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근래 중국 정부에 의해 ‘중화민족대가정’이라는 말이 자주 언급되고 있다. ‘대가정’이라는 말은 원래 중국 전통 가족제도의 특징을 상징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중화민족’이라는 민족 자체도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개념이지만, 국가 자체를 ‘대가정’으로 보는 ‘중화민족대가정’이라는 말은 그야말로 신조어이다. 의미는 개인, 가족, 국가를 하나의 공동체로 구축하고 국가 발전의 기치 아래 여러 민족 간 화합과 단결을 도모한다는 것이다. 중국은 예로부터 가정과 국가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 가정의 화목은 사회 안정의 기초였고, 국가의 안정은 곧 가정의 평안을 보장했다.1)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별개로 여겨지는 가정과 국가가 중국에서는 여전히 국가의 통일과 민족 부흥을 이루는 데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정부 주도하에 민족간 화합을 상징하는 ‘중화민족대가정’ 담론은 어쩌면 본래의 의미를 희석하고 변질시킬지도 모른다. 이에 ‘대가정’은 무엇이고 어떻게 사용되었던 말인지 그 역사와 의미를 짚어보기로 하자.
전통 중국사회에서 가정을 의미하는 용어는 ‘가(家)’이다. ‘가’라는 용어를 좁은 의미에서 본다면, ‘가정의 회계[家計]를 함께하는 생활공동체’, 즉 개별가정을 의미한다. 이는 현대 사회학에서 말하는 ‘가정’과 기본적으로 동일한 의미이다. 그러나 ‘가’는 넓은 의미에서는 가계(家系)를 같이 하는 사람, 즉 종족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2)
좀 더 쉽게 말하면 ‘가정’을 영어로는 family로 번역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사실 서구 사회학에서 말하는 family와 ‘가’는 완전히 동일한 의미는 아니다. 서구 현대사회에서 family는 부모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정, 즉 핵심가정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중국의 ‘가’는 핵심가정을 기초로 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2대 이상 중층의 핵심가정을 포함하기도 한다. 즉, 중국인이 말하는 ‘가’는 기본적으로 하나의 가정을 의미하기는 하지만, 때로는 성년 자녀 혹은 기혼 자녀를 포함하기도 하고, 혹은 먼 부계(父系) 친척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이었기 때문이다. ‘가’는 상당히 유연한 개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페이샤오퉁(費孝通)이 중국의 ‘가’를 ‘확대된 가정(Extended family)’이라고3) 표현한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 가족제도의 독특함이 내재되어 있다.
중국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대가정’과 ‘소가정’이라는 말도 이와 연동되어 있다. 가정 앞에 ‘대’, ‘소’자가 붙은 것은 이것이 가정 형태나 규모를 나타내주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 기준은 가족의 수가 아니었다. 오히려 세대(世代)와 세계(世系)의 다과를 의미했다. 세대는 가장(家長)과 자녀, 부모, 조부모 등을 의미하고, 세계는 가장과 가장의 형제자매, 숙백(叔伯) 형제자매 등을 의미한다.4) 예를 들어, 부모와 자녀 10명으로 구성된 12인 가족이라 할지라도 부모와 자녀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대가정’이라고 하지 않는다. 또 부모와 아들, 며느리로 구성된 4인 가족은 중층 핵심가정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소가정’이라 하지 않는다.5)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근대 시기 가정의 규모를 알 수 있게 하는 정확한 통계나 가정인구의 범위에 대한 분명한 표준은 없었다.6) 따라서 가족의 수로 ‘대가정’과 ‘소가정’을 구분할 수는 없다.
