며 신혼부부가 살던 집과 보상금 전체를 빼앗았다.
그러나 이 사안에 대해 현법원은 장위의 행동을 판아이잉의 연애와 결혼의 자유에 대한 봉건적인 억압으로 간주해 집과 아이의 양육권, 보상금 전체를 판아이잉에게 지급하였다. 또 장위가 아내가 병으로 노동력이 없다며 재심을 청구했을 때도 베이징시 중급법원은 같은 이유로 이 청구를 기각하였다. 실제 판아이잉의 사례와 같이 아들을 잃은 부모가 홀로된 며느리의 재혼을 막기 위해 상속권을 주장한 다른 두 경우도 부모들은 아무런 유산을 받지 못했다. 반면, 유산분쟁의 대상이 오직 재산인 나머지 네 건은 현재 부모의 노동능력과 관계없이 부모는 모두 일정한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었다.
이처럼, 마오시기의 판사들은 구체적인 법조문에 구애받지 않고, 각 사건이 가지는 당사자들 사이의 관계, 상속 분쟁 뒤에 숨어있는 의도 등에 따라 판결을 내렸다. 아마 1956년도 초안에 반발했던 일선 법원의 판사들처럼, 그들은 조문화된 규정은 이런 삶의 구체적인 맥락을 간과하게 만든다고 보았을지도 모른다. 동시에 그들은 아들이 사망한 부모들이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잃어버린 봉양의 기회”에 대해서도 분명히 인식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남녀평등이라는 원칙에 지나치게 집중하다 현장의 맥락을 무시했던, 그래서 현재 노동력의 유무에 과중한 비중을 두었던, 1956년 초안의 한계를 보완하였던 것이다.
4) 한정상속과 빚
지금까지 소개한 판례를 보면 마오시기의 판사들은 어떤 추상적 원칙이 보장하는 기계적 공평함보다는 각각의 사안이 가지는 구체적인 상황 아래에서의 공정함을 추구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단순히 며느리나 자식이라는 관계가 아닌 그들이 사망자를 돌보았는가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상속의 근거로 삼았고, 사망한 아들의 유산을 두고 분쟁하는 부모의 동기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해결할 수 없는 사안도 분명히 존재했는데 바로 사망자가 가진 빚과 상속재산과의 관계였다. 앞의 연재글에서 살펴보았듯이 판사들은 한정상속이라는 근대법의 원칙과 고리대에서 인민을 구한다는 명분이 자칫 농촌의 채무/채권 시장을 교란해 오히려 빈궁한 농민이 제대로 빚을 얻을 수 없게 만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래서인지 판사들은 필자가 수집한 상속재판 사례에선 예외 없이 사망자의 빚을 상속인들이 모두 갚아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일선 법원은 과연 사망자의 채무를 상속인들이 상속액의 비율에 따라 기계적으로 나누는 것이 옳은지, 누군가 갚아야 한다면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이 갚아야 하는지, 아니면 상속을 받는 어린아이들도 채무 변제의 의무를 져야하는지 고민했다. 이러한 고민의 흔적이 가장 잘 드러나는 판례가 바로 뤼빙싱의 유산과 채무를 놓고 벌어진 재판이었다. 뤼빙싱은 문화대혁명 기간 감옥살이를 하다가 1976년 출소하여 1977년 자오푸난과 결혼하였다. 얼마 후 그의 혐의가 무죄로 판결이 나면서 그는 국가로부터 4,500위안을 배상받게 되었다. 문제는 그가 1981년에 사망하면서 남긴 유서가 공개되면서 불거졌다. 그는 자신의 재산 중 전처와 사이에서 나은 세 아이들에게 각각 600, 900, 200위안을 상속해주며, 자신의 어머니에게 1,400위안 그리고 형에게 100위안의 현금과 자신의 시계를 남겼다. 반면 아내 자우푸난에겐 그와 사이에서 낳은 뤼뤼의 양육권과 뤼뤼의 몫으로 남긴 1,100원에 대한 감독권만을 남겼다. 나아가 자신이 자우푸난과 함께 산 집에 남은 차입금과 장례비용 등 366.59위안의 빚은 아내에게 갚도록 하였다.
