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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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이주민 집단인 화교들은 타지에서 생존하고 정착하기 위해서 자치단체를 형성하여 생활하였다. 인천도 19세기 말의 중화회관을 시작으로 비록 그 명칭은 시기에 따라 바뀌었지만 화교자치단체는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 명칭 뿐 아니라 이들 단체의 성격 또한 시대 및 정치적 풍토에 따라 계속 변화하였는데, 그 중심에 있던 화교지도자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화교자치단체의 장(長)은 화교자치단체 내부의 업무 뿐 아니라 대외적으로 화교들의 안전과 권익이 보장될 수 있도록 활동할 의무가 있었다.
이번 호에서 소개할 자료는 바로 인천화교협회1) 가 실시한 제2회 정·부회장 선거에 관한 사진이다.
선거는 1962년 9월 16일(일) 오전 10시에 인천화교소학 교정에서 진행되었다. 정·부회장 후보는 총 17명으로2) , 이들은 각 리린(里隣)3) 에서 4명씩 추천하여 선출되었다. 이날 선거에 참여한 화교들은 총 1,129명이었다. 선거 장소에 도착한 화교들은 우선 자신이 속한 구역의 명부에 등기를 하고 회장용, 부회장용 투표용지를 각각 2장씩 수령하여 투표를 진행하였다.
개표 결과, 제2회 정·부회장 선거에서 전임 회장이었던 우홍장(于鴻章)이 다시 회장이 되었고, 진수근(陳守勤)과 조가치(刁家治)가 부회장에 뽑혔다. 우홍장은 무려 총 946표를 얻었는데, 이를 통해 그가 인천화교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신임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우홍장은 이후 1970년까지 협회장을 연임하는 등 인천화교사회의 대표적인 화교지도자로서 활동했다. 우홍장은 당시 유명한 중식당인 공화춘의 사장이었다.
한편, 협회의 선거관련 규정에 따르면 인천에 6개월 이상 거주하고 만 20세 이상인 남녀 화교들은 모두 투표권을 갖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선거 관련 사진에서 여성 화교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여성 화교들도 투표권은 있었으나 혹시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협회의 정치적 행사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또 선거 규정에는 ‘호주(戶主)가 대리 투표를 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는데, 아마 호주인 남편이 부인을 대신하여 투표권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모습은 남성 중심 사회였던 당시 화교사회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 1962년 인천화교협회 정•부회장 선거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를 살펴보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거에 참여한 화교의 수가 1,129명이었다는 것은 당시 남성 화교들의 인구수가 약 1,800여 명 정도였던 것을 고려해볼 때, 20세 미만의 청소년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성인 남성이 선거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선거에 대한 화교들의 열정은 매우 컸다. 이는 화교사회의 발전에 대한 그들의 기대와 관심의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민주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코디네이터
1) 1960년 9월, 기존의 인천화교자치구는 한국인천화교협회(韓國仁川華僑協會)로 개편되었다. 협회는 회장 1인과 부회장 2인, 이사 12인과 총무, 교무(僑務), 외교, 반업(飯業), 농업, 상공, 문화, 청년, 부녀의 9개 과(課)와 재정감독 및 조해위원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2) 17명의 후보는 순서대로 우홍장(于鴻章), 왕영전(王營田), 모본총(慕本聰), 조가치(刁家治), 왕영화(王永華), 김지성(金志成), 주복유(周福維), 송배기(宋培基), 팽진가(彭晉嘉), 여성원(呂聲遠), 이영은(李永恩), 진수근(陳守勤), 장희성(張希聖), 손진항(孫振杭), 주대문(周大文), 왕소해(王昭楷)이다.
3) 당시 인천화교협회는 화교들이 거주하는 지역을 7개의 리(里)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나눠 53개의 린(隣)으로 구역화하여 관리하였다.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에서 진행한 '인천화교협회 소장자료' 디지털 아카이빙 자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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