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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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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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 대한 많은 신화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중국공산당(이하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평가에 관한 것이다. 중공이 마오쩌둥의 공과 과를 7대 3으로 평가했다는 그것이다. 선호에 따라 전면적으로 부정하거나 심지어는 누구를 ‘반신반인’이라고 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추종하는 우리나라의 세태에 대한 비판으로 자주 인용된다. 단언하건데, 중공은 결코 마오쩌둥의 공과가 7대 3이라고 평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왜 중공이 마오쩌둥의 공과를 7대 3으로 평가했다는 신화가 정설처럼 되어 있을까?‧
아니 땐 굴뚝에서 연기 난 것은 아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이 나온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두 가지 서로 다른 사실이 혼재되어 마오쩌둥의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무슨 말이냐고?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 평가와 마오쩌둥의 후대의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한 바람이 뒤섞여 중공이 마오쩌둥을 공이 7이고 과가 3이라고 평가했다는 신화가 만들어졌다.
중공의 마오쩌둥에 대한 공식적 평가는 1981년 중공의 11기 6전회에서 통과된 “건국 이래 약간의 역사문제에 관한 결의”(이하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서 이루어졌다. 건국 이래 역사결의는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에 대하여 정리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중공은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서 문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였다. 그렇다면 문혁에 대하여 가장 주요한 책임이 있는 마오쩌둥도 비판에서 예외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한 마오쩌둥에 대한 비판은 공산당과 국가의 정통성에 대한 부정을 초래할 수 있는 민감한 문제였다. 그렇다고 개혁과 국가의 전환을 위해서는 문혁을 부정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당과 국가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오쩌둥의 위신을 유지하여야 하지만, 개혁을 위해서는 마오쩌둥의 위신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는 문혁을 부정해야만 하는 모순적인 과제에 봉착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공이 7이요 과가 3이라는 논리가 나온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중공은 마오쩌둥의 위신 유지와 문혁 부정이라는 모순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몇 가지 원칙을 정한다.
우선은 마오쩌둥 개인의 성격이나 구체적인 행위 등은 평가하지 않는다고 했다. 다음으로는 역사 평가는 세세하지 않고 개괄적으로 평가한다는 것이다. 구체적 행위에 대하여 세세한 평가를 하게 되면 마오의 과오가 두드러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을 피하자는 것이었다.
건국 이래 역사 결의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이랬다저랬다”했다는 비판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마오의 비서를 역임한 후차오무(胡喬木)는 울면서 그것을 저지하였다. 그것을 통하여 마오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최소화하겠다는 것이었다.
마오쩌둥은 실제 이랬다저랬다 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반우파투쟁 과정에서 보인 마오쩌둥의 태도이다. 마오쩌둥은 1957년 5월의 반우파투쟁 직전의 정풍운동 중 민주당파 인사들에게 공산당의 문제를 비판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마오쩌둥은 “(공산당의 문제에 대하여) 아는 것에 대하여는 모두 말하고, 말한 자는 죄가 없고, 들은 자가 경계로 삼으면 족하다. 문제가 있으면 바로잡으면 되고, 잘못 지적한 것이면 그러한 오류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 더욱 노력하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약 한 달쯤 이후 마오쩌둥은 자신의 말은 “숨어있는 뱀(불순분자)을 굴에서 끌어내기(引蛇出洞) 위한 ‘좋은 꾀(陽謀)’였다”고 하면서 자신의 말을 뒤집는다. 그에 따라 “말을 한 사람은 죄가 작지 않게 되어” 우파로 비판받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비판을 하게 되면 마오쩌둥은 비범한 혁명가가 아니라 기껏해야 책략에만 밝은 비열한 모사꾼에 불과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후차오무가 울면서 비판을 저지하려고 한 이유였다.
그리고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혁으로 인한 문제의 주요한 책임을 린뺘오(林彪)와 사인방(四人幇)에게 돌린 것이었다. 문혁을 일으킨 마오의 과오를 인정하지만 마오가 잘못하여 일으킨 문혁을 음모가인 린뺘오와 사인방이 자신들의 권력을 탈취하기 위해 이용하여 재앙을 초래하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문혁으로 인한 문제의 주요한 책임을 마오가 아니라 린뺘오와 사인방에게 돌렸던 것이다.
여기까지라면 마오의 책임이 약간은 완화되었다고 할지라도 마오쩌둥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공은 문혁에 대한 평가를 문혁만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건국 이후의 역사에 대한 평가를 통하여 했다. 중공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역사를 혁명 이후 1950년대의 황금시대, 1957년 이후 문혁 전까지의 일정한 성과도 있었지만 많은 문제도 있었던 굴절기, 문혁 그렇게 세 단계로 나누어 평가했다. 문혁뿐만 아니라 건국 이후의 전반적 역사에 대하여 평가한 것이었다. 그런데 건국 이후의 역사를 이렇게 평가해도 마오쩌둥이 별로 긍정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기껏해야 공과가 반반정도로 보이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천윈(陳云)이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 혁명과 건국 부분을 포함시키도록 제안했다. 그래서 건국 이래 역사결의에는 건국 이후뿐만 아니라 건국을 위한 혁명에 관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혁명은 마오쩌둥의 가장 큰 공적이기 때문에 그것을 포함시킴으로써 마오쩌둥에 대하여 공과 과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공이 크다고 평가한 것이다. 공이 더 크다는 것을 공7 과3으로 볼 수도 있으나 결코 7대 3으로 평가한 것은 아니다. 굳이 수치화한다면 잘해야 6대 4쯤으로 평가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무튼 중공은 마오쩌둥이 과오가 있지만 공이 더 크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7대 3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앞서 언급한대로 마오 자신의 바람이었다. 마오는 자신의 최후가 다가오자 측근을 모아 자신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서 등장한 것이 소위 “공7 과3”이다. 마오는 자신의 일생을 개괄하면서 자신이 중국혁명과 문혁을 했는데 혁명에는 다들 아무런 이의가 없지만 문혁에는 이견이 적지 않다고 하면서, 관 뚜껑을 덮으면 인간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는데 자신도 그럴 때가 되니 후세에 자신을 공7 과3으로 평가한다면 자신은 만족한다고 했다. 낭만적 혁명가였지만 역사의 냉혹함을 알았던 마오의 역사에 대한 최후의 바람이 자신에 대하여 “공7 과3”으로 평가해주는 것이었다.
중공은 마오를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결코 “공7 과3”으로 평가하지 않았다. 긍정적으로 평가했다면 그것이 그것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긍정적 평가와 “공7 과3”은 천양지차이다. 문혁과 마오쩌둥을 평가하기 위하여 4천여 명의 학자와 간부들이 참가하여 토론을 벌린 4천인 토론을 포함한 1년여에 걸친 중공 내부의 치열한 토론이 있었다. 중공의 그러한 고민과 일정한 미봉의 결과가 마오쩌둥의 과오에 대한 비판과 역사적 공헌에 대한 평가였다.
그러한 과정에 대한 이해는 생략하고 출처와 맥락을 혼돈한 수치만을 가져와 우리의 역사 평가에 원용하는 것은 일정한 의의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이지만 역사평가에서도 우리에게 진정으로 부족한 것은 결과나 결론이 아니라 그것을 만들어 내기 위한 논의와 협의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안치영 _ 인천대학교 중어중국학과 교수 / 중국학술원 중국자료센터장
* 이 글은 '아주경제'와 인천대 중국학술원이 공동 기획한 『아주차이나』 [仁차이나 프리즘] 8월 10일에 게재된 것을 수정한 것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중국학술원 디지털아카이브 소장자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