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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관행 톡톡
1월호
심양의 역사와 서탑가의 코리아타운 _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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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양은 중국 요녕성의 성도이며, 상해, 북경, 천진 등을 뒤이어 인구 8백여만 명의 거대 도시이다. 심양은 예전에 奉天, 盛京이라고도 불렸으며, 만주어로는 묵덴(Mukden)이라 하였다. 심양이라 부르게 된 내력은 瀋水의 북쪽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물의 북쪽을 陽이라 하고 남쪽을 陰이라 하였으니, 漢陽이 한강의 북쪽에 위치하여 이름 지어진 것과 같은 원리이다. 조선시대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柵門을 거쳐 요양으로 가서 白塔을 구경하고, 심양, 산해관을 거쳐 북경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인 코스였다.


기록에 따르면, 춘추전국시대 심양은 肅愼의 세력권이었다. 한대에는 이 지역에 요동군 소속의 侯縣城이 설치되었다. 뒤에 고구려의 영토에 속했다가 다시 당나라의 지배지역으로 편입되어 瀋州가 되었다. 그 후 발해에 속했다가 遼, 金 시기에는 東京路, 원대에는 瀋陽路가 설치되었다. 명대에는 이 지역을 변경의 요지로 삼아 瀋陽衛를 두었다. 명말 누르하치가 후금정권을 세우고 심양으로 천도하여 이 지역을 盛京이라 불렀다.


청조 순치 연간에 중국 관내지역으로부터 흉년과 기아에 시달리던 유민들이 토지와 자유를 찾아 동북지역으로 몰려 들어왔다. 이주민들은 육로나 해로를 통해 유입되었으며, 특히 산동성과 하북성 출신이 많았다. 이주민이 급증하자 청조는 이들을 관리하기 위해 현재의 요녕지방에 州縣을 두고 지방관을 임명하였다. 1657년 4월 지방최고관리기관으로서 성경 내에 奉天府를 두었다. 이것이 심양이 봉천으로 불리게 된 시초이다.


청대 광서 33년(1907년)에 관제를 개편하면서 성급행정기구로서 奉天行省公署가 만들어져 봉천성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봉천성은 8개 府와 5개의 直轄廳, 3개의 廳, 6개의 州와 33개의 縣을 거느리고 있었다. 1912년 1월에 국민정부가 이전의 부, 청, 주를 일률적으로 縣으로 개정하는 칙령을 반포하면서 성급기구의 명칭은 행정공서라 부르거나 성장공서, 성정부 등으로 불렸다. 따라서 봉천부는 봉천성정부로 불렸다. 봉천부는 사라졌지만 봉천은 그대로 현의 명칭으로 존재하게 되었던 것이다. 봉천이 현의 명칭으로 유지된 지 4개월만인 1913년 4월에 봉천성과 명칭이 같다는 이유로 봉천현은 承德縣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다시 5월에는 沈陽縣으로 변경되었다.


봉천이라는 명칭은 본래 “하늘을 받들어 제사를 지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신해혁명 이후 帝制가 무너지고 공화정이 수립된 마당에 봉천이라는 명칭이 중화민국의 정체성과 상호 부합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결과 국민정부 제18차 국무회의의 결정에 따라 1929년 국민정부 제91호 훈령에 의거하여 봉천성은 요녕성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32년부터 1945년 만주국 시기에 요녕성은 철폐되어 봉천성과 錦州省, 安東省의 3성으로 분리되었다.


봉천이 시의 명칭이 된 것은 1923년부터이다. 1923년 5월 3일 봉천시정공소주비처가 성립되어 같은 해 8월 봉천시정공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1929년 봉천성이 요녕성으로 개명되면서 심양시로 개칭되었으나, 1931년 9월 18일 일본군이 심양을 점령하면서 11월 20일 심양시는 다시 봉천시로 변경되었다. 만주국은 부의가 황제로 등극하면서 제제를 선포하였으니, 봉천이라는 명칭은 이와 같은 정체성에 적합한 명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45년 2차대전 종전 후 중국이 동북의 실지를 수복하면서 봉천성과 봉천시는 요녕성과 심양시라는 명칭을 회복하였다.


