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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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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호
문명과 비문명 사이의 진실 – 대만 원주민의 명칭에 담긴 차별 _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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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만 원주민의 기원

   

대만의 남도어족(南島語族, Austrinesian, 또는 Malayopolynesian) 집단에 대한 체계적인 분류는 일본 식민시기(1895년부터 1945년까지)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남도어족군의 분포와 주요 활동 범위는 태평양과 인도양의 도서 지역으로 볼 수 있다. 남도어족은 태평양 전체 지역과 인도양의 도서 지역을 비롯해 수많은 연안 지역이 널리 퍼져있었으나, 빙하기 시대의 수렵인이 가진 초보적인 항해 기술만 가지고는 넓은 바다를 건너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남도어족은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고 해조의 흐름에 따라 배를 움직이는 항해 기술을 갖춘 기원전 3,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계절풍과 해류를 이용해 대만 섬에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리고 현재 언어학의 연구 성과와 유전자 분석을 통해 바다를 건너온 이들이 대만 원주민의 먼 조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1) 신석기시대가 막을 올리면서부터 태평양 전 지역과 인도양 일대에 남도어족의 대이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후기 인류는 대만 섬에 넘어와 정착하면서 원주민 문화의 원형을 이루었다. 이들은 농경을 시작했으며 수렵과 어업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다만 정착한 원주민들은 문자를 사용하거나 기록물을 남기지 않았으므로 그들의 역사와 문화는 대만 섬 밖에서 온 사람들이 쓴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17세기 대항해시대가 시작되면서 그 여파가 멀리 동아시아까지 미치게 되었다. 멀리 서양에서 온 탐험가와 상인은 동남아를 넘어 중국과 일본으로 가는 길목에서 대만을 발견하면서 비로소 대만 섬이 이들의 손을 통해 세계사의 일각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사실 바다 건너 대륙에는 일찍이 대만 섬에 대한 기록이 있었지만, 대륙의 눈에서 대만은 바다 건너 멀리 이방인이 사는 땅이라는 인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7세기 이후 멀리 서구에서 온 스페인, 네덜란드에 의해 대만 섬의 가치가 발굴되었다. 이들은 대만 섬에서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식민 통치를 펼쳤다. 그리고 외부에서 온 통치자들은 그들의 시선으로 대만 섬에 살고 있던 원주민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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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남도어족의 분포

         

2. 숙번과 생번, 문명과 야만?

     

서구에서 온 사람들의 눈에 대만 원주민은 말 그대로 선주민이자 노동력으로 보고 있었지만, 이들에게 문명의 척도를 강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동아시아의 청과 일본에 의해 문명과 귀화를 기준으로 원주민을 구분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원주민에 대한 명칭에는 문명과 비문명의 교착이 담겨 있다.

        

본래 중국에서 대만의 원주민을 지칭할 때는 ()”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이 표현은 수당시대의 문헌 속에서 찾을 수 있으며, 본래 무용(武勇), 무용을 가진 자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당 시기부터 이민족 등 교화되지 않은 무리를 지칭하는 용도로 쓰였다. 이후 명청 시기의 기록에서 동번(東番)” 혹은 ()”이 대만 원주민을 지칭하고 있는 사례를 찾으며, 점차 비문명과 야만인을 지칭하는 의미를 가지게 된다.

         

17세기 말, 청나라가 대만을 통치하면서부터 대륙에 있던 한인들이 대거 대만으로 넘어와 섬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로인해 대만 원주민들도 한인 및 그들의 문화와의 관계가 따라 문화와 풍속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에도 변화가 생겼다. 청의 통치자들은 한인과의 관계 및 거주하는 지역을 고려해 토번(土番)야번(野番)숙번(熟番)생번(生番)평포번(平埔番)산번(山番고산번(高山番) 등으로 원주민을 구분했다.