1920-30년대에 이르러 사회학, 인류학 개념이 도입되고 농촌사회조사가 활발하게 진행되면서 이에 대한 정의와 표준을 확립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다. 당시 학자들 중 판광단(潘光旦)은 대가정제도를 ‘조부모, 부모, 아들의 동거만이 아니라 형제, 숙질(叔姪)이 오래 함께하며 경제적으로 일체가 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7) 미국학자 버크(John L. Buck)는 ‘대가정’을 ‘가장과 처,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정을 제외한 기타 함께 먹고 자는 친속이 있는 것’으로 정의했다. 옌신저(言心哲)는 ‘부모와 자녀로 구성된 가정을 제외하고 조부모, 백숙(伯叔)부모, 형제자매, 사촌 형제자매나 기타 근친속이 동거하는 형태’라고 정의했다.8)
이를 현대 사회학 개념으로 더 명확하게 한 것이 핵심가정, 직계가정, 복합가정의 구분이다. 당대(當代) 중국 인구학자 왕웨성(王躍生)에 의하면, 핵심가정은 부모와 미혼 자녀로 구성된 가정이고, 직계가정은 조부모, 부모, 미혼 자녀로 이루어진 가정을 말한다. 복합가정이란 부모와 기혼 자녀들 및 그 가족까지 함께 생활하는 형태를 말한다.9) 일찍이 미국학자 올가 랭(Olga Lang)이 제시한 구분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10) 여기에 대입해보면 판광단은 복합가정만을 ‘대가정’으로 간주한 것이고, 버크와 옌신저는 핵심가정 외에는 모두 ‘대가정’으로 정의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견해 차이로 인해 ‘대가정’과 ‘소가정’에 대한 명확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역시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부모와 미혼 자녀의 2대로 구성된 가정을 ‘소가정’, 부모와 자녀, 숙백부모, 사촌형제자매 등 3대 이상으로 구성된 복합가정을 ‘대가정’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가족형태를 언급할 때 사세동당(四世同堂), 오세동당(五世同堂)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몇 세대가 한집에 살면서 화목한 ‘대가정’을 이루는 형태이다. 그러나 실제로 ‘대가정’의 비율은 ‘소가정’에 비해 낮았다. 이는 시대를 막론하고 중국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11) 즉, 전통시기, 토지개혁 이후, 집체경제시기, 가정책임제시기를 막론하고 가장 보편적인 가정 형태는 모두 핵심가정, 즉 ‘소가정’이었다.12) 따라서 사세동당, 오세동당은 유가윤리에서 제창하는 이상적인 가족 형태일 뿐, 실제로 주류는 아니었다. 사실 중국의 전통가정은 부모세대와 자녀세대의 5-6명으로 구성된 소농가정이 다수를 차지했다. 세대가 내려오면서 세대 간의 간격도 멀어지고, 사회경제적 발전에 따라 사유재산 개념이 날로 팽창하면서 현실적으로 기존 세대 간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분가(分家)를 통해 ‘대가정’은 해체되고 ‘소가정’으로 분할되었다. 지역적으로도 화북, 화남을 막론하고 ‘소가정’의 비율이 높았다. 다만 화북지역에서는 ‘대가정’도 일정한 비율을 유지했고, 이것은 화남지역보다 높게 나타났다.
가정의 규모는 자연환경이나 사회경제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화북지역은 교통이 발달하지 않고 주변지역과의 접촉도 적어 고립적이고 폐쇄적이었다. 그로 인해 화북지역은 보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부모 생전에 분가하는 것을 불효로 여겨 부모 사망까지는 ‘대가정’의 국면이 지속되었다.13) 부모 생전에 분가를 금지한 전통법은 명대(明代)에 와서 ‘부모가 허락하면 가능한 것’으로 바뀌었지만,14) 화북지역에서는 여전히 그러한 분위기가 짙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주변의 도시나 상공업 발달 지역으로 인구이동이 활발하여 ‘대가정’의 해체가 빠르게 진전되었던 화남지역과는 다른 양상이었다. 즉 교통이 편리하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이 용이하고 개인주의적 사고방식이 만연하게 되어 ‘소가정’이 증가하게 되었다.
