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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9월호
청말 출사대신의 일기에 나타난 동남아시아 화교 _ 조세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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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해사박물관 편, (중국범선 기영호), ((홍콩해사박물관 소개책자)), 30-31쪽).jpg

사진 1. 중국범선 기영호 사진

 

청말 출사대신(出使大臣)의 일기를 읽다 보면 중국인의 해양 문명 인식과 관련해 (비록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화교 기사들이 종종 등장한다. 청국이 해외공사관을 설립하기 전에 구미 사회로 파견한 해외사절단으로는 빈춘(斌椿) 사절단, 벌링게임(A. Burlingame) 사절단, 숭후(崇厚) 사절단 등이 있다. 보고서 성격을 띤 그들의 일기에는 예외 없이 동남아의 여러 도시(베트남, 싱가포르 등)에서 차이나타운을 방문해 화교들을 만난 기록이 나타난다. 물론 동남아 화교처럼 오랜 역사를 가지지 않았지만 일본, 미주 등지의 화교를 만난 내용도 담겨있다.


벌링게임 사절단(인터넷 자료).jpg

사진 2. 벌링게임 사절단

 

사실상 청국 최초의 외교사절단으로 평가받는 벌링게임 사절단을 수행한 장덕이(張德彝)의 일기에도 화교 기사가 풍부한데, 일본을 경유해서 미국으로 건너갔기에 우선 나가사키나 요코하마에 사는 화상들을 언급하였다. 일본은 동남아나 미주와 달리 노동자보다는 상인이 많은 특징이 있다. 청국 사절단이 요코하마에서 탑승해 태평양을 건너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던 미국 증기선 차이나호의 어두운 삼등칸에도 중국인 노동자들이 가득하였다. 미국에 도착한 후 미중 간에 체결한 벌링게임조약(1868)의 주요 내용은 화공문제였다. 중국인의 해외 도항의 자유가 북경조약(1860)에 의해 처음으로 확인된 후 열강의 식민지 개발정책에 따라 중국인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자 쿨리무역이라고 불리는 노예무역에 가까운 인력송출사업이 있었다. 이런 해외 이주사업의 자유를 승인하기 위해 이민조약을 맺은 것이다. 이 조약은 해금(海禁) 정책이 와해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존 콜롬, (대영제국), 1886년, ((지구끝까지-세상을 바꾼 100장의 지도)), 푸른길, 2014년, 130-131쪽).jpg

사진 3. 세상을 바꾼 100장의 지도

 

한 가지 에피소드를 소개해 보자. 세계 일주한 최초의 중국인으로 알려진 장덕이는 처음 유럽으로 갈 때 들린 사이공에서 화교가 운영하는 여관에 묵으며 식사를 하였다.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악어는 죽은 동물시체를 먹고 살을 찌우며 새끼를 번식시킨다. 원주민은 이런 악어를 잡아먹으나 화인은 악어고기를 싫어해 먹지 않는다. 원주민이 화인 시체를 물에 빠뜨렸는데, 악어는 그 시체를 먹지 않았다. 이 말이 사실인지 아니지는 몰라도 만약 그렇다면 악어는 지혜가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화인은 먹지 않고 원주민만을 먹겠는가? 악어가 은혜를 알아 화인을 먹지 않는 것이라고 일기에 썼다. 물론 이 말은 진실이 아니지만 장덕이의 화교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이처럼 해외사절단의 일기를 읽다 보면 과거 범법자로만 인식하던 동남아 화교들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가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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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4. 장덕이 사진과 항해술기 사진

 

이와 달리 벌링게임 사절단과 비슷한 시기 세계 일주를 한 일본 이와쿠라(岩倉) 사절단의 사이공 기억 가운데 하나는 현지 중국인들이 놀라울 정도로 불결함을 잘 견딘다는 사실이었다. 청국 사절단은 현지 화교와 원주민에 대한 이중적인 시각을 보인 것과 달리, 일본 사절단은 동남아시아에 널리 분포한 화교들을 원주민과 같이 미개인으로 취급하였다. 이와쿠라 일행은 세계 각지에서 화교들이 서양인의 멸시를 받는 현장을 보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가졌다. 과거 일본인들이 중국인들을 모두 문장과 예술에 조예가 깊고 우아한 선비로 생각하던 경향과는 극단적으로 달라진 것이다. 특히 사절단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는 여행기에서 중국인의 불결함을 일본인의 청결함과 대비시키며 차별하였다. 냄새의 문제는 계급과 신분의 차이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키워드였다.

 

청국의 동남아시아 화교정책은 해외공사관의 설치로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주영국 초대 청국 공사 곽숭도(郭嵩燾)는 영국과의 오랜 외교협상을 거친 후, 동남아지역에서 오래전부터 중국인이 밀집해 있는 싱가포르에 영사관을 세우는 일을 합의하였다. 1877년 싱가포르에 청국 영사관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중국 최초의 해외영사관이다. 곽숭도는 현지 화상이던 호선택(胡璇澤)을 초대 영사로 추천했는데, 해외 화교를 멸시하던 태도가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일기에는 영국령 해협식민지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거주하는 화교들에 대한 언급들도 나타난다.