        

이 명칭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자면, 청대 생번과 숙번에 대한 구분은 주로 청 정부의 통치와 과세 개념에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 청 통치자의 입장에서 부르는 숙번(熟番)”은 청에 귀화하거나 교화되어 풍속과 습관을 한인에 가깝게 바꾼 원주민을 말한다. 반면 생번(生番)”아직 교화되지 않고(生敎未通)’, ‘산과 골짜기에 숨어 사는(闢處山谷)’ 자들로 교화의 범위 밖(化外)에 있는 원주민 무리를 지칭하는 표현이 되었다. “생번(生番)”야번(野番)”으로도 불리며 쉽게 말해 청의 통치 범위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을 지칭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 귀화한 생번을 뜻하는 화번(化番)”이 있다. 청에서 귀화한 원주민을 뜻하는 화번은 선량한 백성(한인 및 숙번을 말한다)에게 해가 되지 않으며, 또한 인명에 피해를 주는 출초(出草)2)를 하지 않고, 백성을 괴롭히는 흉악한 원주민인 흉번(兇番)을 평정하는 데 협조하는 등 청의 통치에 도움을 준 원주민을 말한다. 다만 화번은 변발하지 않고 한인의 복장으로 바꿔입지 않으나 관청에 세금을 내고 사는 원주민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즉 번()이라는 표현은 청이라는 통치자 중심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번은 본래 안과 밖의 종족적인 구분의 표현으로 사용되었으나 점차 통치의 적용 및 귀화의 여부로 그 기준에는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청의 관원이 한인에게 세금을 부과한 것과 마찬가지로 원주민들에게도 세금을 부과했다. 다만 한인과는 달리 원주민에게는 육향(陸餉)3), 번향(番餉), 사향(社餉) 등 명목의 세금을 거두었다. 이 중 번향(番餉)은 일률적으로 원주민 부락인 사()를 징수 단위로 규정한 것으로, 각 사()에 부과되는 할당량은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참고로 이 시기 한인들이 사는 부락은 장()으로 불렀으며, 원주민이 사는 부락은 사()라고 하여 종족에 따라 거주지를 구분했다. 사에 거주하는 숙번은 한인과 마찬가지로 세금을 납부하고 각종 부역에 동원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숙번은 한인을 따라 변발을 하고 풍모 또한 한인에게 맞춰야 하는 문화적 세례를 받아야만 했다. 즉 대만의 생번과 숙번은 그 종족과 혈연에 따라 정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원주민과 통치 주체인 청과의 관계가 어떻게 설정되고 변하는가에 따라서 생번과 숙번을 구분하는 기준은 유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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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청대 기록에서의 대만 원주민

      

3. 현대의 대만 원주민

   

1895년의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일본이 대만을 식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대만에 있는 한인뿐만 아니라 원주민 또한 일본인들의 주요 통치 대상이 되었으며, 이전의 통치자와 마찬가지로 일본은 원주민을 구분했다. 식민통치 초기에는 일본인들도 한인을 제외한 원주민을 지칭하는 할 때는 ()”를 사용했으나, 이후 문명과 비문명을 기준 삼아 원주민에게 비하와 경멸의 의도를 담아 글자를 바꾸어 ()”()”으로 고쳐 부르기도 했다.

     

청의 통치하에서 사용되던 생번·숙번은 일본 식민시기에는 학술적 연구를 통한 분류를 근거로 삼아 평포족(平埔族고산족(高山族 혹은 高砂族)으로 대체되었다.4) 일본 식민시기 원주민에 대한 학술분류에서의 평포족은 청대의 숙번(熟番)을 말하며 생번은 고산족을 지칭한다. 평포족과 고산족의 명칭은 1920년대에 들어 정착되었으나 일본인과 원주민, 그리고 원주민 중에서도 평포족과 고산족은 다르다는 차별적인 인식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만 일본 식민 시기에 인류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대만 원주민을 구분하는 기준이 정리되었다. 이 연구 성과에 따라 대만 원주민 중 평포족은 대략 7개에서 12개의 집단으로 구분되었다. 고산족의 기원와 구분에는 다양한 주장과 학설이 있었다. 1935, 고산족에 대한 조사를 바탕으로 구족설(九族說)”이 나와 고산족을 아홉 부족으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학술적인 조사와 연구를 통해 원주민을 구분했으나, 현실에서는 여전히 원주민에 대한 차별과 비하의 인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학술 연구를 바탕으로 평포족과 고산족의 명칭이 보편화되었으나 평포족은 비교적 문명에 가깝고 친화적이며, 고산족은 야만적이고 흉포하다는 고정관념도 함께 형성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1945년에 일본의 식민 통치가 종식되면서 중화민국 정부가 대만에 들어왔다. 당시 중화민국 정부는 고산족을 산포(山胞)”로 규정했으며, 행정 구획에서도 산지동포(山地同胞)와 평지동포(平地同胞)의 구역을 구분했다. 나중에 다시 이 둘을 합쳐 고산족으로 통칭했으나, 평포족의 대다수가 이 원주민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았으며 그들의 권리 또한 인정받지 못했다.

