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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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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호
삼학사의 한이 서린 선양 _ 김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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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양(瀋陽)은 랴오닝성의 성도로서 인구 800여만 명이 거주하는 대도시이다. 역사적으로 펑텐(奉天), 성징(盛京) 등으로 불렸으며, 만주어로는 묵덴이라고 하였다. 한국인이 선양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면 곧 병자호란과 인조, 그리고 삼학사의 기억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선양은 중국의 마지막 왕조인 청나라의 수도였으며, 명을 멸망시키고 베이징으로 천도한 이후 배도(陪都)로서 만주족의 성지로 간주되어 왔다.


1625년 후금의 누르하치(청태조)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이후 랴오양(遼陽)으로부터 안전지대인 선양으로 수도를 이전하여 성징(盛京)이라 이름하였다. 선양을 수도로 정한 이유는 만주의 서남쪽에 위치하여 서쪽의 명나라와 남쪽의 조선을 공략하기에 적합한 지리적 여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양에서 베이징까지의 거리(1454리)와 한양까지의 거리(1615리)는 엇비슷하였다. 선양이 가진 전술적인 중요성에 대해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선양은 청나라가 처음 일어난 곳으로, 동으로는 영고탑에 접해 있고, 북으로는 열하(熱河)를 제어하고, 남으로는 조선을 어루만지며, 서쪽으로 중국을 향해 진격해 들어가니, 중국은 감히 꼼짝을 못하였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청 태조는 선양에 도읍을 정하고 여기에 황궁을 건축하였는데, 당시 선양의 이름인 성징을 붙여 성징고궁이라 하였다.


사진 1  선양고궁(현재 선양고궁박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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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오랫동안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며 선린관계를 유지해왔다.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이 발생하던 즈음에 중국은 명청 교체기에 해당되어, 명의 쇠퇴와 청의 부상이 국제질서의 핵심이었다. 청이 명을 제치고 동아시아의 맹주로 부상한 것이다. 그럼에도 조선은 이와 같은 국제정세의 변화와 대응에 준비가 크게 부족하였다. 1616년 여진족 가운데 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건주여진의 추장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세력을 확장하여 마침내 1618년 푸순(撫順)을 점령하고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이에 명은 후금의 위협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위해 대규모 출병을 결정하고, 조선에도 원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이 때 후금도 조선에 중립을 지키도록 강요하였다.


후금은 명과의 관계를 단절할 것과 후금을 형의 국가로 조선을 동생의 국가로 삼는 형제관계를 체결할 것, 그리고 세폐의 공납을 조선에 요구하였다. 조선은 명과의 단교는 받아들이지 않고 후금을 형의 나라로 섬기라는 요구만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성균관 유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였다. 화의를 주창한 자의 목을 베어 함에 담아 명나라로 보내야 하며, 결사항전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사림 출신들은 최명길이 화의를 주장하여 대의를 그르쳤으니 죄를 물어야 한다고 한 바탕 소동을 벌였다. 후금에 대응하는 문제로 명분파와 실리파로 나뉘어 분란을 일으키다 끝내 척화파와 주화파로 갈라지고 말았다.


1936년 11월 말 팔기군사가 집결한 선양에서 청 태종은 조선에 대한 친정을 선언하였다. 태종의 동생인 예친왕 도르곤도 우익군으로 참전하였다. 12월 2일, 12만 8천명의 대군이 마침내 선양을 출발하여 장도에 올랐다. 12월 8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왔다. 의주 부윤 임경업이 백마산성에서 방어진을 치자, 청군은 진로를 변경하여 곧바로 한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선은 다급히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명나라는 스스로를 지키기에도 급급한 상태였다.


청군은 한양을 함락시키고 나아가 인조와 조선군이 머물러 있던 남한산성을 이중 삼중으로 포위하였다. 성안에는 1만 2천 명의 군사가 50일분도 남지 않은 식량으로 근근히 버티며 사기가 크게 저하된 상태였다. 포위된지 45일이 경과하자 인조는 항복 외에는 방도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협상과정에서 인조는 항복 대신 하성이라는 용어를 쓰고자 간청했지만, 청군은 한술 더 떠 반합(飯哈)의 의례를 요구하였다. 이는 마치 장례를 치르듯이 '임금의 두 손을 묶은 다음 죽은 사람처럼 구슬을 입에 물리고 빈 관과 함께 항복'하는 의식이었다. 나중에 삼궤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로 타협했지만, 이 또한 세 번 절할 때마다 세 번씩 머리를 땅에 찧는 굴욕적인 형식이었다. 1637년 1월 30일 통곡하는 50여명의 일행과 함께 선두에 인조와 세자가 언 땅을 맨발로 딛고 성 밖으로 걸어 나왔다. 조선은 청과 군신지맹을 체결하고,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며, 무역관계를 회복하는 등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조선은 왕자를 비롯한 인질을 심양에 보낼 것, 세폐를 바칠 것 등 10여개 조항을 받아들였다.