 

곽숭도를 이은 주영국 제2대 청국 공사인 증기택(曾紀澤)도 영국 런던에서 여러 차례 담판해 싱가포르에 영사를 파견할 권리를 획득하였다. 그는 좌병륭(左秉隆)2대 영사로 추천해 1881년부터 무려 9년간 근무시켰다. 보통 영사 파견의 목적은 자국 상민의 보호와 통제 감독에 있다. 그런데 청국이 파견한 관리가 남양(南洋) 화교에 징세 등을 통해 지배하려 한 사실은 현지 식민지 당국과 외교적 갈등을 일으켰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남양은 중국의 영향력을 암시하는 용어이지만, 19세기 말 남양지역은 대부분 서양 열강의 식민지나 보호령이었다. 따라서 청국 영사의 화교들에 대한 통제 시도는 열강의 영역주권 개념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곽숭도, 증기택을 이어 얼마 후 영국으로 출사한 설복성(薛福成) 일기에도 사이공과 싱가포르에 들러 화교를 만난 사실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유럽 출사 후 오래지 않아 조정에 글을 올렸다. 내용은 서양 각국 가운데 상무를 부강의 근본으로 삼지 않는 나라는 없다. 다른 나라의 통상항구에는 반드시 영사를 설치해 상인을 보호하는데, 중국에 있는 서양 각국의 영사들의 권력은 막강하다. 우리도 남양 각 섬에 거주하는 화상들이 능욕당하고 착취 받는 것을 막기 위해 각지에 영사를 파견하고 싱가포르에서 총괄할 것을 요청하였다. 설복성의 판단으로는 동남아지역이 최대의 화교 밀집 지역이어서 상인, 노동자, 농민, 광부 등을 포함하면 적어도 300만 명 이상이 거주하거나 왕래한다고 보았다. 그의 주장의 핵심은 싱가포르영사관을 총영사관으로 승격시키는 일과 홍콩에 영사관을 설치하는 문제였다. 이런 정책을 추진한 이면에는 미국에서 화공문제를 다룬바 있는 심복 황준헌(黃遵憲)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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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5. 설복성


설복성은 1891년 가을 조정의 동의를 얻어 자신이 추천한 황준헌을 싱가포르 총영사에 임명시켰으며 원래 싱가포르 영사였던 좌병륭은 홍콩 영사로 조정하려 시도했다. 그리고 주변 페낭, 말라카 등지에도 부영사를 파견하였다. 싱가포르 총영사관의 설립은 동남아지역 화교정책의 큰 성과였다. 총영사가 된 황준헌은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주변 도서를 관리했는데, 교민의 보호를 넘어서 중국인 선박의 불법 밀수행위를 단속하였다. 하지만 동남아와 홍콩 등지에 영사관을 확대 설치하려는 시도는 열강뿐만 아니라 총리아문의 내부 반대에 부딪혀 좌절하였다.


황준헌이 화교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설복성에게 동남아시아 화교실태를 보고하면서 이들을 보호할 것을 조정에 상소하도록 요청했다. 설복성 일기에는 해금을 명확히 폐지하고 귀국 화교의 학대를 엄금해 폐단을 없애자는 내용이 담겨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화교를 순수하게 자국민으로 인정해 보호하기보다는 그들의 재력을 국가가 흡수하고 동남아로 중국 세력을 확장하려는 정치적 목적이 깔려있었다. 기존 벌링게임조약에는 해금령에 대한 명확한 폐지나 화인들이 귀국할 때 분명한 보호 규정이 없었다. 그래서 지방 토호들은 귀국 화교들을 한간(漢奸)이니 해도(海盜)니 하면서 마음대로 재물을 약탈하거나 가옥을 파괴하였다. 지방정부도 마음대로 판결해 화교의 이익을 보호해주지 않았다.

 

설복성은 총리아문에 오래된 구제도를 폐지하자는 용감한 상소문 청활제구금초래화민소(請豁除舊禁招徠華民疏)(1893)을 올렸다. 그 가운데 대체로 해금이 느슨해지면서 시대 정신은 개방적이어서, 이제는 멀리서 온 백성이나 가까운 곳에서 온 백성이나 모두 평등하게 대우해야 합니다. 비록 법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하지 않았어도, 예전의 규정들은 사실상 폐지되었습니다. 이는 해외로 나간 백성에게 특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맞추는 문제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요점은 해외 화교는 고국으로 돌아오려는 마음이 있으나 그들이 귀국하지 않는 원인은 관청의 억압 때문이다. 이에 귀국 화교를 보호하는 구체적인 조치를 제시하면서 화교를 보호하는 일은 국가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이 상소문은 중국 화교사에 이정표를 지니는 것이었다. 마침내 청국은 최종적으로 1893(음력 913) 해금령을 폐지하고 귀국 화교의 경제활동을 보장하는 화교정책의 일대 개혁을 결정하였다.

 

요컨대, 청국 근대외교의 출발은 화교정책과 깊은 관련성을 가지며, 이 정책은 수백 년간 유지되었던 해금령의 종말을 가져오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곧이어 중국인의 해외 이민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해외에 사는 중국인을 화교라는 공식용어로 제도화하였다.

 

   

조세현 _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사진 1. 홍콩해사박물관 소개책자 30-31쪽

사진 2. www.kongfz.com

사진 3. 콜롬, (대영제국), 1886년, ((지구끝까지-세상을 바꾼 100장의 지도)), 푸른길, 2014년, 130-131쪽)

사진 4. 鍾叔河 主編, ((走向世界叢書))제1집, 岳麓書社, 1985년 속표지 가운데 (장덕이 사진과 항해술기 사진)

사진 5. https://www.163.com/dy/article/G6M16G6D0514R9P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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