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2508-2884 (Online)
1766년 2월 1일 류리창(琉璃廠).
연행사(燕行使)의 일원으로 베이징에 온 군관(軍官) 이기성은 안경을 사기 위해 성내 이곳저곳을 쑤시고 다녔지만 마땅한 안경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류리창 근처에서 자신에게 어울릴만한 안경을 낀 두 명의 중국문인을 만났다. 그는 다짜고짜 값은 후하게 치를 테니 안경을 팔라고 했다. 그 중의 한 명이 선선이 안경을 벗어주었다. 이기성은 청나라 문인들과의 교유(交遊)를 원하고 있던 홍대용에게 이를 고했다. 베이징에 동행했던 홍대용은 내처 정양문(正陽門) 밖 건정골목(乾井胡同)에 있는 천승점(天陞店)으로 그들을 찾아갔다. 홍대용을 맞이한 이는 셋이었다. 앞서 이기성이 만난 엄성(嚴盛)과 반정균(潘庭筠) 그리고 육비(陸飛)란 자였다. 이들은 모두 저장(浙江) 출신의 거인(擧人)으로, 회시(會試)를 보기 위해 베이징에 올라와 있던 참이었다. 홍대용은 이들과 한 달 넘게 필담을 나누며 매우 지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만남을 가졌다. 그리고 조선으로 돌아와 이들과의 필담을 정리한 『건정필담(乾淨筆談)』이란 책을 펴냈다. 이 책은 당시 청나라를 만주족 오랑캐라 폄하하던 조선학계에 중국문인들의 수준 높은 식견을 소개함으로써 일대 충격을 가했다. 박제가, 박지원, 이덕무 등이 청나라를 배우자는 소위 ‘북학파’를 형성하는 데에도 이 책은 꽤 몫을 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도 이 책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류리창을 다녀간 이는 홍대용만이 아니었다. 박제가도 있었다. 모두 세 차례에 걸쳐 베이징을 방문했던 박제가는 한번은 정조가 부탁한 서적을 구입하기 위해 류리창을 찾았다. 그때, 그는 류리창 인근에 있던 관음사(觀音寺)에 들러 청나라 화가 나빙(羅聘)과 조우하기도 했다. 나빙은 장쑤성(江蘇省) 양저우(揚州)에서 활동하던 화가로, 그 지역에서는 양저우팔괴(揚州八怪) 중 한 명으로 불릴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나빙은 박제가와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손수 그린 박제가의 초상화를 건넸다. 박제가의 인물 내면에 흐르는 맑은 성정과 단아한 이미지가 잘 드러나는 초상화였다. 초상화 외에도 월매도(月梅圖) 한 폭을 함께 선물했다는데, 두 사람이 관음사에서 나눈 교류의 정이 매화꽃처럼 향기롭고 깊다는 뜻을 담은 것이리라. 박제가의 추억이 남아있는 관음사는 현재 ‘호국관음사’라는 간판과 흔적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박제가의 초상화는 추사 김정희라는 인물을 역사의 무대에 등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재직하던 후지츠카 치카시(藤塚隣)가 이 초상화를 보고 한중 지식인의 문화교류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박제가의 제자인 김정희의 학문세계를 발견하고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한 끝에 도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김정희를 ‘청조문화연구의 일인자’로 높이 평가했다.
추사 역시 24세 때인 1810년 연행사의 일원으로 베이징을 방문한다. 그곳에서 그는 청나라 문인인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조강(曺江) 등과 만나 경학, 금석학, 서화 등의 분야에서 깊은 영향을 받고 돌아왔다.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진 곳 역시 류리창이었다.
류리창 인근 선무문(宣武門) 안에는 천주교성당인 남당(南堂)이 있다. 당시 베이징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성당이 하나씩 있었다. 박지원이 1780년 방문한 성당은 남당이었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선무문 안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집 마루가 둥근 것이 마치 종을 엎어 놓은 모양으로 여염집 위로 솟구쳐 나온 곳이 바로 천주당”이라 했다. 이 천주당은 마테오 리치가 1605년 건축해 1650년에 중축한 성당으로, 베이징에서 가장 오래된 예배당이다. 박지원이 본 남당 건물은 1900년 의화단의 난 때 파괴되어 사라졌고, 선무문교당(宣武門敎堂)이라 이름이 바뀐 현존 예배당은 1904년 개축된 것이다.