명조가 무너지고 청조가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심양의 인구가 크게 감소하자 요동평야 일대의 농업과 수공업은 날로 쇠퇴해갔다. 이에 1653년 청조는 피폐한 요동의 중건 및 군량의 확보를 위해 遼東招墾令을 반포하여 관내 한인의 만주 이주를 장려하였다. 그러나 1668년 이것이 폐지되면서 만주를 금구로 묶어 자유로운 이주와 개간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건륭 말기 관내의 기아와 흉년으로 기아가 속출하자 다시 봉금정책이 완화되면서 동북지역으로의 이민이 증가하였다.


심양이 상업의 중심지로 발돋움하면서 인구도 크게 증가하였다. 1880년 이전 10만 명 정도에 불과했던 심양의 인구가 1895년 청일전쟁 직전 약 25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러일전쟁을 겪으면서 최대 격전지였던 심양은 심양대회전으로 인구가 재차 급감하였다. 그러나 전후 철도의 복구, 상공업 진흥 등에 노동력이 필요하면서 심양의 인구는 곧 전전의 수준을 회복하였음은 물론, 신해혁명 직전에는 47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심양에서 인구의 증가는 자연증가보다는 이주노동자의 급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이주자의 대부분이 노동력이 왕성한 독신남성으로 구성되어 심양의 남녀 성비는 매우 불균형하였다. 만주국시기가 되면 봉천은 공업도시로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鐵西지역에서 공장의 건설이 눈에 띄게 진전되었다. 공업화가 진전되면서 인구의 증가를 수반하여 1940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서 동북지역에서 유일하게 10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도시가 되었다. 봉천성 전체의 인구를 보더라도 1894년으로부터 1911년까지 17년간 크게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 1850년에는 2,571,346명이었던 것이 1911년에는 12,924,779명으로 5배 이상 증가하였다. 청말 봉천지역의 이주민은 약 500만 정도에 달하였다.



사진 1  옛 봉천의 거리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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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천에 조선인들이 이주해 들어온 것은 1897년부터였으며, 1900년부터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1905년 3월 10일 일본군은 봉천을 함락시킨 후, 같은 해 12월 3일 안동에서 봉천에 이르는 안봉철도 협궤선을 개통시켰다. 더욱이 1911년 압록강철교가 완공되어 부산-서울-의주-안동-봉천행 직통열차가 개통됨으로써 수많은 조선인들이 동북지역, 특히 봉천으로 이주하였다. 일제시대 ‘송곳을 꽂을 땅 한 평 없는’ 수많은 조선의 빈민들이 기아와 흉년을 피해 토지와 자유를 찾아 만주로 나섰으며, 열차를 타고 도착하는 종착역이 바로 봉천이었던 것이다. 1933년 4월 1일부터는 특급열차 히카리호가, 1934년 11월 1일부터는 노조미호가 운행을 개시하여 서울과 봉천이 더욱 가까워졌다.


식민지 시대에 만주는 암울한 조선인들에게 기회와 생존의 신천지로 투영되었다. 봉천은 조선인의 주요한 이주 대상지역이었다. 오죽하면 진도아리랑에도 “만주야 奉天은 얼마나 조먼(좋으면) 꽃같은 각씨두고 만주봉천을 가는고”라는 가사가 나올 정도였다. 낮선 현지에 도착하여 농사를 짓거나 온갖 잡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조선인들의 이미지는 흔히 ‘봉천개장수’라는 말에서도 잘 나타난다. 딱히 기술이나 직업이 없던 사람들이 개를 키워 팔거나 개장국집을 열어 장사하며 생계를 이어가던 모습을 연상하기 어렵지 않다. 오죽했으면 만주까지 가서 개를 팔았을까 생각도 들지만, 이들 중 일부는 개를 팔아 모은 돈을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전하기도 했다. 봉천개장수라는 말은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들의 꺾이지 않는 의지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던 것이다.


