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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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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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에 걸친 항일전쟁, 반세기 내내 지속된 국공내전. 이렇게 보면, 20세기 전반의 중국역사는 언필칭 전쟁사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지긋지긋한 전란의 소용돌이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란 미완의 통일중국이 들어서게 되면서 잠잠해지기를 기대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毛澤東)은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올라 조금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하지만, 당일에도 중국 남부지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다행히 건국기념식은 평화롭게 마무리되었지만 위협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타이완으로 쫓겨난 장제스(蔣介石)는 폭격기를 동원해 ‘그들만의 기념식’을 아수라장으로 만들 계획을 세웠었고, 미국도 타이완 폭격기의 중간급유를 지원하기 위해 부산의 미 공군기지 사용을 허가한 상태였다. 물론, 이러한 시도는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
어쨌든 1949년 이른바 ‘신(新)중국’이 건립되었지만, 전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또 다른 새로운 전쟁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1950년 인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중국은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돕는다)’의 기치 하에 대규모 지원군을 파병했고, 1950년대 말부터 노정된 중소분쟁은 급기야 1969년의 무력충돌로 비화되기까지 했다. 이렇듯 중국은 20세기 중반에도 평화와는 한참 거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복잡한 국제도시에서 한적한 국내도시로 물러앉은 하얼빈이 다시금 국제무대에 복귀하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그 동아시아 현대사의 충돌과 갈등의 한복판에 자리하게 되면서부터이다. 하얼빈은 한국전쟁 시기에는 동북지역의 핵심 병참기지의 역할을 수행했고, 중소갈등 시절에는 헤이룽강(黑龍江)을 사이에 두고 140만 명에 달하는 중소 양국의 대규모 병력이 집결해 대치하는 일촉즉발의 소리 없는 전장이 되었다. 철도가 낳은 식민의 도시가 어느새 전쟁의 도시로 화하는 순간이다.
한국전쟁과 중소분쟁을 겪으면서 중국은 미국은 물론이고 소련과도 적대 관계에 돌입했다. 이로 인해, 중국은 국제적 협력에 필요한 거의 모든 네트워크에서 배제되고 말았다. 미국과 소련으로 대표되는 양대 진영으로부터 모두 고립된 중국공산당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력갱생’의 길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중국 인민의 처절한 희생이 뒤따라야 했다.
중국이 미·소 강대국과의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현대적 시공간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간과 자연의 전쟁’을 시작한 것도 이 즈음이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전쟁과는 결이 다른 것이었다. 농업국가 중국에서 인민이 싸울 대상은 바로 자연환경이었고, 그 싸움에서 승리한 기록은 매일매일 보고되었다. 보고서의 대부분은 자신을 희생하면서도 자연과의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는 노동영웅의 아름다운 신화들로 채워졌다. 또 그 신화적 순간이 담긴 극적인 사진들도 꽤 많이 전해지고 있다.
본래 ‘인간과 자연의 전쟁’은 공산당지도부가 항일전쟁 시기부터 국공내전 초까지 농촌에 위치한 ‘수도’ 옌안(延安)에서 간부, 군대, 농민 등에게 자력갱생을 강요하며 1949년 건국의 토대를 일구었던 일종의 혁명담론이었다. 최고지도자인 마오쩌둥, 류사오치(劉少奇), 저우언라이(周恩來) 등도 작은 토굴에서 생활과 집무를 병행하며 틈틈이 농사일에 직접 참여했다.
옌안의 마오쩌둥이 직접 가꾼 고추밭
그런데 아름다운 혁명신화로만 남았어야 할 ‘인간과 자연의 전쟁’이 1958년 느닷없이 중국농촌을 중심으로 대규모로 재개된 것이다. 인류역사상 가장 어이없는 대참사를 낳은 ‘대약진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대약진운동 시기 전국인민의 노동, 가사, 일상은 ‘신속한 산업화’란 목표에 전부 매몰되어버렸고,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마치 자연과 전쟁을 치르듯 진행되었다. 가령, 전국적으로 철강생산 경쟁이 격화되면서 농민들은 밥그릇과 수저 등 모든 쇠붙이를 국가에 헌납해야 했고, 그 쇠붙이들은 엉성한 가마를 통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고철덩어리로 ‘제련’되었다. 대약진운동의 최대 비극은 농민 대다수가 죽음의 문턱까지 내몰렸고, 실제로 그 문턱을 넘은 자들이 부지기수였다는 사실이다. 쌀 수확량은 갈수록 줄어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도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심대한 자연재해까지 겹쳐오면서 농민들은 일상에서 지옥을 경험해야 했다.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은 3,000만 명의 아사자를 낳고 결국, 1961년 ‘3년 환란’의 끝을 맺었다.