한국인 최초로 가톨릭세례를 받은 이승훈도 1784년 이곳 남당을 찾은 적이 있다. 그의 부친이 연행사 서장관으로 가면서 그 일원으로 따라가게 되었을 때였다. 그는 이미 서학과 천주교 교의 및 교회제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었다. 그를 맞이한 남당의 서양 선교사는 포르투갈 출신의 베이징주교인 구베아(Alexandre de Gouvea·湯士選)였다. 둘은 필담을 통해 천주교와 서학에 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누었다. 이승훈은 그 자리에서 구베아 주교에게 부탁해 세례를 받았다. 구베아 주교는 조선 천주교의 초석이 되라는 뜻에서, 이승훈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주었다. 한국 가톨릭의 시작을 알리는 이승훈의 역사적인 세례식은 남당이 아닌 북당에서 치러졌다.
베이징의 선무문교당(남당)
이처럼 류리창은 과거를 보러 지방에서 올라오는 중국의 유생들뿐만 아니라 홍대용, 박제가, 김정희 같은 조선 실학의 태두 혹은 선진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원하는 수많은 조선의 문인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장소였다.
그 옛날 연수사(延壽寺)가 자리했던 류리창은 송나라 황제 휘종이 금나라의 포로 신세가 되어 끌려갈 때, 황후와 함께 머문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 일대는 관료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다. 과거를 보기 위해 베이징으로 몰려든 유생들의 숙소도 대부분 이곳에 있었다. 류리창은 본래 각양각색의 유리제품을 만드는 공장이 많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곳곳에 골동품이나 문방구를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고 더구나 서점이 많았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베이징 류리창거리
1990년대까지만 해도 류리창은 여전히 한국인이 많이 찾는 베이징의 관광명소 중 하나였다. 이제 류리창은 사뭇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800미터에 달하는 거리에 늘어선 고서점과 골동품가게는 예전 그대로이지만 새롭게 단장을 해서인지 깔끔해졌고, 주위에는 새로 생긴 찻집이며 커피전문점도 간간이 눈에 띈다. 2002년 이 일대가 ‘역사문화도시구역’으로 선정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탓이 컸을 것이다. 정갈함에 비해 예전의 정취는 많이 사라진 듯해 아쉬움이 들기도 하지만, 대로를 벗어나 좁은 골목길인 후통(胡同)으로 들어서면 아직도 ‘지저분하지만’ 사람들이 더불어 살고 있다는 온기를 느낄 수 있다.
내성의 남문인 정양문은 아직도 남아있지만, 선무문은 철거되어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조선사신이 머물던 옥하관, 조선관의 자취도 찾아볼 길이 없다. 류리창도 청나라 때에 비해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고 관음사도 사라진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러나 류리창에서 나눈 한중 지식인의 매화향기 같은 인문교류의 역사는 양국우호의 상징으로서 우리 가슴 속에 길이 남을 것이다.
【중국도시이야기 13】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은 김지환·손승희 엮음, 『중국도시樂』, 학고방, 2017에 수록된 글임.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참고문헌
박지원 지음·김혈조 옮김, 『열하일기 3』, 돌베개, 2009.
유홍준, 『김정희: 알기 쉽게 간추린 완당평전』, 학고재, 2006.
정민,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문학동네, 2014.
추사박물관, 『추사 김정희: 추사박물관 개관 도록』, 과천시추사박물관, 2014.
洪大容 箸·夫馬進 譯, 『乾淨筆譚: 朝鮮燕行史の北京筆談錄』, 平凡社, 2016.
山口正之, 『朝鮮キリスト敎の文化史的硏究』, 御茶水書房,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