사진 2  청태종이 잠들어 있는 선양 푸링(福陵)의 청태종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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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7년 2월 8일 인조의 장남인 소현세자(李溰)와 봉림대군, 인평대군이 수많은 인질들과 함께 청의 수도인 선양으로 길을 떠났다. 창릉까지 전송 나온 인조는 청군에게 자식들이 여러 날 노숙해서 병이 생겼다며 온돌방에서 잘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창릉을 출발한 세자 일행은 고양군, 이천, 장단 판부촌, 개성, 평양, 의주를 거쳐 3월 30일 압록강을 건너 4월 10일 마침내 선양에 도착하였다. 이 때 소현세자의 나이 26세였다.


일행은 먼 길을 걸어 남탑에 이르렀고, 대남변문을 거쳐 토성인 외성으로 들어갔다. 외성을 지나 번화가가 나오고 이어 벽돌로 쌓은 내성에 다다랐다. 내성 대남문 안에 있던 동관이 종착지였는데, 바로 현재의 선양시립아동도서관 자리에 있었다. 동관에 머물던 중 5월 7일 새로 지은 선양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선양은 1644년 베이징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청의 수도로서 여러 지역에서 온 포로들과 노획한 물건들이 몰려들었으며, 여러 나라의 춤과 음악, 잡극까지 들어왔다. 청 황제는 연례적인 연회 외에도, 승전을 축하하는 잔치를 열거나 활쏘기, 씨름대회를 열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는 으레 여러 나라의 춤과 음악, 잡극이 공연되었다. 1638년 1월 1일 황제가 베푼 연회에는 조선의 여악과 배우들도 춤을 추고, 연주를 하였다. 이를 보는 조선인들이나 연주를 하는 여악대들이나 비감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심양일기』에서 소현세자는 “이날 온갖 잡극을 공연하고 우리나라 여악, 배우도 나와 연주하니, 눈이 마주칠 때마다 등골이 저려 차마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여악대 중에는 눈물을 흘리며 노래하는 자도 있었다”라고 회고하였다.


세자 일행과 함께 청과의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척화파의 거두인 사헌부 장령 홍익한(1586-1637), 홍문관의 교리와 수찬을 지낸 윤집(1606-1637)과 오달제(1609-1637)도 함께 인질로 끌려갔다. 청 태종은 홍익한을 비롯한 척화파들을 회유하려 하였다. 과거 수많은 명나라 유신들을 받아들인 마당에, 조선의 척화파까지도 은덕으로 감화시켰다는 소문은 향후 조선을 지배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용골대가 홍익한에게 “너희 나라 신료들 가운데 척화를 주장한 자가 적지 않은데 어찌 유독 너만 끌려왔는가”라고 묻자 “작년 봄에 네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를 올려 너의 머리를 베자고 청한 것은 나 한 사람뿐”이라고 응수했다.


예부 건물에 갇혀있던 홍익한은 3월에, 오달제와 윤집은 4월에 각각 대서변문 밖에서 참수 당하였다. 현재 선양 중산공원 부근 자리이다. 하지만 반청의 상징인 이 세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훗날 인골들이 널려있는 심양 형장에서 이들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이들 집안에서는 종들을 시켜 초혼하여 유품들을 묻어 가묘를 만들었다. 송시열은 『삼학사전』에서 이들을 삼학사라 칭송하며, 그 이름을 만대에 전하였다. 조선에서는 이들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정문을 내리고, 홍익한에게는 忠正, 윤집에게는 忠貞, 오달제에게는 忠烈이라는 시호를 각각 내렸다.


선양은 조선사신들이 베이징으로 향하는 경로였다. 17세기 초반과 중반 조선사신들은 청조에 대한 증오와 혐오가 가득하였으며, 선양은 슬픔과 굴욕의 장소로 기억되었다. 서호수의 『연행기』에서는 “외양문에서 서관문까지 양쪽 길은 모두 상점들로 가득하다. 이곳이 바로 삼학사 홍익한, 윤집, 오달제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장소이다.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면서 깊은 존경심을 느꼈다”라고 기록하였다. 박사호는 『燕薊紀程』에서 “선양의 서문 밖은 삼학사가 나라를 위해 세상을 떠난 곳이다. 행인들이 장소를 지적해주자 나는 화가 치밀었으며 머리카락이 곤두서고 눈에서는 눈물이 터져 나올 듯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17세기 말, 18세기 초 조선사신 홍량호는 『盛京』에서 “상서로운 용과 호랑이의 문양이 사막의 하늘에 있으며, 위대한 도시 선양은 베이징을 흘겨본다”라고 기술하였다. 신후재는 『瀋京』에서 “도시는 인상적이고, 무기는 강대하며, 벽은 하늘을 찌르고, 청동지붕은 태양 아래 날아오를 듯하다”고 묘사하였다. 이정신도 『到瀋陽次正使韻』에서 “선양은 전쟁을 위한 말과 가축들을 구비하고 있다. 도시의 성벽은 견고하여 어떠한 공격에도 견딜 수 있다”고 감탄하였다.


이로부터 조선과 중국 간의 갈등관계가 점차 누그러지면서 양국이 정상적인 국교관계로 접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힘입어 조선사신들은 선양을 유구한 역사를 가진 계획도시로서, 도시의 발전과 번영을 주요한 이미지로 묘사하였던 것이다. 이후 선양은 조선과 중국이 상호 왕래하고 교류하는 중심도시로 각인되게 되었다.


【중국도시이야기 6】

 

김지환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 이 글에서 사용한 이미지는 필자가 제공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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