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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시사&테마
6월호
원시적 욕망이 경쟁하는 세계 - 영화가 그려낸 현대 중국의 현실 _ 김태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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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혁이후 중국사회의 변화를 이해하는데 영화는 훌륭한 통로의 역할을 해왔다. 북경 영화학교 78학번 동기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로운 영화들은 기성의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영화문법을 개척함으로써 중국영화의 신기원을 열었다. 소위 5세대 영화인들로 불리는 이들의 활동은 국제적으로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는데, 이들 가운데서도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영화감독이 리샤오홍(李少紅)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던 그는 북경영화학교 동기인 장이모, 첸카이거, 티엔주앙주앙 등과 함께, 이전 선배들이 영화를 선전의 도구 혹은 투쟁의 무기로 생각했던 전통에서 벗어나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의 문제를 독특한 시각에서 조명함으로써 중국사회 깊숙한 곳에 숨어있는 폭력성을 드러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이름이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血色淸晨>(한국에서는 붉은 가마라는 이름으로 상영)이라는 작품이 낭트영화제에서 금상을 수상하면서 부터이다. 1985년 첸카이거의 <황토지>가 홍콩국제영화제에 상영되면서 5세대 영화의 탄생을 알린 지 한참이 지난 88년에야 데뷔작 <은뱀사건>을 발표한 그는 남미소설의 대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각색한 영화 <血色淸晨>에서 여성의 문제를 통해 중국사회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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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血色淸晨> 영화포스터


그는 이 영화에서 여전히 여성은 매매혼의 대상이며, 일종의 자산으로 취급받고 있음을 냉정하게 지적한다. 대수갱(大水坑)이라는 마을의 유일한 교사 이명광은 매력 있는 청년이다. 그의 학교는 답답한 시골에서 탈출을 꿈꾸는 홍행(紅杏)과 영방(永芳)에게는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거기에는 바깥 세계를 엿볼 수 있는 화보책자들이 있고, 매력 있는 지식청년인 이명광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시에 나가 돈을 벌어 온 강국(强國)이 등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마을에서 제일 부자인 강국은 홍행의 미혼인 36세 오라비에게 자신의 불구 누이와 결혼할 것을 권유하고 대신 자신은 홍행과 결혼하는 환친(換親)을 제안한다. 그러나 화려한 결혼식이 끝난 후 초야를 치르던 강국은 홍행이 처녀가 아니라고 분노하고 환친을 무효로 돌린다. 이에 격분한 홍행의 오라비 평왜(平娃)형제는 명광을 홍행의 처녀성을 앗아간 자로 지목하고 마을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살해한다. 살인자들은 사형에 처해지고, 홍행은 자살하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이 영화는 살인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마을을 찾아 온 수사관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감독은 차갑게 분노 없이 살인의 전 과정을 추적해 나간다. 이 영화에서 압권의 장면은 마을 사람이 높은 곳에 둘러서서 살인을 방관하는 모습들이다. 카메라는 무표정한 혹은 약간의 안타까움을 표시할 뿐 방관자로 살인을 바라보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을 그냥 담아낸다.

 

<血色淸晨>은 현실적으로 중국이 직면해 있는 문제들을 냉정하게 보여준다. 시장사회의 발전이 가져온 가치관의 문제, 여성의 처절한 사회적 지위의 문제, 공권력의 무능 등의 문제들이다. 가치관의 문제는 강국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가감 없이 드러난다. 사실상 대수갱의 지배자인 그에게 돈은 모든 권력의 원천이다. 그리고 그러한 권력은 매우 야만적인 방식으로 행사된다. 사실 평왜형제는 강국의 시나리오 안에서 움직이는 꼭두각시와 같다. 그래서 그들이 지배하는 것은 오직 원시적 욕망이다. 1990년에 제작되었으나 1992년에야 상영된 이 영화는 항일전쟁 시기를 다룬 첸카이거의 <황토지>에서 모호하게 남겨져 있던 주인공 여성의 미래가 신중국 성립이후에도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남성 감독들이 말하지 않는 세상을 그려냈을 뿐만 아니라 중국사회의 저변에 존재하는 원시적 욕망의 야만성을 폭로하는 데 성공했다.

