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8월 28일 청명한 가을 날씨의 토요일 오후에 인천시 동구의 배다리헌책방거리를 찾았다. 전국 각지의 동네 서점과 고서점이 사라져 가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곳에는 아직 다섯 곳의 고서점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 <길>, <아벨서점>, <대창서림>, <집현전>, <한미서점>. 1950년대부터 이곳에 서점이 들어서기 시작했으니 그 역사가 70여 년이 다 되어간다. 이들 서점 가운데 1955년에 개점한 <한미서점>에 코로나19 시국인데도 불구하고 유독 손님이 많았다. 서점의 외관이 온통 노란색으로 색칠해져 있어 다른 서점과 차별되는 특징이 있지만, 정작 이 서점이 유명해진 것은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지였기 때문이다. tvN이 2016년 12월부터 2017년 1월까지 방영한 <도깨비>는 시청률 20%대를 기록하는 최고의 인기 드라마였고, 중국에서 <꾸이꽈이(鬼怪)>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어 중국인들의 마음도 사로잡았다. <한미서점>이 <도깨비>의 촬영지의 하나로 알려지면서 국내뿐 아니라 중국, 세계 각지에서 여행객이 이곳을 찾고 있다.
사진 1. 배다리헌책방거리의 모습
그런데 <한미서점> 일대는 일제강점기 때 화교가 경영하는 호떡집이 여럿 있었다. 호떡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납작하게 만든 후 설탕을 넣어 구운 ‘호떡’만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중국식 빵과 과자 그리고 만두를 모두 포괄하는 말이었다. 당시 호떡의 가격은 개당 5전(당시 노동자의 하루 임금은 50전-1원)의 저렴한 가격에다 간편하게 가지고 다닐 수 있어 조선인과 화교 노동자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호떡을 판매하는 곳을 호떡집이라 했다. 1930년 10월 전국의 호떡집 수는 1,139개, 인천부에서 영업하고 있던 호떡집은 33개였다. 대부분의 호떡집은 화교에 의해 직원 2-3명을 두거나 가족 단위로 운영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배다리 일대는 행정구역상으로 금곡리(金谷里)에 속했다. 일본인과 화교가 일본전관조계와 청국전관조계를 개설하면서 그 일대의 상권을 장악하자, 조선인은 자연히 현재의 송림동, 송현동 등지 일대로 밀려났다. 서울 시내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과 화교가 주로 거주하면서 영업하는 서울역과 명동 일대의 ‘남촌’과 종로 일대의 조선인 집단 거주지인 ‘북촌’으로 나눠져 있었는데, 인천도 그랬던 것이다. 그리고 <한미서점>에서 가까운 곳에는 조선 첫 성냥공장으로 유명한 조선인촌주식회사가 1917년에 설립되어 있었고, 조선인 여공을 중심으로 400여명이 일하고 있었다.
화교 호떡집이 배다리 일대에 세워진 이유는 조선인 소비자가 이처럼 많았기 때문이었다. 호떡집 가운데 화교 연규산(連奎山)과 모종이(慕宗二)의 호떡집이 있었다. 연규산의 호떡집은 <한미서점> 맞은 편의 <인천스포츠> 상점 근처에 있었다. 모종이 호떡집은 <한미서점>과 <아벨서점> 사이에 위치하는 <길> 서점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
사진 2. 1931년 인천화교배척사건의 검증 지도
그런데 1931년 7월 3일부터 터지기 시작한 인천화교배척사건이 두 호떡집에 먹구름을 드리웠다. 지린성(吉林省) 창춘(長春)의 만보산 근처에서 수로공사를 하던 조선인 농민에 대한 중국 관헌의 탄압을 전한 『조선일보』 1931년 7월 3일자 호외가 경인철도를 통해 운송되어 인천에 배포되면서 사건은 시작됐다. 당시 『조선일보』 인천지국장인 최진하(崔晉夏, 기자)는 이 호외 신문의 배달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당일(2일) 본지 석간은 18시경 배달을 마쳤다. 같은 시간 경성 본사로부터 전화가 와서 만보산사건에 관한 호외를 22시경의 열차로 송부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배달부를 불러 대기하라고 했다. 잠시 뒤 마지막 열차로 상인천역(上仁川驛, 현재의 동인천역)에 도착했다. 심야이기도 하여 다음 날 아침 배달시키려 했지만, 신문의 사명은 조금이라도 빨리 독자 및 세상에 보도하는 것이 최대의 임무이며 또한 타 신문보다 먼저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곧바로 배달하게 되었다.”
이 호외 신문은 23시 50분 상인천역에 도착하여 지국의 배달부에 의해 구독자 320명에게 배달된 것은 3일 오전 0시경이었다. 이 호외 신문이 배달된 뒤 1시간이 지난 1시 10분 인천부 용강정(龍岡町, 현재의 인현동)의 중화요리점이 조선인 5명에게 습격당한 것을 시작으로 2시경에는 율목리(栗木里, 율목동), 중정(仲町, 관동), 외리(外里, 외동)의 중화요리점 및 이발소가 조선인에게 잇따라 습격당했다. 8시에는 부천군 다주면(多朱面)의 화농 왕모, 9시에는 율목리의 호떡 화교 행상이 습격을 받고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폭동은 3일 오후 더욱 확대되었다. 시작해(始作偕), 최재신(崔齋信), 장유명(張維明), 류유청(劉維靑) 등의 화교가 조선인의 폭행과 투석으로 부상을 당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게다가 21시 45분 약 5천 명의 군중이 인천부청(현재의 중구청 자리) 앞에서 함성을 지르고 지나정(支那町, 현재의 인천차이나타운)을 습격하려 했지만 경찰의 제지로 실패했다. 22시 30분에는 약 100명의 군중이 인천경찰서 앞에 집합하여 검거된 자를 탈환하려 했다. 경찰에 의해 해산된 군중은 화정(花町, 신흥동) 부근의 화교 가옥에 투석하고, 내리(內里, 내동)의 중화요리점인 평양관(平壤館) 부근에서는 수천 명의 군중이 화교 가옥에 투석하는 등 폭력을 휘둘러 경계중인 경찰관 1명과 기마 1마리가 부상을 당했다.
