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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508-2884 (Online)

현장&공간
11월호
연구성과 소개 (1) _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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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1927년 조선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 - 인천화교배척사건을 중심으로, 『동양사학연구제135, 2016.6, 283-319쪽.


이 논문은 1927년 조선에서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를 인천지역을 중심으로 분석한 것이다. 이 사건은 우리에게 만보산사건으로 잘 알려진 1931년 화교배척사건의 4년 전에 발생한 것으로, ‘만보산사건해명에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거의 연구되지 않았다. 일부 연구가 이뤄진 것이 있지만 전적으로 이 사건을 다룬 것은 아니며 만주의 조선인 배척에 대한 조선 내의 재만동포옹호동맹의 일환으로 분석한 것에 불과했다.

 

이 논문이 활용한 주요한 자료는 이 사건에 대한 주조선중화민국총영사관의 피해보고서 당안과 조선총독부경무국의 조사보고서이다. 주조선중화민국총영사관의 피해보고서는 모두 6개 파일이다. 먼저 피해지역인 전라도, 충청도 각 지역의 인적 및 물적 피해를 기록한 보고서인 各地華僑被害直接損失報告單(1-2)’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전라도와 충청도의 화상이 영업을 하지 못해 발생한 간접손실 보고서인 各地華僑被害間接損失報告單(1-4)’4개 파일이다. 그리고 인천지역의 배화사건을 보고한 仁川鮮人暴動華人被害報告書仁川華商因鮮人暴動間接損失調査表당안이다. 피해자측인 주조선중화민국총영사관의 피해보고서만을 활용하면 경위나 피해 정도의 균형을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조선총독부경무국이 이 사건을 조사한 昭和二年 在留支那人排斥事件狀況’(1927년 재류지나인배척사건상황) 보고서를 활용했다.


이와 같은 1차 자료를 활용하여 분석한 1927년 조선화교 배척사건의 실태는 다음과 같았다. 조선총독부경무국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전체의 습격 건수는 702건으로 이 가운데 경기도가 205건으로 전체의 36%를 차지하여 가장 많았고, 충남은 158(23%), 이 사건의 발원지인 전남은 100(14%)으로 그 다음을 차지했다. 습격사건은 주로 조선의 남부지역이 중심이고 북부지역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다. 전체 인적 피해상황은 사망 2, 중상 11, 경상 54, 단순 폭행피해자 273명으로 340명이었다. 인적피해의 정도는 경기도가 174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북 54, 충남 34명의 순으로 많았다. 물적 피해 상황은 경기도가 전체의 6할을 차지하고, 전북이 3할을 차지하여 두 개 도가 전체의 9할을 차지했다.


이렇게 볼 때, 1927년 화교배척사건은 전라남도 이리에서 만주의 중국 관헌과 민간인의 조선인 배척으로 촉발되어 관헌의 발 빠른 진압과 탄압으로 빨리 진정되었지만, 충청도와 경기도로 확산되면서 이들 지역에서 피해가 컸던 것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가운데서 인천의 물적 피해가 도 전체의 9할을 차지하여 가장 컸다.


인천화교배척사건은 14일부터 시작되어 1215일 오후 430분부터 지나정 근처를 중심으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인천경찰서는 인천의 중국영사관의 거듭된 보호요청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자, 사건은 단시간에 인천시 전역으로 번져 화교 경영의 상점, 여관, 중화요리식당, 양말공장을 닥치는 대로 습격했다. 조선인 군중 천여 명은 화교의 집단거주지인 지나정을 습격하려 했지만 화교의 저항과 경찰의 출동로 피해는 없었다. 이러한 1927년 화교배척사건의 경위와 실태를 1931년 화교배척사건과 비교하여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927년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에 대해 주조선중화민국총영사관의 피해보고서와 조선총독부경무국의 보고서는 모두 중국 당국의 재만조선인에 대한 탄압과 구축의 사실이 조선 내에 보도된 것에서 찾았는데, 이점은 1931년 사건이 장춘의 만보산에서 조선인 농민이 중국 당국의 탄압으로 다수 살해되었다는 조선일보193172일 호외의 오보 기사에서 시작된 것과 유사하다.


유사한 배경에서 촉발된 두 화교배척사건이지만 사건의 전개 양상에는 상당한 차이가 존재했다. 1927년 사건의 주요한 피해지역은 전라도, 충청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남부지역인 반면, 1931년 사건은 평안남도와 평안북도 그리고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한 북부지역이었다. 왜 이러한 결과가 초래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더 면밀한 검토가 있어야 하겠지만, 본고의 검토를 기반으로 생각해보면 조선총독부의 언론통제의 양상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조선총독부는 1927년 사건 이전부터 재만조선인에 대한 중국 당국의 탄압과 구축의 사실이 조선 국내의 조선인을 과도하게 자극하는 기사는 검열에서 통과시켜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배화사건 관련 기사는 거의 게재하지 못하도록 엄격한 보도통제를 시행했다. 반면, 조선총독부는 1931년 사건에서는 조선일보의 호외 오보기사를 검열에서 통과시켰을 뿐 아니라 각 신문의 배화사건 관련 기사의 게재에 대해서도 엄격한 통제를 시행하지 않아 관련 기사가 많이 실렸다. 이러한 화교배척사건의 기사가 각 신문을 통해 전국적으로 배포되면서 인천에서 시작된 사건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것은 아닐까 한다.


다음은 1927년 사건에서 인천화교의 피해가 가장 큰 원인에 관한 것이다. 인천화교는 화교 집단거주지인 지나정(현 차이나타운)과 새롭게 조성된 삼리채 청국조계 지역 부근인 내리, 외리, 신정 등지에서 조선인과 잡거했다. 이번 사건의 최대의 화교피해지는 내리, 외리, 신정이었으며 조선인과 잡거하는 지역이기 때문에 조선인의 습격을 받기 쉬웠고 경찰도 폭동을 진압하기 어려운 지역이었다.


배화사건이 일어난 지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고 경기도의 타 지역에서 습격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고 있는 시점에서, 인천경찰서는 사전경계를 보다 철저히 하고 경찰무장을 통해 초기진압을 보다 강력히 단행할 필요가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의도적인 사보타주는 아니라 하더라도 인천경찰서의 책임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실패가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1931년 사건은 73일 새벽 1시 인천에서 시작되어 사태가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경기도경찰부에서 응원경찰이 도착한 것은 3일 오후 430, 보다 사태가 험악해지자 경찰의 무장을 단행한 것은 4일 오후 9, 헌병이 경성에서 도착한 것은 5일 새벽 2시였다. 당국의 초기대응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인천경찰서의 초기대응이 신속하게 이뤄졌다고 해서 사건 발생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피해를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1927년 인천화교배척사건으로 인한 인천화교의 인적 및 물적 피해는 살펴본 대로이지만 이 사건이 인천화교의 사회와 경제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것은 아니었다. 화교경제의 중심지인 지나정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으며 기타 지역에서 피해를 입은 화상은 곧 영업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반면, 1931년 인천화교배척사건은 인천화상의 대량 귀국과 폐점을 초래하고 다시는 이전의 경제력을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이정희 _ 인천대학교 중국학술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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