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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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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호
북한화교의 1948년 중국인민해방군 지원활동 _ 송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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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화교는 1948년 4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중국인민해방군(중공군)에 대한 지원활동을 했다. 그중 두 번째 지원활동의 총액은 첫 번째 헌납운동의 4배에 달하는 200여만 원(북한화폐)에 달했다. 두 번째 헌납운동은 중공군이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하자마자 북한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1948년 9월 12일 시작된 요심전쟁(遼瀋戰役)은 11월 9일과 12일에 국민당군이 금서(錦西), 호호도(葫芦島), 승덕(承徳)으로부터 북경(北京)방면으로 퇴각한 내전이다. 이 전쟁으로 중공군은 동북전역을 점령했다. 승리의 소식을 접한 북한 화교연합회는 이를 계기로 각지에서 축하대회를 열고 헌납운동을 벌일 것을 계획했다. 1948년 11월 21일 북한 화교연합회는 제2차대표자대회를 열고, 군위문(勞軍)위원회를 조직하였으며, 위원회를 중심으로 헌납운동을 전개해 나갈 것을 결정했다. 이 운동에 대하여 북한화교연합회 기관지 『民主華僑』(1948년12월28일자)는 그 과정을 다음과 같이 상세히 보도하고 있다.


작년(1947년: 필자) 중공군이 반격을 개시한 후 …, 특히 올해에 들어와 대부분의 화교들은 중국공산당과 인민해방군에게 자기들의 미래를 맡기게 되었고, 그들의 중앙(국민정부: 필자)을 생각하고, 중앙을 기다리던 환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날로 높아지는 헌납 열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올해 4월 북조선화교 40명이 위문단을 조직하여 화차 1차량 분의 사과와 해산물, 군용운동화, 우승기 등의 위문품을 확보하여 동북(중국동북: 필자)을 방문했다. 그 후 지원에 대한 열의는 날마다 높아져, 특히 이번 조국해방군이 공전(空前)의 승리를 이룩하자, 동북전역이 해방되었다는 소식이 북조선으로 전달되었고, 화교들은 각지에서 축하대회를 열고, 정신적 물질적 헌납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북한화교들이 지원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게 된 배후에는 무엇보다도 중국내전에서 중공군이 우세를 차지한 것과 실질적으로 중국 동북지역이 점령된 것이 큰 원인이 되었다. 제2차 헌납운동에는 미역 652짝(件)(1件 16貫), 물고기 134짝(1만720마리), 조선중앙은행권 143.9만원, 군용운동화 562켤레, 담배 및 물통 914개, 통조림 83개, 게살 등 40kg, 군용담요 7장, 위문편지 1,181통, 그 외에 비누, 양말, 수건, 연필, 공책 등이 헌납되었다. 화교가 보낸 위문품과 현금 총액은 207.9만원에 달했다. 이 금액을 도별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 황해도 544.7원, 강원도 483.95원, 함경남도 224.24원, 평안남도 162.72원, 함경북도 120.49원, 평안북도69.98원이었다. 황해도의 헌금이 가장 많았는데, 황해도의 헌납운동 조직에 대해 살펴보자.


1948년 11월 21일 황해도 화교연합회는 도(道)내에서 헌납운동을 벌이기 위한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위원장 이삼림(李森林)을 비롯한 7명의 간부들이 도내 14개의 시・군을 각각 담당하여 지방으로 내려가 각지에서 화교대회를 열고 중국 국내의 내전 상황을 화교들에게 설명하면서 헌납운동을 펼치는 방법을 채택했다. 담당지구에 도착한 도 연합회 간부들은 우선 각 지역 화교연합회 간부들과 회의를 개최하고 화교대회를 소집했다.


해주화교대회에는 시내화교 153명이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화교상인 장명복(張明福)이 앞장서서 현금 만원을 내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뒤이어 다른 화교들도 자발적으로 자신의 헌금액을 정했는데 모금 총액은 9만 2,250원에 달했다. 그러나 해방직후 북한에 있던 많은 화교상인들이 남한이나 국내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당시 화교상인은 많지 않았다.


한편 사리원 제5지부(馬洞)회의에서는 해방 후 북한화교의 토지개혁에서 농지를 분여 받은 ‘개변농민’(翻身農民)들이 앞장섰다. ‘개변농민’ 장만균(張萬鈞)은 “이전 나는 남에게 일을 해주는 처지였다. 작년(1947년: 필자) 토지를 분여 받아, 금년에는 단층집도 짓고, 먹고 사는데 불편이 없다. 나는 2천원을 인민해방군에게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民主華僑』1948년12월28일자).


그러자 같은 ‘개변농민’인 왕용초(王永初)도 천원을 지원하겠다고 호응했다. 결과적으로 21세대에 불과한 제5지부에서 1만 8,100원의 헌금을 모으게 되었다. 회의를 마친 연합회 간부들은 제5지부의 헌납운동이 ‘개변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큰 성과를 이루게 되었다고 설명하면서, 남은 지역에서도 이와 같은 방법으로 지부(支部)별로 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정했다. 그 결과 사리원화교 133세대로부터 10만 3000원의 지원금이 확보되었다.


북한화교 농민에 대한 토지개혁은 1947년 봄에 시작되어 이듬해 봄에 완료되었는데, 이해 가을 화교농민들은 풍작을 거두었다. 이에 특히 ‘개변농민’들은 토지개혁의 혜택을 실제로 향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개변농민’들은 각지 화교상인들과 함께 헌납운동의 선두에 섰다고 말할 수 있다. 중공군에 대한 북한화교들의 이러한 실질적 지원은 중공군에 관심과 의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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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평양화교중학교 강당에서 열린 위문물자 전시회

출처: 民主華僑194812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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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화교연합회간부와 화교중학교 학생들이 소련군에게 선물한 각종 기념품

출처: 『民主華僑』1948년 10월26일자



【북한화교와 한반도 12】

 

송우창(宋伍强) _ 중국 광동외어외무대학(廣東外語外貿大學)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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