사진 3. <경성일보> 7월6일자 신문에 보도된 인천화교배척사건
4일 21시 수천 명의 군중이 화교 가옥을 습격하여 파괴, 더욱이 경찰관에 반항하여 외리파출소에 쇄도, 유리창을 파괴하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공권력에 도전하는 양상을 보였다. 그제서야 경찰관은 칼을 뽑아서 필사의 진압을 했으며 5일 2시 경성에서 급파된 경찰관 51명의 지원으로 점차 군중을 해산시킬 수 있었다. 이후 폭동은 점차 진정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이 파악한 인천화교배척사건의 화교의 인적 피해는 사망 2명, 중상 2명, 경상 3명이었다. 평양부의 화교 인적 피해가 사망 96명, 중상 33명, 경상 63명에 비하면 훨씬 적었지만, 만약 지나정이 습격을 당했다면 평양과 비슷한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사망자 2명 가운데 한 명은 바로 배다리 호떡집의 주인 연규산이었다. 연규산은 3일 15시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리고 지나정으로 피신하려 했지만, 상황이 여의롭지 못해 호떡집 직공들과 같이 송림리(松林里, 송림동)의 화교 왕승휘(王承輝)의 집으로 피신했다. 바로 그곳에서 조선인 군중의 습격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또 다른 사망자는 모종이 호떡집의 직공인 이준길(李俊吉)이었다. 호떡집에 숨어 있다 습격을 받고 외리파출소 쪽으로 도망치다가 군중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상대적으로 안전했던 지나정을 향해 달려가다가 참변을 당한 것이다.
두 명의 살해에 가담한 피고인은 33명이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25세로 모두 남성이었고, 직업은 노동자, 직공 그리고 무직이었다. 1932년 4월 15일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서 제2심 판결을 받은 피고는 조기영(趙己榮·27세·운송점 인부), 최개천(崔蓋天·25세·정미소인부), 임부성(林部成·22세·소기름상인), 문원배(文元培·22세·성냥회사직공), 이옥돌(李玉乭·20세·성냥회사직공), 신태돌(申泰乭·23세·날품팔이), 이신도(李神道·22세·정미소인부), 박범용(朴凡用·26세·마차부) 등이었다. 이들에게 구형된 형량은 조기영 10년, 신태돌‧이신도‧박범용 각 8년, 이옥돌 7년, 임부성 6년, 문원배 5년, 최개천 4년이었다. 이들은 검찰의 심문에서 대체로 “사람의 말에 의하면, 만주 거주 조선인이 많이 중국인에게 살상되었기 때문에 조선 거주 중국인에게 복수해야 한다.”는 답변을 했다. 하지만, 만보산사건으로 인해 살해되거나 부상을 입은 조선인은 없었다. <조선일보>의 크나큰 오보였던 것이다.
인천화교사회는 1931년 8월 22일 인천화상상회가 중심이 되어 인천화교소학 운동장에서 여선우난교포대회(旅鮮遇難僑胞大會)를 개최했다. 화교배척사건 때 사망한 화교의 영혼을 달래고 조난을 당한 화교들을 돕고 위로하기 위한 행사였다. 그러나 ‘가해자’인 인천의 조선인 사회는 연규산과 이준길의 원혼을 풀어주거나 추모하는 행사를 열지 않았다. 물론 화교배척사건의 배후에 일본 제국주의의 만주 침략 야욕과 조선인과 중국인을 이간시켜 조선의 독립을 저지하려는 일제의 저의 그리고 조선총독부 당국의 폭동 진압 사보타주 등이 작용한 것은 여러 자료에 의해 사실로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고 조선인 ‘가해자’의 책임이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연규산과 이준길은 누군가의 가족이자 귀중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연규산과 이준길의 삶의 터전 근처에서 드라마 <도깨비>의 촬영이 있었다는 것은 우연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원혼이 아직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도깨비’로 이승에서 떠돌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난 8월 5일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가 주최한 만보산사건‧1931년화교배척사건90주년국제웨비나에 참가하여 발표한 정병욱 고려대 교수는 “인천의 지인들에게 이러한 사건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역사를 기억하기 위한 표석이라도 세워달라고 했지만 아직도 아무런 답이 없다.”고 했다. 인천의 시민사회가 여기에 답할 차례가 아닐까.
【한반도화교와 베트남화교 마주보기 15】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참고문헌
정병욱(2019), 「1931년 식민지 조선 반중국인 폭동의 학살 현장 검토」, 『史叢』 97, pp. 113-155.
이정희(2016),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회』 135, pp. 283-319.
이정희‧송승석(2015), 『근대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 학고방.
李正熙(2012), 「1931年排華事件の近因と遠因」, 『朝鮮華僑と近代東アジア』, 京都大學學術出版會, pp. 417-477.
장세윤(2003), 「만보산사건 전후 시기 인천 시민과 화교의 동향」, 『인천학연구』2-1호, pp. 189-235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필자 촬영
사진 2. 정병욱(2019), 「1931년 식민지 조선 반중국인 폭동의 학살 현장 검토」, 『史叢』 97, p. 124.
사진 3. <경성일보> 7월 6일자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