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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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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톈진(天津)은 홀로 기억되기 어려운 도시이다. 서울과 인천처럼 톈진은 베이징(北京)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톈진에게 베이징은 축복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베이징이 옆에 있기에 톈진은 한 번도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었다. 인천이 꼭 그랬다.
톈진은 베이징에서 시작되어 베이징과 함께 영욕을 같이 했다. 베이징을 수도로 정한 첫 번째 왕조는 금(金)나라였지만, 베이징이 중국의 중심도시로 각인된 것은 원(元)나라의 쿠빌라이 칸이 천도한 뒤부터였다. 톈진도 그때 베이징과 함께 이름을 알렸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의 『동방견문록』에, 톈진을 ‘하늘의 도시(天城)’, 즉 황제의 도시로 적고 있다.
톈진이란 지명은 명(明)나라 영락제(永樂帝)로부터 비롯되었다. 개국황제 주원장(朱元章)의 넷째 아들 주체(朱棣) 곧 영락제는 조카를 희생하고 황위를 찬탈했다는 점에서 종종 조선의 세조인 수양대군에 비견되는 인물이다. 그는 본래 북쪽 오랑캐를 상대해야 했던 번지(藩地) 베이핑(北平, 지금의 北京)의 연왕(燕王)이었다. 그런 그가 1400년 자신의 조카가 황제로 있는 수도 난징(南京)을 공략하기 위해 베이핑을 나선다. 그는 베이핑 지근에 있는 즈꾸(直沽)라는 항구에서 남북으로 뚫린 운하를 타고 남하해 난징으로 들어갔다. 바로 이 즈꾸가 오늘의 톈진이다. 황제가 된 주체는 이곳을 ‘천자(天)의 나루터(津)’라 해서 톈진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1421년 영락제는 수도를 자신의 본거지인 베이징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톈진은 공식적으로 황제의 나루터이자 수도 베이징의 관문이 되었다. 황위찬탈과정에서 내려 받은 이름 탓인지 톈진은 언제나 황제와 수도를 방위하는 군사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하지만 베이징의 살벌한 권력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톈진에 주둔한 군대는 잊을만하면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골칫덩이였다. 병사들은 방어기능이 사라져버린 무너진 성벽과 진흙으로 그득한 해자(垓子)를 보고도 수수방관했다. 우리는 종종 전투력이 형편없고 군기가 빠진 군대를 속칭 ‘당나라 군대’라 한다. 당시 톈진의 병사들이 꼭 그랬다. 그렇지만 아무리 당나라 군대라도 먹이고 재우는 일을 소홀히 할 수는 없는 일이다. 더구나 이들은 수도방위와 동시에 변방의 이민족을 방비해야 하는 자들이 아니던가. 톈진으로 각종 물자들이 모여들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군수물자의 집산만으로 톈진의 번영을 말할 수는 없다. 톈진의 진정한 부(富)는 베이징의 황실과 그곳에 거하는 권력자들의 끝없는 탐욕과 사치에서 나왔다.