자오푸난이 이 유서의 효력에 대해 재기한 재판에 대해 난통시 법원은 일단 뤼빙싱의 4,500원은 자신이 자오푸난과의 결혼 전 옥살이에 대한 배상금이기에 뤼빙싱의 개인재산으로서 그가 처분의 전권을 지닌다고 보았다. 반면 그의 빚 변제에 대해서는 성인으로서 노동력을 지닌 자오푸난과 뤼빙싱의 전처 자녀 중 성년이 된 둘이 함께 변제해야 한다고 판결했다. 판결에 의하면 이 둘에 대한 유산은 빚 변제에 대한 의무를 동반한 유산이지만, 노인인 어머니와 어린 자녀들에게 남긴 돈은 그들의 생활비에 불과하다는 해석이었다. 다른 판결에서도 어린이는 비록 유산을 받더라도 부채변제에서 제외시켜 주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이런 판결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을 잃고 어린아이와 남은 자오슈지가 시어머니와 남편의 유산을 놓고 벌인 1975년 재판의 판결도 일단은 이러한 경향을 띠었다. 미윈현 법원은 24살에 불과한 자오슈지가 재혼을 한다는 전제하에 그녀에게 집에 속한 모든 동산과 아이의 양육권, 그리고 현금 400위안을 주고, 시어머니에겐 320위안의 현금과 집을 주며 아들의 모든 부채를 떠맡도록 판결했다. 법원으로서는 자오슈지의 재혼을 돕기 위해 동산과 현금을, 어머니에겐 부동산을 준 것이지만, 이 판결은 이 안건을 판사용 학습서에 실은 편집자에 의해 비판받았다. 편집자는 부채의 양도 결정하지 않고 어머니에게 떠맡긴 것도 잘못이지만, 자오슈지, 아들, 그리고 남편의 어머니에게 재산과 부채를 1/3씩 맡기는 게 공평하다고 평가하며 앞으로 판사들이 이러한 점에 유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마오시대 법률전문가들과 판사들 사이에서도 이처럼 사망자의 부채처리에 대해선 이견이 존재했던 것이다.
비록 그들이 모든 문제에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혁명의 아젠다를 인민의 실생활 속에서 녹여낸다는 1956년 초안의 목표는 이처럼 일선 판사들에 의해 더 구체적이고 풍성하게 발전하였다. 실제 1980년대 초반에 이르면 다양한 사안들에 대해 일정한 원칙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실제 1983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상속법 제정을 결정했을 때 이들의 실질적인 경험과 원칙들은 바로 상속법의 근간을 이루게 되었고, 결국 1985년 발효된 상속법은 1956년 초안의 발전적 완성이라는 모습을 띠게 되었다.
아래 표는 바로 일선의 판사들이 아직 미숙하다고 거부했던 1956 초안과 거의 30년후에 제정된 상속법의 각 조항을 비교해 그들의 경험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반영되었는가를 보여준다.
1956 중화인민공화국
상속법 초고1)
1985년 중화인민공화국 상속법2)
상속인의 범위와 순위
상속인의 순위는 아래와 같다.
1. 배우자, 자녀, 양자녀, 노동력을 상실한 부모
2. 노동능력이 있는 부모
3. 형제자매
4. 조부모와 외조부모 (16-17조)
*사망자로부터 생계를 지원받던 사람은 어느 정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20조)
*양자녀의 경우는 같이 거주하고 부양의 행위를 하였을 경우에 한해 상속권을 인정한다.(16조)
상속인의 순위는 아래와 같다.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 자매, 조부모, 외조부모
*이 조항에서 자녀는 합법적인 자녀, 혼외자, 입양자, 사망자에 의해 부양받거나 부양한 의붓자식을 포함한다.
