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중국공산당 19차 당 대회가 끝났다. 언론에서 이야기하던 '설마'가 현실화된 당혹스러운 결과이다. 지난 두 차례의 승계과정에서 있었던 후계자가 최고지도부의 일원으로 들어가는 관례가 깨진 것은 정치국위원이 최고지도자가 된 사례가 있다는 점에서 그래도 설명의 여지는 있다. 그러나 당장(黨章)에 시진핑의 이름이 들어가고 또 그 이름이 수식하는 사상이 들어간 것은 중국연구자에게는 곤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사상”이라는 긴 명칭의 정확한 의미는 아직도 모호하지만, 당장에 이름이 들어가고 그 이름과 모종의 수식관계에 있는 사상이 들어간다는 것은 중국공산당의 역사에서 보통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 당장에 살아있는 사람의 이름이 들어간 것은 세 번째이며, 사상과 관련하여 들어간 것은 마오쩌둥 다음으로 두 번째이다. 1945년 7차 당 대회에서 마오쩌둥사상이 처음으로 당장에 명기되었으며, 1969년 9차 당 대회에서 린뺘오(林彪)가 “마오쩌둥의 친밀한 전우이자 후계자이다”라고 당장에 명기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오쩌둥사상의 경우도 1956년 8차 당 대회에서는 당장에서 삭제되었다. 소련의 스탈린비판 이후 사회주의체제에서 발생한 개인숭배에 대한 보편적인 비판의 영향이었다. 그 이후 문혁기인 9차 당 대회에서 다시 포함되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덩샤오핑의 경우는 사후인 1997년 15차 당 대회에서야 덩샤오핑이론의 이름으로 당장에 명기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역사는 당장에 개인의 이름을 명기하는 것의 무게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그것의 비극적인 전철도 보여준다. 마오쩌둥사상이나 덩샤오핑이론에 대하여는 그들의 실천과 입론이 그 이름에 부합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중국공산당이 공산당의 원류인 마르크스 레닌과 더불어 그들의 이름으로 이끌어지고 있는 것에 대하여 불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마오쩌둥과 덩샤오핑을 제외하고 시진핑 이전 당장에 이름을 올렸던 것은 문혁시기 린뺘오가 유일하다. 그런데 9차 당 대회에서 전무후무하게 당장에 후계자로 이름을 올렸던 린뺘오는 9차 당 대회 직후부터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 몽골의 고원에서 비행기 추락사로 비극적으로 생애를 마감한다.
그 이후 누구도 당장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덩샤오핑은 사후에, 장쩌민은 퇴임 후 자신을 상징하는 “삼개대표”중요사상을, 그리고 후진타오도 자신이 퇴임한 후 과학적발전관을 공산당의 지도사상(指南)으로 포함시켰다. 물론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이름이 직접 거명되지 않았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런데 시진핑은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사상과 마르크스 레닌주의, 마오쩌둥사상, “삼개대표”중요사상, 과학적발전관을 함께 당의 행동 지남으로 확립한다.”고 하여 자신의 이름을 명기했다. 뿐만 아니라 “시진핑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사상”이 마르크스레닌주의부터 과학적 발전관까지의 기존의 지도사상의 계승과 발전이자, 마르크스주의 중국화의 최신 성과로 전체 당과 전체 인민이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위하여 분투할 행동지남이라고 규정되어 있다.
“시진핑 신시대 중국특색사회주의 사상”이 기존의 모든 마르크스주의의 계승과 발전이자 최신 성과라는 표현은 그렇게 낯설지가 않다. “현대 마르크스주의의 최고봉”이나 “인류사상사의 최고봉을 이루는 영생불멸의 사상”만큼 생경하지는 않을지라도 그것과 그렇게 차이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전자는 문혁시기 캉셩(康生)이 마오쩌둥사상을 일컬은 것이었으며 후자는 북쪽 사람들의 주체사상에 대한 수식이다.
중국공산당은 문혁 이후 개인숭배와 개인독재가 문혁을 초래한 주요한 원인의 하나로 보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여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고 개인숭배에 대하여 엄격하게 비판한다. 개혁개방을 결정한 11기 3중전회에서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하면서 “중앙의 지도자 동지를 포함한 어떠한 당원들의 개인의견을 지시라고 하지 않으며, 당원들은 당내에서 중앙상무위원에 이르기까지의 상급 지도자들에게 비판적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집단지도체제와 당 내부 민주의 제고를 통하여 개인독재를 막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이루어지는 화궈펑의 실각의 가장 주요한 이유의 하나는 개인숭배를 고취하였다는 것이었다. 화궈펑 개인숭배의 가장 중요한 사례가 마오쩌둥을 “위대한 주석”이라고 불렀듯 자신을 “영명한 영수(英明領袖)”로 부르게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후 덩샤오핑을 포함한 중국의 어떤 지도자에 대한 호칭에서도 “위대한”은 물론 “영명한”이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았다. 이후 중국에서 “위대한”은 중요 지도자 사후 추도사의 용어가 되었고, “영명한”은 사실상 사용되지 않는 금기어가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돌아 2017년, 시진핑의 이름과 그것과 수식관계에 있는 사상이 당장에 들어갔을 뿐만 아니라 시진핑에 대한 “영명한 영수”라는 호칭이 노골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베이징시 서기 차이치(菜奇)는 “시진핑 총서기는 영명한 영수이며, 신시대 개혁개방과 현대화건설의 총설계사이며 당의 한 세대의 핵심이다.”고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의 현실을 결합한 세 번째 역사적 비약이다”고 했다. 또한 산시(山西)성 서기는 “시진핑 총서기가 창립한 신시대 중국특색 사회주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기본원칙과 중국 현실의 상호 결합의 또 한 번의 비약이며, 신시대 중국 특색 사회주의의 위대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찬란한 기치”라고 하고 있다. 현임 지도자에 대한 찬양으로는 덩샤오핑에게도 없었으며 마오쩌둥 시대에나 있었던 표현이다. 그것만으로 보면 시진핑은 신문보도대로 덩샤오핑을 초월하여 마오쩌둥의 반열에 오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에는 “삼십년 하동(河東) 삼십년 하서(河西)”라는 속담이 있다. 세태의 변화를 이르는 말이다. 개혁개방이후 중국은 놀라운 발전을 거듭하고 있고 중국이 새로운 변화와 발전을 필요로 하는 시점에 도달한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발전을 위하여 새로운 이론과 방법과 사상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은 끝없는 실천과 혁신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강의 저편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상에서 집합적 실천과 혁신이 아니라 ‘개인숭배’의 그림자가 보이고, ‘핵심’의 의미가 변화하여 ‘수령론’의 그림자가 보이는 것으로 느껴지는 것은 과도하게 민감한 것일까?
19차 당 대회에서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위한 새로운 모델뿐만 아니라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세계 운명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바라마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위대하고 영명한 영수”의 영도에 의하여 달성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달성될 수도 없다. 자유로운 인민들의 집합적 의지와 실천과 혁신의 축적을 통하여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홍콩 소식에 의하면 올해 백세인 마오쩌둥의 비서였던 리루이(李銳) 노인은 당 대회에 특별대표로 초청되었으나 참석하지 않고, 개인숭배를 하지 말아야 하며 11기 3중전회의 정신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서면 발언을 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중공의 당 대회에 대한 복잡한 심경은 나만의 것은 아닌 듯하다.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big5.china.com.cn/gate/big5/media.china.com.cn/cmyw/2017-10-21/115712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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