북쪽의 오랑캐가 황제가 되면 자신의 근거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항시 베이징을 도읍으로 삼았다. 반대로 한족(漢族)이 황제가 되면 오랑캐를 막겠다는 일념으로 베이징을 수도로 고집하곤 했다. 베이징이 줄곧 중국의 고도(古都)로서 명성을 구가한 이유이다. 중국은 영토가 광대한 만큼 황실과 관료집단의 사치와 향락은 언제나 극에 달했다. 문제는 베이징 인근이 그다지 물산이 풍부한 곳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런데 요행히 그들에게는 운하(運河)라는 게 있었다. 종종 우리의 연산군과 비견되는 중국 최악의 폭군 중 하나인 수(隨)나라 양제(煬帝)가 국운의 쇠락은 아랑곳 않고 남북을 가르는 운하를 깊게 파놓았던 것이다. 그 덕에 후대 황제들은 폐위와 망국의 걱정 없이 운하를 애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륙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진흙은 종종 운하를 망쳐놓곤 했다. 물보다는 땅이 친숙했던 몽골의 원나라 말기에는 운하의 곳곳은 아예 배가 다닐 수 없는 개펄로 변해버렸다. 영락제는 새로운 수도 베이징을 위해 운하를 준설해 기능을 배가시켰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톈진은 이때부터 베이징으로 통하는 운하의 출입구가 되었다. 더군다나 톈진은 운하뿐만 아니라 바다로도 연결되었다. 결국 톈진은 동서로는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남북으로는 운하를 통해서 그도 아니면 바닷길을 통해 중국 전역의 물산을 솜처럼 빨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한 푼의 세금이 긴 강과 운하를 따라 베이징의 황실금고로 입고되는 비용이 통상 서너 푼은 되었다고 하니, 오늘날의 경제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을 것이다. 때로는 끊기고 때로는 갑문을 통과해야 하는 운하보다는 중국대륙의 동쪽 연안을 따라 탁 트인 바닷길을 이용하면 될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당시의 기술수준으로는 서태평양 연안의 바다를 항해하는 것조차 죽음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었다. 바닷길은 경제적으로도 그다지 효율적이지 못했다. 영락제의 명으로 진흙을 걷어내고 끊긴 운하를 연결했던 송례(宋禮)의 계산법에 따르면, 바다로 나갈 배 한 척 값으로 운하를 오갈 배 스무 척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바다에선 반갑지 않은 손님들도 만나야 했다. 해적들이다. 그 중에서도 왜구란 족속들은 고약하기 그지없었다. 이렇게 보면, 바닷길은 타산도 맞지 않고 위험했다. 때문에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조공무역을 제외한 상업적 해운은 금지하는 이른바 해금령(海禁令)을 자주 선포했다. 심지어 청나라 때에는 명나라 재건을 입에 달고 사는 정성공(鄭成功)이란 해적이 등장해 남쪽 연안의 섬들과 타이완을 근거지로 오랫동안 황제를 괴롭히기도 했다. 청 조정이 광동(廣東)이나 푸젠(福建) 등지의 연해 30리(里) 이내를 무인지대로 설정하는 천계령(遷界令)을 반포해 해운을 엄격히 통제하고자 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간혹 허락 없이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 제때 돌아오지 못한 뱃사람들은 황실에 대한 반역자로 몰려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탓에, 톈진은 우리의 상식과는 달리 오래도록 바다의 항구이기보다는 운하 나루터로서의 역할이 중요했다. 바다로 나가는 뱃길도 바닷길과 연결된 나루터에서 시작되었다. 영락제가 ‘항구(港)’가 아니라 ‘나루터(津)’라고 이름을 붙인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톈진의 도심이 바닷가에서 한참 먼 곳에 조성되어 있는 것도 그 탓이리라.
오늘날 톈진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톈진역(天津站)에서 탕구(塘沽)라 불리는 바닷가 항구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타든, 자동차로 가든 족히 한 시간은 걸린다. 30리를 하루거리로 계산하던 옛날 기준으로 보면, 꼬박 사흘을 걸어야 하는 거리이다. 서울의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가는 것보다도 멀다고 하면 보다 이해가 편할 것이다. 이토록 거리가 멀다보니, 톈진에서 수개월을 기거하더라도 굳이 가보겠다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바다를 보지 못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 한마디로, 생활권이 서로 달랐던 셈이다.
운하 덕분에 톈진에는 곳곳에 물길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중에서 운하의 세 물줄기가 합류하는 지점이 있다. 오늘날 용러차오(永樂橋) 남단에 위치한 ‘톈진의 눈(天津之眼)’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회전관람차가 설치된 다리 부근이다.
사진 1 톈진의 눈
또 세 물줄기 중 가장 폭이 넓은 지역이 있는데 바로 바닷길과 연결된 하이허(海河)라는 곳이다. 바다(海)와 강(河). 지역특성에 걸맞은 제격의 이름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텐진역 서쪽에 있는 물줄기가 바로 하이허이고, 그 바로 건너편이 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톈진의 구도심이다.
