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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갯벌로에서
12월호
대만 철도의 기원 논쟁과 탈중국화 역사 인식 _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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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한국 사회와 학계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쟁이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적이 있다. 그렇다면 같은 식민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대만에서는 식민지 근대화를 어떠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먼저 한가지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면, 한국사에서 "근대(近代)" 혹은 "근대화(近代化)"로 표현되는 개념은 대만사 연구자에게 있어서는 "현대(現代)""현대화(現代化)"로 표현된다는 차이점이 있다. 한국과 대만이 근대를 보는 인식은 이렇게 표현 하나에서도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최근 대만에서는 "탈중국화(去中國化)"의 분위기 속에서 "대만 철도의 아버지(臺灣鐵道之父)"에 대한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대만의 현 정권 이전부터 "탈중국화(去中國化)"의 경향은 나날이 힘을 얻고 있으며, 근대 역사의 인식 문제를 둘러싸고 중국 본토로부터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 또한 뚜렷해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사회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일어나고 있으며, 특히 대만의 근대화에 대한 인식과 서술에도 논쟁이 일어나고 있다.

 

대만에서 가장 먼저 철로를 부설한 것은 청말 대만순무(臺灣巡撫)를 역임했던 류밍촨(劉銘傳)으로 알려져 있다. 류밍촨은 1880년대 중후반 군사적 요충지로서 대만 방어의 필요성을 주장한 바 있다. 대만에 성곽을 짓고 철도를 두어 요충지로 만든다면 일본과 프랑스가 남양(南洋)의 문호(門戶)인 대만을 노리는 것을 막고, 중국 본토 역시 지킬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류밍촨은 청 조정에 대만 방어의 일환으로 대만에 요새를 구축하고 철도를 부설하는 계획을 건의했다. 이 계획은 이후 타이베이 성의 축조로 실현되어 오늘날 타이베이의 구획 형성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타이베이 방어 계획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사업은 철도 부설이었다. 1887년과 1890년의 기간 동안 타이베이를 중심에 두고 육상 교통의 중심지인 신주(新竹)와 중요 항구인 지룽(鷄籠, 현재의 基隆)을 잇는 두 노선의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 철도는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요충지로 수송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당시에 이 철도를 "류밍촨 철로(劉銘傳鐵路)"라 부르기도 했다.

 

한편, 대만 역사학계의 일각에서 실질적인 대만 철도의 부설은 류밍촨의 계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일본 식민시기 총독부 철로 부장을 지낸 하세가와 킨스케(長谷川謹介)의 공헌에 의한 것임을 주장한다. 하세가와는 1899년 당시 일본의 대만 총독 고토 신페이(後藤新平)의 명을 받아 기존 대만 철도의 보수 작업에 착수하였으며, 1908년에 이르러 기존 지룽-신주 노선뿐만 아니라 대만의 남북을 종횡하는 철도를 부설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공적을 들어 1911년 일본에서 간행된 대만철도사(臺灣鐵道史)에서는 류밍촨에 의해 처음 대만에 철도가 부설된 사실도 밝히고 있지만, 하세가와 킨스케(長谷川謹介)가 대만 철도의 실질적인 시조라는 점을 주장한다. 아울러 류밍촨이 19세기 말에 부설한 철도는 그 계획과 노선이 지질과 실제 환경 등을 무시하고, 오로지 군사적 목적에만 맞춰진 철도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기술이 부족한 채로 부설된 부실 노선이었다는 점을 들면서 20세기 초 일본 식민시기에 향상된 기술로 개·보수한 철도가 오늘날 대만 철도의 실질적인 원형이자 대만 산업 발전의 초석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현재 대만 사회의 일각에서는 이러한 주장과 설명에 따라 류밍촨이 아닌 당시 대만총독부 철로부장인 하세가와 킨스케를 대만 철로의 아버지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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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 청 대만순무 류밍촨                  사진 2. 일본 대만총독부 철도부장 하세가와 킨스케



청의 류밍촨이냐 일본의 하세가와 킨스케냐를 두고 일어난 대만 철도의 기원에 관한 논쟁은 사실 이 두 인물이 대표하고 있는 청과 일본에 의한 대만의 근대화 논쟁과 직접 맞닿아 있다. 중국을 지지하는 관점에서는 대만의 근대화에서 중국 본토의 영향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을 역사적 사실로써 증명하고자 한다. 반면 탈중국을 주장하고, 일본과의 현재 관계를 중요하게 보는 관점에서는 탈중국적인 사회 분위기에서 한인(漢人)이 기여했던 근대화 유산을 일본 식민시기의 유산으로 대체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대립하는 정치적 갈등이 역사 문제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며, 현 대만 정권이 문화와 경제 부분에 있어 일본에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만학계와 사회 일각에서는 대만의 문명과 현대화는 일본의 식민 통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면서, 일본 식민시기를 대만 근대화의 시발점으로 보고, 일본에 근대화의 수혜자(授惠者)라는 역사적 위상을 부여한다. 그러면서 이전 대만을 통치했던 청은 가해자(加害者) 혹은 부정적 이미지의 지배자로 보는 것으로 국민당과 같이 대륙에서 도래한 정권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반영되어있는 것이다. 사실 청과 일본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네덜란드와 같은 국가도 대만에서 식민 통치를 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대만 철도의 시초에 관한 논쟁은 역사적 사실에 대해 외부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평가와 인식은 현재 대만의 탈중국화 현상과 정치·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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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 19세기 말, 청이 부설한 대만 철도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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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20세기 초, 일본이 부설한 대만 철도노선

 


김봉준 _ 인천대 중국학술원 상임연구원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의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國立教育廣播電臺, https://channelplus.ner.gov.tw/channel-program-episode/5615

사진 2. 聯合報 https://opinion.udn.com/opinion/story/12705/4720975

사진 3. 臺灣歷史文化地圖 https://thcts.sinica.edu.tw/dl_layer_login.php

사진 4. 國立臺灣歷史博物館, https://collections.nmth.gov.tw/CollectionContent.aspx?a=132&rno=2011.012.0223.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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