만주지역은 청조의 발흥지로서, 여진족의 후예인 만주족은 수렵, 목축이 주업이었다. 따라서 개는 생계를 위해 항상 가족처럼 옆을 지키는 존재였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을 보더라도 만주족이 늘 개를 옆에 두고 생활하는 장면이 수없이 등장한다. 예컨대 만주족의 영도자인 칸의 생활과 관련하여 “밥을 먹을 때는 군막 안으로 개들이 들어와 앞다리를 버티고 앉아 있어도 칸은 개들을 내쫒지 않았다. 칸이 고깃덩이를 높이 던지면 개들이 솟구쳐 올라 고기를 받아먹었다. 빈손으로 던지는 시늉만 하면 개들은 솟구쳐 오르지 않았다. 부족장들은 허리를 꺾고 웃었다”라고 묘사하였다.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가 항복하던 날에도 칸(청 태종)의 옆에는 개들이 있었다. “조선 왕은 황색 일산 앞에 꿇어앉았다.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칸이 술 석 잔을 내렸다. 조선 왕은 한 잔에 세 번씩 다시 절했다. 개들이 황색 일산 안으로 들어왔다. 칸이 술상 위로 고기를 던졌다. 뛰어오른 개가 고기를 물고 일산 밖으로 나갔다.”


그래서인지 만주족 사이에서는 일반적으로 개를 식용으로 하는 습관이 없었다. 그러나 청이 북경으로 천도한 이후 수렵, 목축에서 주요한 역할을 해 왔던 개들은 그대로 이 지역에 남았으며, 남은 개들은 이주해 온 조선인들에게 생계를 위한 좋은 대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한반도로부터 만주로 가는 독립운동가가 일본순사의 질문에 “만주로 가서 개장수라도 해서 생계를 이으려 한다"고 구실을 대거나, 혹은 장기간 출타 시 구구절절하게 내역을 이야기하기보다 이것이 간단하고도 통상적인 대답이 되기도 하였다.


일찍이 홍타이지가 사망한 1643년에 심양에는 서탑이 세워져 이 지역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일제시대 조선인들은 서탑 주위에 몰려들어 삶을 꾸렸는데, 당시에는 갈대가 무성했다고 하는 이 지역은 지금 마천루로 가득하다. 일제시대 서탑 주위로 이주해 온 사람들 가운데 봉천 갈대밭에서 참게를 잡아 생계를 유지한 사람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일제시대 봉천개장사 골목이 바로 서탑지역이며, 일제시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한 지역도 이곳이다. 또한 소설에서 시라소니와 김두한이 등장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현재 심양시에 거주하는 조선족은 약 10만 명에 달하여, 요녕성에 거주하는 조선족 전체의 40% 정도를 차지한다. 시내 안에서 조선족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 바로 서탑가이다. 서탑가는 심양의 경제적 중심이며 심양의 밤 문화도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심양의 돈은 모두 이곳으로 모이고 또 이곳에서 나간다고 한다. 서탑이 오늘날의 번영을 이룬 것은 한국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 지역은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초기에 서탑에 투자한 사람들도 바로 한국인이었다. 이들이 한식당, 노래방 등을 열면서 서탑의 번영을 이끌었다. 그래서 이들은 “서탑의 거리는 한국인들이 건설했다”고 힘주어 말한다.


현재 심양시에는 서탑가를 중심으로 수만 명이 모여 거주하는 중국내 최대의 코리아타운이 형성되어 있어 마치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한인타운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서탑거리는 한국인과 북한국적의 사람들, 그리고 조선족이 모여 사는 작은 통일한국이다. 서탑거리에 나서면 한국어 간판들로 마치 서울이나 연변에 온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여기에서는 중국말을 하지 못하더라도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이다. 노래방, 사우나, 꽃가게, 전자상가, 옷시장, 새서울노래방, 명동집, 경복궁, 전주비빔밥, 평양냉면 등 한글간판을 달고 있어 한반도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이다. 수원왕갈비의 소갈비와 불고기, 백제원의 회세트, 경회루의 광어샤브샤브와 연포탕, 솥뚜껑삼겹살의 돼지삼겹살은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현지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사진 2  심양의 서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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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도 기차가 북한의 평양에서 출발하여 신의주와 심양을 거쳐 북경으로 향한다. 먼 훗날 통일이 되면 과거 일제시대처럼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서울과 평양, 신의주를 거쳐 심양에 정차한 이후 다시 북경으로 향하게 될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심양은 한중간의 교역과 교류를 위한 핵심적인 지역으로 크게 부상할 것임에 틀림없다.


【중국도시이야기 4】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http://iccs.aichi-u.ac.jp/postcard/manzhou/sengtian/MF006/

http://m.770760.net/read/1954598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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