톈진이 황실을 지키는 요새이자 관리들을 배불리기 위한 나루터를 자임했다고 해서 베이징에서 떨어지는 떡고물만으로 번영을 구가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베이징을 등에 업은 정치적 위상과 북방요새로서의 군사적 중요성은 오늘날의 경제적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것이지만 톈진을 중국 북방교역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하는 데에는 큰 몫을 했다.
어원학자들에 따르면, 톈진의 옛 이름인 즈꾸(直沽)의 ‘꾸(沽)’에는 ‘사고팔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물수(水) 변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물길을 통해 사고파는 곳 정도로 해석하면 어떨까? 어찌됐든 톈진은 오래전부터 상거래가 활발했던 지역임을 추측해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톈진에는 소금도 있었다. 다들 알다시피, 영어로 급여를 뜻하는 salary는 과거 로마가 병사들에게 소금으로 급료를 지급한 데에서 기원한다. 그래서인지 라틴어 어원도 salt(소금)와 같다. 이처럼 지구상의 거의 전 지역에서 소금은 철과 함께 부와 권력을 상징하는 핵심자원이었다. 기원전 81년 한(漢)나라 때, 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할 것이냐를 두고 벌어진 소위 ‘염철(鹽鐵)’ 논쟁에서 보듯, 중국에서도 소금과 철은 매우 중요했다. 아니, 어쩌면 중국만큼 소금이 중요한 문명도 없을지 모른다. 땅덩이가 크지 않고 삼면이 바다인 우리로서는 체감하기 쉽지 않지만, 중국내륙 깊숙한 곳에서 소금은 때로는 금보다 구하기 어려운 귀중품이었다. 바다가 가까우면 바닷물을 끓이거나 햇빛에 말려 손쉽게 해염(海鹽)을 구할 수 있다. 하지만 해염을 내륙까지 운반하다보면 가격이 천정부지로 올라갈 수밖에 없다. 내륙 깊숙이 위치한 쓰촨(四川)이나 티베트에서 바닷가 소금을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내륙에서는 해염이 아니라 산을 파헤쳐 암염(巖鹽)을 채취해야 한다. 심지어 우리에게는 사실상 없는 개념이지만 염분이 많은 호수의 물로 호염(胡鹽)을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지금도 중국에서는 호염이 매년 수백 만 톤씩 생산되고 있고, 해염보다는 암염을 더 많이 채취하고 식용한다. 이처럼 귀하다보니 중국에서 소금은 거의 항상 국가의 전매대상이었고 사고팔고 운반하는 데 모두 소금세를 매겼다. 어떨 때에는 국가의 수입 중 절반 이상이 소금세로 충당되기도 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소금세와 소금전매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놀랍게도 중국에서 소금의 전매가 완전히 폐지된 해는 2017년 바로 올해이다. 소금세는 있으나마나할 만큼 작은 비중이긴 하지만 아직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지금의 중국이 과거처럼 백성으로부터 세금을 짜내기 위해 소금세와 소금전매를 유지하고자 한 것은 물론 아니다. 이유인즉슨 이렇다. 우리가 주로 먹는 천일염은 바닷물에서 추출된 요오드 성분이 많지만, 광산에서 채취한 암염은 요오드가 없다. 그래서 내륙의 중국인들은 해산물에서 얻을 수 있는 요오드가 부족해 약 7억 명이 요오드결핍 상태에 있다. 전 세계 요오드결핍 인구의 40%가 중국인이라니 더 이상 부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에서는 인민의 건강과 직결된 요오드를 의무적으로 소금에 첨가하도록 했고 그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최근까지도 소금전매와 소금세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사진 2 톈진 창루 지역의 소금
발해만(渤海灣)을 끼고 있는 톈진은 이토록 중요한 소금이 나오기에 최적화된 지역 중 하나였다. 더구나 베이징의 코앞에 있었다. 조금 과장된 비유겠지만, 인천 앞바다에 유전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이 지역의 땅이 농사짓기에 좋은 옥토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소금은 더욱 소중했다. 중국의 고대 기록에서도 톈진을 ‘비옥하지 못한 불모지’라 평하고 있다. 본래 바다였다가 차츰 황허의 진흙이 쌓여 육지가 된 곳이다 보니, 땅에 소금기가 섞여들었던 탓일 게다. 톈진은 농사를 짓기에 지력이 좋지 않다는 비유적 의미에서도 ‘소금밭’이었지만 또한 발해만 덕분에 소금이 풍부했다는 점에서도 말 그대로 ‘소금밭’이었다.