 

리샤오홍이 90년대 초에 변방의 가난한 마을에서 찾아낸 그 원시적 욕망은 그보다 20여년 뒤에 지아장커(賈樟柯)<천주정>(天注定)이라는 영화에서는 시장화된, 그래서 더욱 폭력적인 형태로 등장한다. 2013년에 발표된 <천주정>4개의 이야기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의 영화이다.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소무(小武)>에서 소매치기라는 전통적 직업(손을 사용한다는 점에서)을 가진 범죄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시각이 <천주정>에서는 사회적 부적응자들이 어쩔 수 없이 혹은 적극적으로 저지르는 살인의 문제들로 옮아가 있다.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현실의 재현이다. <천주정>은 실제로 사회적 문제가 되었던 4건의 살인사건을 가져와 자신의 영화적 맥락 속에서 재구성한 것이다.(그래서 영화 인물들의 이름에 실제사건의 주인공 이름자를 사용하는 등 현실 사건을 추론할 수 있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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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 <天注定> 영화포스터


첫 번째 이야기인 대해(大海)의 살인은 감독과 동향인 산시(山西)성 출신으로 200114명을 총으로 쏴죽인 호문해(胡文海) 사건을 모델로 한 것이다. 부패한 관리와 그와 결탁한 기업가들, 그리고 그들의 지배 하에서 생계에 급급한 노동자들을 바라보며, 대해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좌절하고, 절망 속에서 말이 아니라 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한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인 세째(三兒)는 냉혹한 살인자이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그는 자신을 약탈하려는 지역 무뢰배 3인을 권총으로 사살한다. 이 이야기의 모델은 2012년 권총강도 살인 사건의 지명수배자로 체포된 뒤 처형당한 주극화(周克華) 사건이었다. 그는 호남성, 사천성, 강소성 등의 지역에서 강도 살인을 저지른 인물이었다.

 

세 번째 이야기에서는 소옥(小玉)이라는 여성의 살인을 다루는데, 이 에피소드는 2009년 호북성의 한 호텔에서 자신을 강간하려한 정부직원 2인을 살해한 등옥교(鄧玉嬌) 사건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배경을 동관(東筦)으로 바꾸고 불륜과 동관식 성매매 체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살인의 맥락을 구성하고 있다.

 

네 번째 이야기는 자살이다. 수탈적 공장체제 아래서 노동자 생활을 하는 소휘(小輝)는 부채를 갚기 위해 직장을 전전하면서 사랑과 행복한 삶을 꿈꾸지만 그가 도달한 지점은 스스로의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애플제품을 생산하는 폭스콘에서 발생했던 자살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휘가 마지막으로 일한 대만계 기업의 명칭이 FSK라는 점은 암시적이다.

 

천주정은 성숙한 시장사회를 겪고 있는 중국이 사실은 엄청난 혼란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공공이 사용하는 길을 막고 통행료를 징수하려는 지역 무뢰배나 관리/유력자들, 지역의 광산을 관과 짜고 불하받은 다음 마세라티를 타는 부호로 변모한 광산회사의 사장 등 <소무>이래로 지아장커가 그리는 중국사회는 편법이 횡행하고, 부적응자가 넘치는 사회다. 그가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부패한 시장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신의 분노를 극단적 방법으로 표출하거나, 광대한 중국의 지역적 특성을 활용하여 강도 살인을 저지르는 방식으로 돈을 벌거나, 이도저도 할 수 없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들이다. 영화의 제목처럼 이들의 삶은 하늘이 운명으로 정해 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무>의 감독으로 일할 때 지아장커는 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자신이 실업자이고, 손으로 일한다는 점에서 소무와 닮아있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중화인민공화국 제13차 전국인민대표대회의 대표이고 최고인민검찰원의 특약 관찰원과 감독원등 의 직책을 수행(바이두 사전)하는 중심에 진입한 인물이 되었다. 그러한 사회적 지위가 표현의 자유를 얻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아니면 그 자신도 욕망의 사다리를 선택한 것인가? 그럼에도 <천주정>에서 묘사되는 참혹한 중국의 현실은, 중국이 수많은 보통 사람들의 분노와 한이 쌓여가는 슬픈 공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소홍이 20여 년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희망-중국이 정의로운 사회가 되리라는-이 변방에서 출발해서 중심에 진입하게 된 지아장커의 영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음은 무엇 때문일까.


김태승의 六十五非 12


김태승 _ 아주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


                                       


* 이 글에 사용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으로, 출처는 다음과 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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