물론 중국 도시에서도 ‘인간과 자연의 전쟁’은 어김없이 진행되었고, 하얼빈도 예외는 아니었다. 만약 하얼빈 시민에게 그 대표적 사례를 묻는다면 대다수가 1957년 전개된 ‘항홍투쟁(抗洪鬪爭)’ 즉, 대홍수와의 처절한 싸움을 떠올릴 것이다.
중국농촌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대약진운동과 달리, 하얼빈에서 전개된 홍수와의 싸움은 중국사회주의시기 가장 인간적이고 감동적인 미담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1957년 7월부터 8월까지 쑹화강변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큰비가 내렸다. 급기야 쑹화의 강물은 하얼빈 전체를 물의 도시로 바꾸어버렸다. 본래 중국의 동북지방은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은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이처럼 일거에 억수처럼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를 감당할 만큼의 배수시설을 미처 갖추지 못한 하얼빈이 하루아침에 수장될 위기에 처하게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쑹화강변
이제 하얼빈의 시민들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물과의 싸움을 준비해야 했다. 쑹화강변으로 황급히 모여든 시민들은 누구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그렇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밀려오는 홍수에 맞서 서로의 몸과 몸을 이어 수 겹의 인간 띠를 만들어 저항했다. 또 그 뒤편에서는 또 다른 수많은 이들이 동원 가능한 모든 종류의 포대자루를 들고 나와 온갖 내용물을 채워가며 임시로 제방을 쌓기 시작했다. 마침내 대홍수에 맞선 인간의 투쟁은 승리로 마감되었다.
1958년 하얼빈에는 이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하얼빈 시민 홍수방어승리기념탑(哈爾濱市民防洪勝利紀念塔)’이 건립되었다. 사람과 사람간의 연대와 협력이야말로 인간을 자유로운 상태로 해방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곧 사회주의적 가치관이라고 한다면, 하얼빈 도심 중심부에 버젓이 서 있는 이 기념탑은 필시 그것을 증명하는 하나의 예로 상정할 수도 있겠다.
중양대가(종)와 스탈린대로(횡) 교차지점의 기념탑
오늘날 하얼빈의 최대 번화가인 중양대가(中央大街)를 걷노라면, 어느새 수많은 인파에 밀려 스탈린대로와의 교차지점에 위치한 홍수방어기념탑에 다다르게 된다. 하얼빈이 100년의 시간 동안 식민과 냉전 그리고 문화대혁명의 틈바구니 속에서 인간의 분열과 이념의 분화를 경험했다면, 이 기념탑은 하얼빈의 시민들이 위대한 자연과의 싸움에서 새삼 연대와 화합을 배웠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수방어승리기념탑
지구온난화 탓인지 근래 하얼빈도 한낮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날이 부쩍 늘고 있다. 하지만, 여름의 하얼빈은 여전히 대다수 중국인들에게 시원한 ‘피서지’로 인식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기념탑과 그 주변 광장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어울려 한가로운 휴식을 즐기는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다. 기념탑 광장에서 지친 몸을 추스르며 주변을 돌아보면 드넓게 펼쳐진 쑹화강변에서 느릿느릿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는 다양한 군상들과 마주하게 된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오묘한 조화가 가져다주는 편안함이란 게 이런 것일까? 이는 동북지역의 다른 대도시 선양(瀋陽)이나 창춘(長春)에서는 쉽게 만끽할 수 없는 하얼빈만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쑹화강변의 한가로운 사람들
【중국도시이야기 14】
김판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참고문헌
모리스 마이스너 저, 김수영 역, 『마오의 중국과 그 이후』, 이산, 2004.
김지환 저, 『철도로 보는 중국역사』, 학고방, 2014.
취샤오판 지음, 박우 옮김, 『중국 동북 지역 도시사 연구: 근대화와 식민지 경험』, 진인진,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