*이 조항에서 부모는 친부모, 양부모, 그리고 의붓부모를 포함한다. (10조)
*남편을 잃은 며느리와 아내를 잃은 데릴사위는 그들이 시부모와 처부모의 봉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경우 1순위의 계승자로 본다.(12조)
*상속에서 남녀간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9조)
상속비율
동일 순위에 있는 자는 모두 동일한 비율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러나 상속인의 상호간에 단결과 호조의 정신에 따라 각 피상속인의 재정상황과 사망자에 대한 부양의 정도에 따라 상속액을 증감 할수 있다.(19-20조)
*동일 순위에 있는 자는 모두 동일한 비율로 나누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상속재산 배분시 노동능력이 없거나 특별한 재정적 곤란에 처한 이에게 적절한 고려를 해주어야 한다.
*상속재산 배분시 사망자의 부양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거나 사망자와 동일거주지에 거한 한 사람에게 더 많은 몫을 줄 수 있다.
*상속재산 배분시 사망자를 부양할 능력이 되고 부양할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소홀히 한 경우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거나 적은 양을 분할해 줄 수 있다. (13조)
*상속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망자가 돌보았거나, 사망자의 부양에 지대한 공헌을 한 사람에게 적절한 재산을 분할해 줄 수 있다.(14조)
*배우자 사망후 재혼한 사람은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고 상속재산을 처분할 수 있다.(30조)
한정승인 및 부채
상속인은 실제 상속액 한도내에서만 피상속인의 개인 부채를 책임진다.(29조)
*상속인들은 법이 정한바 모든 세금과 빚을 상속받은 재산의 실질 가치한도 내에서 청산해야한다. 단 상속자가 자발적으로 그 한도를 넘을수도 있다.
*상속을 포기한 자는 채무와 법이 정한 세금을 낼 의무에서 면탈된다.(33조)
즉, 일선 법원의 판사들이 고민했던 딸들이나 남편 잃은 며느리, 아내 잃은 데릴사위, 아들 없는 삼촌부부를 돌보던 조카들이 마땅히 받아야하는 그들의 정당한 몫에 대한 원칙이 9조, 10조, 12조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또 한정승인의 원칙을 수용하면서도 아이와 노인들의 몫을 보호하기 위해 노동능력 없는 이들에 대한 더 많은 재산 분배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속인의 범주를 논하면서 단순한 사망자와의 법적 관계가 아니라 사망자를 부양하고 돌보았는지라는 실질적인 관계에 중점을 두었고, 13조를 통해 이 의무를 소홀히 한 사람의 경우 상속권 전체를 박탈할 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바로 한국의 일명 구하라법이 추구하려는 일상에서의 정의,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공정함의 법적 근거를 발견한 것이다.
이와 같이 서구학자들이 실용적이라고 그토록 칭송해 마지않는 중국 상속법이 실은 동시에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던 마오시기 “중구난방”격의 상속재판 관행 속에서 탄생했음을 알 수 있다. 즉, 마오시기 판사들은 서구가 나름의 합리성과 근대성에 기초해 쌓아 올린, 어느 곳에나 적용할 수 있는 황금율의 법 원칙를 찾았던 것이 아니라, 남녀평등과 봉건제 해체와 같은 그들 나름의 혁명적 원칙과 인민들이 일상에서 납득할 수 있는 정의 사이에서 균형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소위 혁명적 근대성(revolutionary modernity)의 실질적 모습이 단순한 원칙이나 추상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민의 삶을 규정짓는 법의 형태로 온전히 드러나게 되었다.
안병일 _ 미국 새기노밸리주립대 역사학부 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1) 中华人民共和国继承法(草稿) (1956), 河北省档案馆 1051-1-171.
2) Law of Success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 last modified Mar. 28, 2008, http://www.asianlii.org/cn/legis/cen/laws/losotproc426/.
* 이는 필자가 Modern China 47 no.1 (2021)에 발표한 “Searching for Fairness in Revolutionary China: Inheritance Disputes in Maoist Courts and Their Legacy in the PRC Law of Succession”을 요약 정리한 글이다.
** 이 글에서 사용한 표와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https://www.thepaper.cn/newsDetail_forward_13283652
표. 필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