        

현재 대만 원주민은 사오족(邵族까마란족(噶瑪蘭族타로꼬족(太魯閣族사키자이아족(撒奇萊雅族사이덕족(賽德克族) 등을 포함하는 총 14개 부족이 대만 원주민으로 공인받고 있다. 그리고 최근 연구를 통해 환경 조건 등을 제외하면 실제 평포족과 고산족의 전통과 문화의 원류는 그 뿌리가 같으며, 양자가 전혀 다른 집단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다. 20세기 이전까지 외부 정권에 의해 만들어진 원주민에 대한 명칭은 통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명칭은 당시 통치자의 관점과 문명과 비문명, 그리고 통치자와 피통치자라는 차별적 인식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원주민 사회가 내포하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민족적 특성(ethnicity)과 기원은 무시되었으며, 원주민 고유의 정체성 또한 고려되지 않았다.

       

원주민의 정명과 복권 문제는 현대 대만 사회에서 논란이 되고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 개헌이라는 당시 사회 분위기를 틈타 고산족의 부족들이 집단 운동을 통해 그들의 정체성이 담겨 있는 원주민(原住民)”을 정식 명칭으로 사용해달라는 정명 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고산족 역시 자신들을 원주민으로 불러줄 것을 주장했으며, 언론 매체가 이 원주민이라는 명칭이 일반화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1994년이 되어서 정부는 그들의 요구에 응하여 산포원주민으로 정식 개칭하는 것을 허가했다. 그러나 이때 규정한 원주민의 범주에도 대다수의 평포족은 포함되지 않았으며, 2003년에 외부 침략자들에게 빼앗긴 자신들의 토지를 돌려달라는 원주민들의 운동(「反侵占爭生存還我土地」)이 일어나는 배경이 되었다. 이 운동은 대만의 일반 대중들이 평포족의 존재를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평포족 일부는 자신들을 대만 원주민의 일부로 인정하고 권리를 되돌려 달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5)





김봉준 _ 인천대 중국·화교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필자의 개인적 의견이며 중국학술원의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참고문헌

1) 다만 일부 연구자들은 대만의 남도어족군이 외부에서 유입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만의 도서지역에 살던 어족군이 대만 밖으로 이주해 나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최근 대만 고고학계는 현재 고산족에 속하는 여러 민족과 평포족은 대만 다족군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자원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유일한, 주로 도서 지역에 분포된 대어계(大語系) 민족의 기원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주장하기도 한다.

2出草: 대만 원주민의 관습 중 하나로 성인식 등을 이유로 다른 부족 사람의 머리를 베어오거나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원주민 부족 간의 충돌을 조장하기도 하였다.

3) 陸餉: 육상 무역 혹은 통상 등에 부과하는 세금을 의미한다. 또한 수향(水餉)이 있는데 이는 내륙 수운을 통한 통상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당시 원주민들은 육향과 수향 이외에도 인두세에 해당하는 번향(番餉) 등을 관청에 납부해야 했다.

4) 일본 측 기록에서 고산국의 명칭을 확인할 수 있는 가장 이른 사례는, 1593(文禄 3)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나가사키 상인 하라다 마고시치로(原田孫七郎)을 통해 '고산국(高山国)'의 국왕에게 조공을 요구하는 서장을 보낸 것이다. 하라다는 고산국의 실체에 대해서 알지도 못했기에 고산국왕을 만나 국서를 전달하는 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5) 대만 원주민의 정명 운동에 관해서는 아래 기사를 참조. https://url.kr/hqzun8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남도어족의 분포: Austronesia with hypothetical greatest expansion extent (Blench, 2009).

사진 2. 청대 기록에서의 대만 원주민: 諸羅縣內山阿里等社歸化生番, ()謝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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