중국의 전근대 시기에는 사회보장제도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다세대의 혈연 친속이 가장의 통솔하에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 가족 성원들의 기본 생존권 보장에 유리했다. 특히 국가는 노약자에 대한 보호를 통해 가정과 사회질서를 유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15) ‘대가정’은 부모와 자녀 간의 상호 의존성을 강조하고, 일할 능력이 없는 노인들의 삶을 보장하기 때문에 사회의 연속성과 가족 간의 협력을 보장하는 데 유리했다.16) 따라서 전근대 시기 국가는 ‘대가정’을 장려했다. 분가하지 않고 기혼 아들들이 화목하게 동거하는 가정에 대해 표창을 내리는 등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사회적 여론도 여러 세대에 걸쳐 동거하는 것을 미담으로 칭송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17) 따라서 화북지역에서는 분가를 원하는 심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대가정’이 일정한 비율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억제되었던 분가는 부모 사망 이후에 성사되었고, ‘대가정’이 해체되어 ‘소가정’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한 경향은 근대로 올수록 뚜렷했다.
현대사회에서는 당연히 ‘소가정’이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상술했듯이 전통사회에서도 ‘소가정’의 비중이 ‘대가정’보다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사회는 ‘대가정’이 지배적이었고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교적인 이상이 여전히 중국인들의 관념 속에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유교적 이상을 현재에도 국가와 민족의 통합을 위해 활용한다는 것은 중국인의 전통적 사고방식이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중국문화오디세이 18】
손승희 _ 중앙대학교 연구전담교수
해당 글은 중국학술원의 공식 입장과는 무관합니다.
* 이 글은 필자의 논문 「1930-40년대 화북농촌 가정의 ‘同居共財’ 구조와 운영」, 『중국근현대사연구』 98집(2023)의 일부 내용을 발췌하여 재구성한 것이다.
* 참고문헌
1) 李洋, 何生海, 「中華民族大家庭話語的內涵意蘊與鑄牢中華民族共同體意識」, 『北方民族大學學報』1 2023-4, 23쪽.
2) 滋賀秀三, 『中國家族法の原理』, 創文社, 1981, 50-58쪽.
3) 費孝通, 『江村經濟-中國農民的生活』, 中華書局香港分局, 1987, 36쪽; 費孝通, 「論中國家庭結構的變動」, 『天津社會科學』, 1982-3, 2쪽.
4) 張折桂, 「定縣大王耨村人口調査」, 『社會學界』 5(1931), 97쪽.
5) 페이샤오퉁(費孝通) 저, 張暎碩 옮김, 『鄕土中國』, 비봉출판사, 2011, 83쪽.
6) 李景漢, 「華北農村人口之結構與問題」, 『社會學界』 8(1934), 2쪽.
7) 李金錚, 『近代中國鄕村社會經濟探微』, 人民出版社, 2004, 108-110쪽.
8) 王躍生, 「華北農村家庭結構變動硏究-立足於冀南地區的分析」, 『中國社會科學』, 2003-4, 94쪽.
9) 王躍生, 「20世紀30年代前後中國農村家庭結構分析」, 『社會科學』, 2019-1, 64쪽.
10) Myron L. Cohen, House United, House Divided, Columbia University Press, 1976, p.61.
11) 喬啓明, 「中國農村人口之結構及其消長」, 『東方雜誌』, 32-1(1935), 30쪽; 王躍生, 「華北農村家庭結構變動硏究-立足於冀南地區的分析」, 『中國社會科學』, 2003-4, 105쪽.
12) 王躍生, 「20世紀30年代前後中國農村家庭結構分析」, 『社會科學』, 2019-1, 75쪽.
13) 中國農村慣行調査刊行會編, 『中國農村慣行調査』(1), 岩波書店, 1952, 252쪽.
14) 懷效鋒點校, 『大明律』, 遼瀋書社, 1990, 241쪽.
15) 王躍生, 「20世紀30年代前後中國農村家庭結構分析」, 『社會科學』, 2019-1, 62쪽.
16) 費孝通, 『江村經濟-中國農民的生活』, 中華書局香港分局, 1987, 36쪽.
17) 喬啓明, 「中國農村人口之結構及其消長」, 『東方雜誌』, 32-1(1935), 29쪽; 西光, 「農村家庭組織的特點及其與農業的關係」, 『民間』, 2-10(1935),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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