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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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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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가 언어적 구성물임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언어가 어떤 맥락 속에서 사용되었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역사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부분의 개념어들은 시대변화에 따라 그 의미구조 역시 변화해 왔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 초, 홍콩 중문대학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디지털 인문학적 방법 즉 텍스트 마이닝을 기반으로 한 연구(한국에서는 최근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였던 ‘관념사 연구’는 매우 흥미로운 시도였다.
이들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까지 중국에서 민주라는 용어는 크게 4개의 범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첫째는 민지주(民之主) 즉 황제를 가리키는 경우이고, 둘째는 민주지(民主之)의 의미 즉 민이 주재한다는 의미로 인민의 지배와 통치를 가리키는 경우. 셋째는 세습군주제와 대립되는 정치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민주지국’ 등과 같은 복합어 형태로 사용되었다. 마지막 넷째의 사용방식은 미국의 대통령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민선 국가 최고지도자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그래서 민주라는 어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맥락을 잘 들여다 볼 필요가 있었다.
원래 Democracy의 번역어로서의 ‘민주주의’라는 어휘는, 전통적 동아시아 가치체계에서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측면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이 말이 특정 정치체제만을 의미하기 보다는 보다 광의의 사회적 변화까지 포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용에 있어서는 다양한 편차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에서 신해혁명 이후 ‘민주’라는 어휘의 사용이 ‘공화’와 함께 세습군주제와 대립되는 근대국가의 기본이념으로 받아들여진 이후에도 그 사용되는 맥락에 따라 다양한 분열이 나타나게 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민주라는 표현 대신에 “허군공화(虛君共和)”를 고집했던 변법파의 리더 캉유웨이의 논리가 ‘민주공화’라는 표현에 밀려 사라지게 된 것은 의미심장하다. ‘허군공화’가 사용되는 맥락과 ‘민주공화’가 사용되는 맥락의 차이는 곧 그 표현을 사용하는 정치집단의 지향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쨌든 민주라는 어휘는 이러한 과정을 거쳐 수입된 언어로서 사전적 개념화의 길을 걷게 되었고 일종의 교과서 지식으로 정의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실제 그 어휘가 적용되는 현실 속에서는 항상 권력이 그 의미를 규정하게 되었고, 이는 당연히 사회적 갈등의 원인이 될 수 있었다.
5/4운동 99주년을 맞아 베이징 대학에서는 사소한 그렇지만 의미 있는 소란이 있었다. 문혁시기 베이징대학 생물학과를 다니다가 고초를 겪었던 판리친(樊立勤)이 시진핑의 장기집권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내어 건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대자보를 내어 건 판리친은 1966년 캉성(康生)의 후원 하에 등장한 조반파로 베이징대 철학과에 다니던 니에 위안츠(聶元梓)와 대립했던 인물로 덩샤오핑의 큰 아들과 절친한 친구로 알려져 있다. 그의 대자보는 약간의 소란을 거친 뒤 바로 제거되었으나 스마트폰에 찍힌 24장짜리 그의 주장은 전 세계로 알려졌다. 이 대자보에서 그는 시진핑의 임기제한 철폐를 개인숭배시도로 비판하면서, 그 가장 큰 부작용으로 폭력 등을 통한 공포를 동원하여 다른 견해를 억압함으로써 인민민주주의와 당내민주제도가 ‘엄중 파괴됨’을 우려하고 있다. 여기서도 시진핑이 말하는 민주주의와 판리친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단일한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경쟁’하는 언어로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역사화된 개념을 둘러싼 이러한 경쟁은 그 해석의 주도권을 둘러싼 경쟁을 유발할 수밖에 없고,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지 사회적 대립과 갈등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합리적 토론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최종적 판단은 ‘힘’에 의해서 이루어질 것이고 그것은 상당한 사회적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중국만의 일은 아니다.
판리친의 대자보 첫 장
최근 한 연구소의 조사는 한국에서의 사회갈등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있으며 특히 진보와 보수 간의 이념갈등이 가장 심각한 갈등 유형으로 인식되었음을 지적했다. 각종 미디어에 넘쳐나는 말들 속에서도 그러한 조사는 어느 정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하나의 함정이 존재한다. 언어로 표현된(혹은 우기는) 진보와 보수란 말이 어떤 실재를 표현하는 것인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진보 혹은 보수를 정의하기란 한국사회에서 정말 쉽지 않다. 그래서 이러한 조사는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인식을 기반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서 실체를 제대로 드러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갈등은 존재하고 그러한 갈등이 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교육부가 새로운 역사교과서 집필기준을 제시하면서 다시 논란이 된 ‘자유민주주의’와 ‘민주주의’의 문제 역시 그렇다. 이 문제는 사실은 기본개념의 문제인데도 진영논리로 해석됨으로써 진보와 보수의 대립문제로 환원되었다. 사실 민주주의의 언어적 표현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점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정치적 혹은 역사적 개념 규정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떠돌아다니는 담론들 속에서 공화니 민주주의니 하는 말들은 사용자들의 욕망 혹은 의도와 관련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이 허용되는 것이 민주주의다.
한국에서의 자유민주주의는 문자와는 다르게, 실제로는 우리가 해방 이후의 역사 속에서 경험해 왔듯이 ‘반민주’의 다른 표현이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정권의 어용정당이 ‘민주공화당’이라는 당명을 사용했던 데서도 그것은 분명히 나타난다. 물론 4월 혁명으로 역사적 유물로 사라진 ‘자유당’이라는 정당도 매우 형식적 일부영역을 제외하면 족벌정치, 부패, 권력남용 등 자유와 거리가 먼 정당이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12.12 군사쿠데타를 일으켜 헌정질서를 무력으로 정지시키면서 권력을 장악했던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소리 높여 주장했다는 사실이다. 유신헌법이라는 ‘사이비 법률체계’에서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 역시 사실은 권력자의 자의적 법집행과 독재 권력의 오/남용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도구적 논리에 불과하였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사실상 정적을 식별하는 도구적/정파적 어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한국의 언어체계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실제로는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인권을 무시하며, 권력을 사리사욕을 위해 사용하는 특정 집단이 자신들의 권력독점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용어였던 셈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의 논리에는 자유도 민주주의도 존재하기 어려웠다. 그저 ‘배제’와 ‘적대’의 논리가 그 중심을 이루게 될 뿐이었다. 독일 출신의 사상가 한나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면 이러한 자기논리의 신성화는 “상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당대 시민의 능력을 파괴”하는 “이데올로기적 테러의 인증서”였다.
공자의 ‘정명론’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이미 역사적으로 그 의미가 충분히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용어들을, 독재 권력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자의적으로 규정하고 절대화함으로써 사회적 혼란과 대립을 부추긴 경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의 ‘교도민주주의’, 파키스탄 아유브 칸의 ‘기본민주주의’, 공산권 국가들의 ‘인민민주주의’, 한국 유신정권 하 박정희의 ‘한국적 민주주의’ 등 다양한 표현이 존재했는데, 이러한 민주주의들은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탈을 쓴 독재였다. 중국의 “중국적 특색을 지닌 사회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에 있다.
그래서 역사가는 ‘자유’니 ‘민주주의’ 혹은 ‘사회주의’니 하는 말에 현혹되기 보다는 그것이 실체를 드러내는 현실적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도 각 논란의 맥락을 선명하게 찾아내기 쉽지 않은데, 역사화된 과거의 경우는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역사가가 사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료가 역사가를 선택’하는 게 역사연구의 현실인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역사가로 살아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하다.
【김태승의 六十五非 2】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이미지 출처
Boxun.com 2871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