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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3월호
안휘성의 유민 풍습과 민간 잡극 _ 김두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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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성 회북지역에는 명청시대부터 독특한 풍습이 전해져오고 있다. 회북은 안휘성 중북부를 관류하는 회수이북 지역을 말하는데, 명청시대에는 유명한 유민 배출지역이자 도적과 소금밀매업자들이 활동하던 지역이었다. 지금은 회북시를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을 가리킨다. 회북지역은 황하와 회수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해 있어 전통시대에는 수재, 가뭄, 메뚜기떼 피해 등 자연재해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 때문에 생존 수단을 상실한 일반민들은 살기위해 외지로 이동하는 유민현상이 일상화되어 일종의 관습처럼 굳어지게 되었다.

 

유민의 사전적인 정의를 보면,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떠도는 사람또는 망하여 없어진 나라의 백성으로 풀이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유민의 의미는 전자의 경우에 해당한다. 자연재해가 발생했을 때 일반민들이 취할 수 있는 것은 어린 자녀나 여성(주로 부인)을 다른 사람에게 팔거나, 영아 살해 등 생존을 위해 가족 구성원 수를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것이었다. 혹은 식량을 구하기 위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거나 도적떼가 되는 등 매우 절박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러한 다양한 선택지 중 일반민에게 가장 안전하고 손쉬운 생존방법은 정든 고향을 버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일상화되고 관행화되었다. 물론 유민이 안휘성에만 발생했던 것은 아니지만, 안휘성 유민현상이 다른 지역에 비해 특별한 이유는 농업작황이 풍년이든 흉년이든 상관없이 유민행렬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또 매년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 수확을 모두 마친 후 대문을 진흙으로 밀봉한 후 10, 100단위로 무리를 지어 강남지역 대도시로 가서, 그곳에서 전문적으로 구걸을 하며 생활하다가 다음해 초여름 밀이 익어갈 무렵 고향으로 되돌아간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문헌기록에서도 보인다. 예를 들어 재해가 발생하지 않아도, 겨울에 나가 봄에 돌아오는 관습이 전례가 되었다혹은 매년 엄동설한이 되면 굶주린 백성들이 사방으로 나가는 것이 전례가 되었고, “강소와 절강지역은 매년 겨울철이 되면, 봉양부 유민이 시장에서 구걸하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민현상은 명대 후기(15세기 중엽이후)에 시작되어, 점차 보편화되었으며 명말이 되면 일종의 관습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청대에 들어와서는 옹정건륭연간(17세기)에는 보편적인 현상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야사에 따르면, 명을 건국한 태조 주원장의 고향은 회북지역 봉양부 호주(濠州)였는데, 원말 전란으로 피폐해진 고향땅에 강남의 부자 14만 호를 강제로 이주시켜 채웠고, 몰래 강남으로 귀환하는 자는 중죄로 다스렸다고 한다. 그런데 강제 이주당한 강남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성묘하기 위해 거지로 위장했다는 것이다. 매년 겨울에 고향인 강남으로 가서 구걸을 하며 생활하다 봄이 되면 되돌아가게 되었고, 이것이 후에 관습처럼 굳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디까지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유민이 들어오는 강남지역 도시 거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매년 겨울철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거지 떼들이 있었고, 그들이 주로 회북지역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재밌는 사실은 이들이 강남지역에서 생계를 위한 수단으로서 봉양화고(鳳陽花鼓)’라는 민간 잡극(雜劇)을 이용했다는 점이다. 봉양화고는 본래 명대중엽 봉양부 임회현(현재 봉양현 동부지역)의 민간 잡극에서 출발했는데,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소고와 작은 징을 반주삼아 노래와 춤을 추던 민간 오락이었다. 후에 유민들이 강남 도시지역에서 구걸하기 위한 생계수단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중국 남북 각지에 전파되어 다양한 민간 가무소극으로 발전하기도 했다. 봉양화고는 2006년에 국가비물질문화유산(한국의 무형문화재에 해당)으로 등록되었다.

 

봉양화고에 관한 전통시대 문헌기록을 보면, 청대에 봉양화고봉양파(鳳陽婆; 봉양출신 여성)’가 하나의 문화적 관습으로서 고착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유민들은 지방관이 발행해준 증명서, 즉 재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함을 증명하는 서류를 가지고서 구걸을 하는데, 이때 화고(꽃무늬가 그려진 작은 북)과 작은 징을 두드리면서 노래를 불러 쌀과 돈을 구걸했다. 봉양파는 강남지역의 여성 거지를 지칭하는 말로 출신지역과 상관없이 여성거지들을 보편적으로 부르던 말이었다. 봉양파가 봉양 출신 여성들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봉양화고는 명대 중엽이후에 먼저 민간 잡극형식으로 출현했는데, 이후 유민들이 구걸 수단으로서 이용하게 되면서, 봉양화고와 유민이 결합되어 독특한 문화적 관습을 형성했다. 이러한 현상은 늦어도 청대 옹정건륭연간(17세기)에 출현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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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양화고(凤阳花鼓)

 

강남지역 도시 거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10100단위의 대규모 거지 떼들이 늦가을~초겨울에 어김없이 나타나 시끄럽게 북치고 징치면서 구걸한다면, 그 자체가 도시 치안문제나 위생문제, 혹은 도시주민의 생계를 위협하는 요소였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 지역의 지방관들은 아예 이러한 유민들이 성내로 들어오지 못하게 성문을 걸어 잠그거나, 약간의 돈을 쥐어주고 다른 지역으로 쫓아버리기도 했다. 요행히 성내로 들어온 유민들은 가두의 상점 앞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구걸을 하는데, 상점 주인이 약간의 돈이나 쌀을 내놓을 때까지 끈질기게 버티기도 했다. 또한 이동하는 과정에서 유민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연도의 논과 밭의 농작물을 주인의 허락 없이 수확해 먹기도 했다. 혹은 일부 유민들은 도적떼로 돌변하거나 혹은 도적떼와 결합하여 약탈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회북지역 유민들은 자연재해가 발생하지 않아도 매년 늦가을~초겨울에 무리를 지어 고향을 떠나, 강남지역 대도시에 들어가서 봉양화고라는 민간 잡극을 이용해 구걸로 생활하다가 이듬해 봄이나 밀이 익어갈 무렵인 초여름에 고향으로 되돌아갔다. 강남지역 도시주민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의 도리상 유민의 구걸을 무시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 유민은 자신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존재였다. 유민이 매년 규칙적으로 특정한 시기에 집단적으로 발생했고, 유민과 봉양화고라는 문화가 결합하여 일종의 독특한 관습과 문화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관습과 중국문화 4

 

김두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연구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百度百科 http://bit.ly/2BV1yW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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