소금은 근대에 들어서도 톈진의 번영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원천이었다. 20세기 초, 중국의 대표적 민족기업가였던 판쉬동(范旭東)은 1914년 톈진의 바닷가 탕구에 ‘쥬다(久大)’라는 소금회사를 건립했다. 이를 토대로, 판쉬동은 중국 화학산업의 기반을 다졌다고 평가된다. 비록 지금은 내륙의 쓰촨으로 본부가 이전했지만 ‘쥬다’는 여전히 중국 굴지의 소금회사이다. 톈진에서 소금이 차지하는 위상과 역사연원을 고려해보면, ‘오래되고 크다’는 의미의 ‘쥬다’는 참으로 절묘한 이름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에서 화학을 전공한 판쉬동은 톈진의 바닷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소금을 보고 화학자로서의 야심이 꿈틀거렸다고 한다. 길이가 400킬로미터에 육박하고 지금도 여전히 중국의 4대 소금생산지 중 하나인 톈진의 창루(長蘆) 지역에서 소금을 퍼 담는 모습을 보면, 판쉬동의 마음이 동할 만도 했을 것이다.
소금은 톈진의 요리에도 영향을 미쳤다. 만두 비스무리 한 거우부리(狗不理)와 꽈배기인 마화(麻花) 외에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톈진의 먹거리지만, 굳이 특색을 꼽자면 ‘짜고 신선한(咸鮮)’ 맛이라 할 게다. 풍부한 소금과 발해만의 해산물이 어우러진 맛이라고나 할까. 건강을 염려하는 현대인에게는 짠 맛이 피해야 할 신호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소금이 귀했던 과거에는 풍요와 부귀를 드러내는 비싼 맛이었다. 아마도 과거의 톈진 요리는 지금보다는 조금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게 분명하다.
톈진은 역사적으로 물길과 소금을 통해 형성되었지만 가장 중요한 번영의 조건은 역시 베이징이었다. 베이징이 없었다면 운하와 바닷길은 큰 쓸모가 없었을 것이며 넘쳐나는 소금도 그 소비자를 찾기 어려웠을 것이다. 현재 운하는 막혀 도심의 공원과 유원지 역할을 할 뿐이다. 대신 과거의 소금밭 위로 바닷가라는 의미를 그대로 살린 빈하이신도시(濱海新區)가 들어서고 여기에 엄청난 물동량을 자랑하는 항구가 건설되었다. 빈하이신도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장과 사무실이 소금밭을 메꾸고 세워졌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말하곤 한다. 소금은 여전히 많이 생산되지만 더 이상 중요한 생산품은 아니다. 강철과 화학약품이 소금을 대신해 톈진의 부를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베이징, 톈진, 허베이성(河北省)의 머리글자를 딴 ‘징진지(京津冀)’라는 유행어에서도 알 수 있듯, 여전히 이 모든 부의 배경에는 베이징이 자리하고 있다. ‘징진지’는 서열을 표시한 것이기도 하다. 수도 베이징을 더럽히는 화학공장은 빈하이신도시의 바닷가로 이전되고, 톈진은 좀 덜 세련된 산업과 사람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베이징의 교양 없는 시민들은 톈진을 기생(寄生)의 도시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톈진이 베이징에 기생한 것인지 베이징이라는 거대권력이 톈진에 기생한 것인지는 보기 나름이다. 분명한 사실은 ‘징진지’라는 하나의 단어로 베이징과 묶여버린 톈진의 운명과 번영은 과거 천년 넘게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계속 베이징과 함께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새삼 인천이 생각난다.
【중국도시이야기 6】
조형진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참고문헌
미야자키 이치사다 지음. 전혜선 옮김. 『수양제: 전쟁과 대운하에 미친 중국 최악의 폭군』. 역사비평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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